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만 입고 달리다고무엉덩이가 붙은 트렁크 차림의 이만수가 나타났고, 그의 뒤로 22명의 팬과 구단 직원들이 그와 함께 천천히 그라운드를 돌았다. 그의 '팬티 세리머니'는 80년대 이후 TV 9시뉴스 첫 소식으로 전해진 첫 번째 야구뉴스가 되었고, 2007년 들어 폭발한 갑작스런 야구붐의 기폭제가 되었다.
SK 와이번스
선수 은퇴 후 미국에서 일하다가 SK와이번스의 수석코치가 되어 국내로 복귀한 2007년 봄, '팬티 세리머니'라는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던 것도 그런 이만수였기 때문이다.
한창 파리 날리던 관중석을 보며 한숨을 쉬던 그가 기자들 앞에서 "앞으로 열 번의 홈경기 안에 만원이 된다면, 팬티만 입고 야구장을 돌겠다"는 도가 넘는 농담을 하고 만 것이다. 볼거리에 목말랐던 기자들이 곧바로 이만수의 농담을 공약으로 만들어 전했고, '스포테인먼트'의 가시적 사례를 찾던 구단이 재빠르게 반응하면서 사건이 됐다.
2007년 5월 21일. 그날을 D데이로 설정한 구단은 인천시청과 시내 기업들을 돌며 표를 팔았고, 시민들도 '이만수 팬티 보는 날'이라는 연통을 문자메시지로 돌리며 길을 나섰다. 그리고 '좋은 뜻'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영웅을 팬티 질주라는 희극으로까지 몰아넣은 현실이 씁쓸했던 팬들은, 함께 달리기로 결심했다. 그날, 4회 초가 끝날 즈음 전광판에 '만원사례'라는 글자가 새겨졌고, 3만 관중이 일제히 함성을 질렀다.
그리고 5회를 마친 다음, 한국야구의 황금기였던 1980년대를 상징하는 정수라의 노래 '난 너에게(영화 <공포의 외인구단> 주제가)'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고무엉덩이가 붙은 트렁크 차림의 이만수가 나타났고, 그의 뒤로 22명의 팬과 구단 직원들이 그와 함께 천천히 그라운드를 돌았다. 그의 '팬티 세리머니'는 1980년대 이후 TV 9시뉴스 첫 소식으로 전해진 첫 번째 야구뉴스가 되었고, 2007년 들어 폭발한 갑작스런 야구 붐의 기폭제가 되었다.
"솔직히 쪽팔렸지요. 사실, 만원이 안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우와, 이 나이 먹고 벌거벗고 운동장을 어떻게 도나…, 죽었다 싶었어요."'헐크'라는 별명에 어울리지 않게 작달막한 키, 순한 눈매, 동네 과일가게 아줌마 같은 둥글둥글한 말씨. SK와이번스가 첫 우승의 감격을 아직 삭이지 못하고 있던 2007년 겨울, 구단의 어느 회식자리에서 그를 만났을 때 제일 먼저 그날의 기분을 물었었다.
민경삼 운영본부장이 폭탄주를 한 잔씩 말아서 돌리는 걸 보며 나긋한 대구 사투리로 "하이고, 몸에도 안 좋은 걸 왜 그렇게 섞어서까지 마셔요"하며 혼자 따로 시킨 와인을 홀짝거리다가 그가 답했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술과 담배와 커피를 멀리하고, 운동을 거르지 않는 성실한 체육인이다.
"그래도, 프로잖아요. 프로는 팬들 사랑을 먹고 사는 거고. 처음 한국 돌아와서 텅 빈 관중석을 보면서 너무 허전해서, 정말 저 관중석을 채울 수만 있다면 내가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팬서비스 한다고 벌금 낸 적도 있어요"그러나 그가 지나온 세월, 한국 사회는 무작정 근엄하고 무겁기를 강요해왔고, 조금이라도 엇나가는 것은 용납하지 못했다. 알몸도 아닌, 정확히 말하면 반바지 하나 입고 달린 세리머니가 따져보면 대단한 파격이랄 수도 없는 21세기에 우리가 살지만, 무겁고 획일적인 시대에 길러진 50대 초입의 세대가 감행할 수 있는 행동은 분명 아니었다.
