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마지막 유니폼영욕을 함께했던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었고, 히어로즈 창단 초기의 몸살을 제일 앞에서 앓으며 방출과 숨바꼭질, 인천팀 복귀설에 이은 기아 전격입단과 또다시 전격적인 은퇴선언과 코치로서 히어로즈 복귀까지.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자들을 피해 다니고, 눈물을 보이고, 팬들 앞에 사죄하며 이해를 구하고, 비난받고 외면당하는 과정을 되밟았다
기아 타이거즈
그러나 6회초 선두 대타로 나선 김영직의 노련한 노려치기 안타, 그리고 2사후 대면한 김재현에게, 그 후로 십수년간 금지구역으로 통하게 되는 몸쪽 직구를 던지다가 허용한 우중월 2루타로 한 점을 주고 일찌감치 마운드를 정명원에게 넘긴 순간부터 비극은 시작되었다. 충분한 휴식마저 취하고 나온 구원왕 정명원은 곧장 서용빈에게 적시타를 내주며 한 점을 더 내준데 이어, 7회초 다시 김영직과 유지현에게 적시타를 맞고 역전을 허용하고 말았던 것이다.
결국 그 해 한국시리즈는 4연패로 마감했고, 그 다음 시즌을 끝으로 팀이 현대에 매각되면서 태평양의 돌풍도 소멸되었다. 그렇지만 94년 한국시리즈 3차전의 호투는, 마치 2007년 한국시리즈 4차전의 김광현이 2008년 페넌트레이스 MVP 김광현을 예상하게 해주었던 것처럼, 정민태가 그대로 흘러가버릴 투수가 아니라는 점을 확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리고 현대 유니콘스가 창단 첫 해부터 강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94년 한국시리즈 3차전을 계기로 완전히 깨어나기 시작한 정민태가 있었기 때문이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5년간은 정민태의 전성기였고, 현대 유니콘스의 황금기였다. 정민태는 가운데로 던져도 못 때린다는 직구와 함께 반포크볼, 그리고 시속 100km도 안되는 초슬로커브까지 장착해 리그를 완전히 장악했다. 그 다섯 해 동안 정민태는 해마다 200이닝 이상을 던지며(평균 213.3이닝) 3점대 초반 이하의 평균자책점(평균 2.92)으로 13승 이상(평균16.6승)을 올렸고 100개 이상의 삼진(평균 155.2개)을 잡아냈다. 그리고 팀은 두 번의 우승과 한 번의 준우승을 했다.
에이스가 갖추어야 할 모든 것퍼펙트게임을 할 수 있는 투수보다는 연패를 끊어줄 수 있는 투수가 에이스이며, 강점이 많은 투수보다는 약점이 가장 적은 투수가 에이스다. 그래서 아직 16승 투수 김광현보다는 12승 투수 손민한에게 어울리는 이름이 에이스이기도 한 것이다.
정민태는 강점이 많은 투수였다. 그러나 그보다 약점이 적은 투수였고, 꼭 이겨야 할 경기를 이기는 투수였으며, 최악의 상황에서도 어느 만큼 버텨주는 투수였다. 그런 점에서, 선동열과 최동원보다 더 뛰어났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한 때나마 그들 못지않은 에이스였다고는 충분히 할 만한 투수였다.
해태를 제외하고 '왕조'라 불릴 수 있는 유일한 팀이 현대였다고는 하지만, 네 차례 현대의 우승은 매번 힘겨웠다. 해태나 LG가 그랬듯 4연승으로 시리즈를 휩쓴 적은 한 번도 없었고, 한 번(1998년)은 6차전, 두 번(2000년, 2003년)은 7차전, 또 한 번(2004)은 무려 9차전까지 가서야 우승을 확정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느 팀보다도 에이스의 역할이 컸던 팀이었고, 그 에이스를 논하면서 정민태를 빼놓을 수는 없다.
