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이언츠의 젊은 에이스주형광은 프로무대에 들어선 1994년 역대 최연소 승리, 완투승, 완봉승 기록을 작성했고, 첫 여섯 시즌동안 다섯 번 두자릿수 승리를 기록하며 90년대 중후반 자이언츠의 '오늘이자 내일'로 떠올랐다.
롯데 자이언츠
4년 뒤, 자이언츠는 또 한 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이번에 만난 상대는 라이온즈였고, 역시 객관적 전력 면에서는 밀린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그러나 1984년의 최동원, 992년의 염종석이 그랬듯, '객관적인 열세'는 자이언츠 에이스들에게 새삼스런 짐이 아니었다. 그리고 매 순간 바로 그 객관적 조건과 맞서, 이기건 지건 새겨질 때마다 사람을 달아오르게 만드는 전설을 남기는 것이 바로 자이언츠라는 팀의 매력이다.
<야구의 추억>에서만 하더라도 박정태를 떠올릴 때, 임수혁을 떠올릴 때, 공필성을 떠올릴 때 거듭 되풀이해서 새겨졌던 바로 그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 호세의 추격홈런과 경기중단 사태, 그리고 마해영의 동점홈런과 김종훈과 이승엽의 또다시 달아나는 홈런, 임수혁이 또다시 동점을 만들어내는 홈런으로 이어진 드라마의 마침표를 찍은 것은 주형광이었다.
연장 10회말, 1사 만루. 꼭 안타가 아니라도 외야플라이나 어지간한 내야 땅볼만 나오더라도 그대로 경기가 끝나게 될 위기의 순간에 등장한 그는 삼진과 유격수땅볼로 위기를 넘겨 11회로 승부를 이어냈고, 김민재의 역전타로 한 점을 뽑고 돌아온 11회말에는 세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내며 다시 한 번 한국시리즈 진출을 확정짓고 말았다. 그리고 꼭 4년 전 그 순간과 꼭 같았던 벅찬 환희의 웃음.
이듬해부터는 주형광과 자이언츠가 함께 길고 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들 새천년이라고 들떠있던 2000년 봄 임수혁이 쓰러졌고, 2001년에는 마해영이 내보내졌다. 그리고 데뷔 이후 6년간 꾸준히 200이닝을 넘나드는 공을 던지며 팔꿈치 인대가 닳아 없어질 정도로 무리한 주형광도 2001년 겨울 수술대 위에 올라야 했다.
그리고 그리 어렵지 않다던 수술은 결과적으로 실패였고, 2003년 돌아온 주형광은 예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더 이상 200이닝을 던질 수도, 스트라이크존으로 줄타기를 하듯 했던 제구력을 뽐낼 수도 없었다. 공 끝에 힘이 떨어지며 장타를 허용하는 일이 많아졌고, 그런 일이 반복되며 더 이상 '주형광'이라는 이름에서 압박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대타자들은 더욱 자신만만하게 덤벼들었다. 수술 이후 여섯 시즌동안 그가 거둔 승리는 고작 10번이었다.
마해영과 임수혁, 그리고 주형광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었던 자이언츠도 추락하기 시작했고, 2001년부터 2004년까지, 4년 연속 꼴찌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2002년 10월 15일 147명, 16일 96명, 19일 69명. 3만 명이 앉을 수 있는 사직구장은 같은 크기의 동네 공원만도 못한 사람들만이 자리를 지키는 공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부산 야구의 봄, 주형광을 떠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