▲송골매의 눈빛, 송골매의 날갯짓1999년은 그런 점에서 송진우의 선수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고비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제껏 ‘강하게, 더 강하게’를 외치며 달려왔던 송진우는 그해부터 ‘의도적으로 느리게 던지는 공’인 서클체인지업을 던지기 시작했고, ‘약하게, 약하게, 갑자기 강하게’를 구사하는 선수로 변신할 수 있었다.
한화 이글스
이듬해인 1993년에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하며 한 숨 쉬어갈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 큰 행운이었는 지도 모른다.
홈경기에만 출전하는 '반쪽짜리 선수'로서는 적지 않은 72.2이닝을 던지며 7승과 8세이브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데뷔 이래 4년간 마구잡이로 무리해온 어깨를 아끼고 복잡한 마음도 진정시키며 조금 물러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이 팀 사정에도 조금 변화가 생기며 송진우에게 여유를 주기 시작했다. 92년부터 선발진에 가세한 정민철에 이어 93년에 입단해 94년부터 실력발휘를 하기 시작한 구대성은 불펜 쪽의 허전함을 일시에 해결해주었던 것이다.
김영덕 감독에 이어 94년부터 지휘봉을 잡기 시작한 강병철 감독은 그 해 구대성과 송진우를 더블스토퍼로 활용하며 송진우의 비중을 선발 쪽으로 옮겨놓기 시작했고, 95년부터는 선발투수로 전업시키는 조치를 단행했다.
송진우가 선발투수로서 95년 13승, 96년 15승을 거두며 제 2의 전성기를 열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적절한 상황의 변화와 후배 투수들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97년과 98년, 평균자책점이 4점대 후반까지 치솟은 가운데 6승씩을 올리는데 그치며 부진하자 송진우의 선수생활이 이제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했다는 것은 일반적인 평가가 되어버렸다. 두 해 연속된 성적도 그랬지만, 이미 삼십대 중반에 들어선 나이와 선수생활 초년기의 무리에 대한 기억이 충분한 근거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공은 조금씩 느려지고 있었고, 변화구의 각도 조금씩 무뎌지고 있었으며, 타자들의 타격기술은 눈에 띄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송진우 자신은 관성에 빠져 있었고, 어제까지는 통하다가 오늘 갑자기 막히는 상황에 대해 당황하고 있었다. 그래서 경기 때마다 공은 맞아나갔고, 송진우라는 이름이 주는 공포감도 부쩍 줄어들고 있었다.
1999년은 그런 점에서 송진우의 선수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한 고비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제껏 '강하게, 더 강하게'를 외치며 달려왔던 송진우는 그 해부터 '의도적으로 느리게 던지는 공'인 서클체인지업을 던지기 시작했고, '약하게, 약하게, 갑자기 강하게'를 구사하는 선수로 변신할 수 있었다.
'완급조절'이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힘으로 윽박질러 상대를 무너뜨리고 싶은 짜릿한 유혹을 이겨야 하고, 더 이상 힘만으로는 안된다는 씁쓸한 현실과도 마주해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해진 송진우가 8번의 완투를 곁들여 186.2이닝이나 소화하며 15승을 올리는 의외의 활약 속에서, 팀은 드디어 첫 우승에 성공하기도 했다.
20년간의 도전, 20년간의 응전20년간 정상을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을 물을 때마다 그가 민망해하며 그저 '타고난 통뼈라서'라고 답하는 것을 사람들은 곧이곧대로 믿기도 한다. 그러나 그 20년간의 '전설'은 끊임없는 위기와 극복이었고 도전과 응전이었으며, 불운과 역경을 이겨내려는 오기와 노력의 역사였다.
2000년에는 선수협 '회장님'으로서 회오리의 중심에서 거의 혼자 몸으로 버텨내면서도 마운드에서도 13승을 올리며 삐딱한 시선을 정면돌파하기도 했고, 지난 2007년에는 데뷔 후 최악의 성적으로 '마지막'을 예상하게 하다가도 올 시즌 또다시 부활하며 '제 4의 전성기'를 열고 있기도 하다.
프로야구에서 투수부문 역대 '최고령'과 '최다'에 관한 모든 전설적인 기록들을 만들어내고 있지만, 사실 그는 6년이나 손해를 보며 이 경주를 시작했다. 소년체전 출전 때문에 초등학생 시절 호적을 한 번 고쳐 1년을 '꿇었고', 대학 4년을 보낸 데 이어 올림픽 출전을 위해 대학 동기들보다도 1년 늦게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사실 소심한 편이다. 프로생활 초엽에 겪은 퍼펙트게임 무산의 순간이 그랬듯, 대기록 수립의 코앞에서 그는 늘 주춤거리곤 한다. 지난 2006년 8월 29일 광주에서 역사적인 200승의 대기록을 작성하기 전에도 네 번이나 고개를 숙인 채 마운드를 내려와야 했고, 올 6월 6일 통산 2000탈삼진 기록을 달성하기 전에도 한 경기에 삼진 두 개 잡기도 빠듯해하며 팬들이 준비한 플래카드를 말아쥔 채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게 만든 5월 한 달이 있었다.
그는 그렇게 남들보다 늦게 출발해 뛰고 걷고를 반복했고, 결정적인 순간에 여러 번 주저앉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천천히, 또박또박 그러나 악랄하게' 목표지점을 향해 걸어왔고, 좋은 날에는 토끼처럼 뛰어서, 궂은 날에는 거북이처럼 기어서 누구도 꿈꾸어보지 못한 곳에 닿았으며, 또 지나치고 있다. 분명한 목표의식과 끈질긴 도전이야말로 가장 강한 무기임을, 그는 한 삶을 통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6이닝을 더 던진다면, 통산 3000이닝이라는 또 하나의 금자탑을 우리는 목격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그라운드에서 그가 도달할 마지막 목표인지, 아직은 알 수 없다. 그가 최초로 150승을 돌파하고 200승을 돌파해 모두가 '다 이루었다'고 박수칠 때도 혼자 또 다른 도전을 시작했던 그였기 때문이다.
짜릿한 승리와 찬란한 기록, 그리고 이제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시작되는 반전과 그 끈질긴 승부의 감동. 그와 더불어 우리는 야구에 대해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더 깊이 느꼈고, 미처 알지 못하던 구석을 새로이 배우기도 했다. 굴곡이 있었고, 소소한 논쟁거리들을 남기기도 했지만 삶 전체로써 모든 논쟁을 덮기에 충분했던, 그래서 '최고의 선수'로서 논쟁의 여지 없이 꼽을 수 있는, 그런 선수를 직접 지켜보고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동시대 모든 야구팬들의 커다란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