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2번 타자장원진은 90년대 초반 삼성의 동봉철과 더불어 손꼽을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한 역대 최고의 2번 타자였다. 그는 최고의 선두타자와 최강의 클린업 사이의 불모지에서 왼쪽과 오른쪽 타석을 넘나들며 때로는 번트로, 때로는 기습적인 스윙으로 만들어낸 안타로, 또 때로는 노골적인 풀스윙으로 엮어내는 장타로 경기의 흐름을 쥐고 흔들며 자신만의 공간을 개척해냈다.
두산 베어스 팬북
정말 경기를 재미있게 만드는 것이 2번 타자다. 평범한 2번 타자가 경기 초반부터 어김없이 굴려대는 보내기번트는 경기의 흐름을 무뎌지게 만들지만(물론, 보내기번트를 성공시켜줄 거라는 신뢰를 주지 못하는 2번 타자라면 또 다른 의미에서의 박진감을 선사하기도 한다만), 안타생산능력과 투지를 겸비한 2번 타자가 들이미는 번트자세는 다음 순간에 대한 호기심에 날을 세우는 시한폭탄이다.
1999년부터 2000년대 초반의 몇 년간, 장원진은 90년대 초반 삼성의 동봉철과 더불어 손꼽을 수 있는 즐거움을 선사한 역대 최고의 2번 타자였다. 그는 최고의 선두타자와 최강의 클린업 사이의 불모지에서 왼쪽과 오른쪽 타석을 넘나들며 때로는 번트로, 때로는 기습적인 스윙으로 만들어낸 안타로, 또 때로는 노골적인 풀스윙으로 엮어내는 장타로 경기의 흐름을 쥐고 흔들며 자신만의 공간을 개척해냈다.
그는 주전 첫 해인 99년 11개의 희생번트를 대면서도 135개의 안타를 때려내며 3할 타율에 올라섰고, 특히 그의 선수인생 절정기였던 2000년에는 무려 170개의 안타를 때려내며 부문 타이틀을 따낸 것을 비롯해 94개의 득점과 59개의 타점, .323의 타율로 4년만에 팀의 한국시리즈행을 이끌기도 했다.
공포의 바가지안타그는 당대의 투수들이 가장 꺼려하는 타자였다. 동체시력과 배트스피드를 타고난 천재형은 아니었지만, 우직한 단련으로 단단해진 손목힘과 끈질긴 승부근성으로 달려드는 끈끈한 타격은 엄청나게 많은 파울을 양산했고, 다시 짜증이 나다 못해 기가 막힐 정도로 많은 '바가지 안타'(빗맞은 타구가 내야수와 외야수 사이의 공간에 떨어지면서 만들어지는 행운의 안타)를 만들어냈다. '바가지 안타'란 물론 운의 힘을 많이 받은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 운은 강한 손목힘과 좋은 타격후동작(follow through), 그리고 강한 집중력과 근성을 가진 타자에게 자주 찾아가는 법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날다람쥐 같은 정수근을 주자로 내보낸 투수는 다음 타자인 장원진에게 감히 변화구를 던지지 못했고, 호랑이 같은 '우동수' 앞에 주자를 쌓아둘 수도 없어 그냥 내보내지도 못했다. 어쨌든 승부를 보자고 진땀 닦아내며 던지는 결정구는 모조리 파울로 흘려보내다가, 조금만 몰렸다 싶은 순간 약 올리듯 좌익수와 3루수, 유격수 사이에 절묘하게 떨어져 탁구공처럼 휘어 달아나는 안타를 '깎아내면' 이미 선행주자는 3루에 들어가고, 타석준비석에는 우즈, 김동주, 심정수가 저승사자처럼 늘어서 한껏 길게 뽑아쥔 방망이를 붕붕 휘두르며 또 한 경기의 흐름을 끌어당기곤 했던 것이다.
반달곰 유니폼이 잘 어울리는 선수2001년에 통산 세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 고지에 선 이후 베어스는 몇 해 동안 주춤거리기도 했다. 우즈는 전같지 못했던 2002년 시즌을 마친 뒤 일본으로 건너갔고, 심정수는 2001년을 함께 하지도 못한 채 선수협파동 와중에 심재학과 유니폼을 바꿔 입어야 했다. 시름시름하던 유격수 김민호가 본격적으로 주저앉으며 내야에 구멍이 뚫리기도 했다.
희망도 있었지만 위기감과 상실감이 더 컸던 그 무렵, 장원진은 입단동기 안경현과 더불어 베어스의 기둥이었다. 물론 정수근과 김동주가 건재했고 홍성흔이 분발했지만, 성실한 훈련을 바탕으로 한 기복 없는 활약과 산전수전 다 겪은 내공으로 내뿜는 파이팅의 두 고참이 없었다면, 최소한 '뚝심의 팀' 베어스라는 공식은 이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마흔을 바라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그도 한 풀 꺾이기 시작했다. 해마다 기본으로 2할8푼 이상을 치던 방망이가 2006년에는 2할5푼대로 떨어졌고, 2007년에는 그나마 대타로만 23경기에 나서 1할대를 넘기지 못하는 성적을 올리고 말았다. 그리고 우리 나이로 마흔이 된 올해는, 비록 선수명단에 이름을 올려두긴 했지만 단 한 경기에도 나서지 않은 채 코치수업을 받고 있다. 그러나 지난 해 플레이오프 때는 대타로 나선 단 두 번의 기회에서 두 개의 안타로 두 개의 타점을 기록하며 여전히 날카로운 면모를 과시했고, '벤치의 파이팅'이 가장 큰 역할을 해온 베어스에서 그는 경기에 나서든 아니든 여전히 핵심전력이다.
둥글둥글한 체형에 사람 좋은 얼굴, 특히 반달곰 유니폼이 꼭 어울리는 타격자세. 그리고 무엇보다도 '꾸준함과 뚝심의 팀' 베어스를 그대로 상징하는 듯 가장 꾸준하고 뚝심있게 팀을 떠받친 2번 타자. '장샘'이라 불리는 사나이. '신'이나 '포' 같은 거창하다 못해 호들갑스런 글자 대신 '샘'이라는 정감어린 글자가 별명으로 붙은 것부터가 참 '베어스적인' 인물이 바로 장원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