"맞아요. 옛날에는 안타치고 환호하는 팬들에게 손 한번 흔들어주는 것도 눈치 보일 때가 많았지요. 저도 홈런 치고 관중석을 향해 손 흔들었다가 경기 후에 선배들한테 끌려가서 혼난 적도 많아요. '네가 무슨 연예인이냐' 하면서. 이번에 제가 팬티 입고 뛰었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지만, 옛날에는 과하게 팬서비스 한다고 감독님한테 벌금을 문 적도 있어요."'팬서비스'를 했다는 죄목으로 벌금을 물린 그 감독이 누구였느냐고 묻자, 조심스런 눈짓으로 맞은편을 가리킨다. 그쪽에는 신영철 사장의 잔을 받으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김성근 감독이 앉아 있었다.
그렇다. 요즘에는 팬들의 사진촬영이나 사인 요구를 거절하는 선수들에게 내규를 통해 벌금을 물리기까지 하는 김성근 감독이지만, 십여 년 전만 해도 그 역시 팬들에게 웃음이나 흘리는 얼빠진 녀석들은 혼을 내야 한다고 믿는 수많은 야구 지도자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그는 야인 시절과 지바 롯데 코치시절을 거치며 팬의 처지에서 야구를 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 시절, 이만수는 감독 눈 피해 선배들 꾸중 들어가며 관중석으로 손 흔들던 몇 안 되는 선수였고, 그렇게 야구를 즐기고 팬들에게 봉사하는 프로였다.
'야구의 추억' 마지막 회, 이만수 택한 이유
▲이만수의 귀국2006년 10월, 이만수가 SK와이번스 수석코치로서 한국무대에 복귀했고, 10년을 한결같이 기다려온 팬들이 그를 마중나왔다.
SK 와이번스
물론 팬들에게 사랑받는다고 해서 구단의 사랑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팬이 아닌 다른 것에 관심을 집중해왔던 그동안의 많은 야구단들에게, 팬의 지지를 받는 선수란 오히려 부담스런 존재인 경우가 많았다. 이만수 역시 40세까지 현역에서 뛰겠다는 소망을 채우지 못한 채 구단과 불화 속에 미국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혼자 힘으로 길을 개척했다.
그는 직접 테스트를 받아가며 코치 자리를 얻었고, 성실함 하나로 따돌림을 극복하며 우승반지까지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팬들의 끊임없는 요구는 삼성 라이온즈로 하여금 이만수의 등번호 22번을 영구결번 시키도록 만들었고, 이만수는 2003년 7월 3일, 시카고 화이트삭스의 홈구장인 US 셀룰러필드 전광판에 뜬 '한국의 베이브루스, 헐크 만수 리 영구 결번'이라는 메시지에 환호하는 미국 팬들의 축하를 받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이만수와 그의 팬들이 서로 주고받은 사랑이 띄엄띄엄 결실을 만들어 그를 한국으로 불러들이는 징검다리가 되었고, 지금 그는 대구와 인천의 팬들로부터 어느 현역 스타 못지않은 지지를 받는 스타가 되어 있다.
야구를 잘하는 많은 선수들이 있었고, 야구를 사랑하는 몇몇 선수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다시 이만수라는 이름의 특별함을 느끼는 것은, 그가 팬에 대한 사랑과,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선수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만수는, 우리 사회가 '프로야구'라는 걸 시작할 무렵 이미 알았어야 하지만 아직까지도 정확히 깨우치지 못한 것, 즉 팬들의 사랑이 있어야 '프로'임을 알고 행동한 선구자였기 때문이다.
얄팍한 지식과 졸렬한 감성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만 삼 년 가까이 끌고 온 '야구의 추억' 연재를 마치면서, 마지막이 될 백 번째 글의 주인공으로 이만수를 택한 이유 또한 그것이다. 삼십 년 가까이 나이를 먹고 성장한 한국 프로야구가 팬들의 사랑이라는 정확한 지향점을 향해 굵어가기를, 그래서 2007년 5월 22일 대구에서 뿌려진 장미송이처럼 눈물 나게 아름다운 풍경이 늘 펼쳐지는 야구장이 되기를 바라는, 그런 소박한 야구팬의 마음에서 말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