1·4차전에 각각 8이닝씩을 무실점과 1실점으로 막은 데 이어 6차전 마무리로 인천야구 첫 우승의 순간을 만들어낸 1998년, 그리고 1·4차전에 이어 완봉으로 버틴 7차전까지 선발 3승을 따낸 2003년. 네 번에 걸친 팀의 우승 중 두 번을 마운드에서 맞이하고 MVP시상대까지 올라선 정민태는 어떤 이유로도 깎아내려질 수 없는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사이 대한민국 에이스였다.
그러나 2001년부터 2년간 일본무대에서 고작 1승만을 기록한 채 돌아온 2003년은, 그에게 차라리 없었으면 나았을지도 모를 '마지막 절정기'가 되고 말았다. 그 해 그는 곧바로 17승 2패라는 훌륭한 성적으로 다승왕과 골든글러브를 차지하며 팀을 한국시리즈로 이끌었고, 다시 한국시리즈 우승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고, 족쇄가 되었다. 그 해 시작된 허리부상이 악화되며 이듬해 7승, 그리고 그 이후 4시즌 동안 무승10패의 악몽이 시작되었고, 그 해 공로로 7억천만원까지 치솟았다가 해마다 깎이고 깎여도 리그 선두권으로 이름을 올려놓던 연봉은 그대로 '먹튀'라는 이름의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돌아보면, "일본에서는 2년간 1승에 불과했던 투수가 복귀하자마자 17승을 올리며 한국야구의 위상을 추락시켰다"는 감정적인 비난마저 감수해야 했던 것을 생각하면 2003년의 영광 한편에서 잉태된 칼끝은 너무 날카로웠다.
에이스의 퇴장
▲현대왕조의 주역, 에이스 정민태우승의 순간을 만들어낸 1998년, 그리고 1,4차전에 이어 완봉으로 버틴 7차전까지 선발 3승을 따낸 2003년. 네 번에 걸친 팀의 우승 중 두 번을 마운드에서 맞이하고 MVP시상대까지 올라선 정민태는 어떤 이유로도 깎아내려질 수 없는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사이 대한민국 에이스였다.
현대 유니콘스
결국, 정민태는 은퇴했다. 그의 통산 승수는 2004년에 도달한 124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고, 통산평균자책점은 조금 올라갔으며, 그의 명성은 모질게 망가졌다. 그와 영욕을 함께했던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었고, 히어로즈 창단 초기의 몸살을 제일 앞에서 앓으며 방출과 숨바꼭질, 인천팀 복귀설에 이은 기아 전격 입단과 또다시 전격적 은퇴선언과 코치로서 히어로즈 복귀까지.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자들을 피해다니고, 눈물을 보이고, 팬들 앞에 사죄하며 이해를 구하고, 비난받고 외면당하는 과정을 되밟았다.
어쩌면 말 그대로 부족한 자기관리, 부족한 신의, 넘치는 욕심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화려했던 선수경력에 어울리지 않게 거칠고 미숙했던 언론을 상대하는 요령과 지나치게 솔직하고 감상적이었던 성격 때문이었다고 보아줄 수도 있다. 어느 쪽에 방점을 찍든, 이제 또 다가오고 지나갈 세월 속에 새록새록 곱씹어질 그의 업보다.
한 명의 에이스를 떠나보낼 때마다 참 숙연해진다. 그가 던져온 영광의 순간마다 가로질러 내 삶에도 새겨진 기쁨과 슬픔과 환희와 절망, 그것이 또 한 페이지 뒤로 훌쩍 넘겨져 추억의 공간으로 던져짐을 실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민태를 보내면서 느껴지는 것은 조금 더 뒷맛이 쓰다. 영광의 세월에 대한 기억에 앞서, 어떻게든 마침표를 찍어보려 했던 다섯 해의 세월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이고, 그런 발버둥 끝에 결국 마침표 없는 답안지를 세월 앞에 던져야 했던 그의 선수생활이 아쉬워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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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