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안타양준혁은 13시즌이나 3할 이상을 쳤고, 그 엉성한 걸음으로 네 번이나 20-20을 했으며, 역사상 가장 많은 안타를 쳤고, 또 역사상 가장 많은 홈런을 때리게 될 것이다.
삼성 라이온즈
1991년 신인지명전에서, 열 번의 시즌을 치르는 동안 무려 다섯 번이나 홈런왕을, 그리고 각각 네 번이나 타격왕과 타점왕을 배출하고도 (상대적으로) 빈약한 투수력 때문에 '최강팀'의 영예를 얻지 못했던 삼성 라이온즈는 대학무대 최고의 거포 양준혁 대신 유망주에 불과했던 좌완 강속구투수 김태한을 1차로 지명하고 말았다.
김태한과 고등학생 시절부터 단짝 친구이기도 했던 '대구 사나이' 양준혁은 "삼성이 아닌 어느 구단도 가지 않겠다"고 공언했지만 2차 우선지명권을 가지고 있던 쌍방울 레이더스가 기다렸다는 듯 지명권을 행사했고, 양준혁은 억대 계약금도 필요 없다는 듯 상무 입대로 맞섰다.
대구 팬들의 환호와 감동이,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는 가소로운 의욕마저 무참히 꺾여버린 신생팀 쌍방울 팬들의 허탈감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1992년을 상무에서 보내고 우여곡절 끝에 1993년부터 방위병으로 복무전환처분을 받은 양준혁은 한 해 늦게 삼성의 1차 지명을 받고 프로무대에 뛰어들었다.
위수지역을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경기 출장은 허용되었던 그 시절, 방위병 양준혁은 대구 홈에서 열리는 야간경기에만 나서면서도 시즌 초반부터 곧장 타격 전 부문 선두권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비율'로 따지는 타율 부문에서의 선두 질주는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다른 경쟁자들의 절반 밖에 기회를 얻지 못하면서도 '개수'로 따지는 홈런과 타점 부문에서마저 선두권을 달린다는 것은 그저 '충격'일 뿐이었다. 그 무렵, 그는 거의 출전하는 경기마다 홈런과 타점을 기록했고, 시즌 전 코칭스태프 교체와 더불어 신경식, 조범현, 허규옥, 장태수 등 베테랑들이 대거 이탈하며 불안감을 지울 수 없었던 팀을 일약 선두권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타격 폼. 애초에 오른발을 멀찍이 1루 쪽에 놓은 채 활짝 열어둔 '오픈스탠스'의 타격준비자세 자체도 생소했지만, 공을 때려낸 순간 마치 화들짝 놀라기라도 한 듯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는 그 후속동작을 나의 눈과 머리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이 타격자세의 일부인지, 아니면 순식간에 끝내버린 타격자세에 이어진 세리머니 동작인지조차 나는 판단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의 동작은 야구선수보다는 투해머선수의 것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맥락'을 깨고 있었지만, 반면 그의 방망이를 맞아나간 공은 매번 '세리머니'를 해도 좋을 만큼 멋진 궤적으로 그라운드를 쪼개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부족한 훈련량 탓이었는지, 오히려 방위병 소집이 해제된 후반기에는 페이스가 잦아들며 홈런과 타점 부문 타이틀을 팀 선배 김성래에게 넘긴 채 2위로 물러앉았고, 그저 타격왕과 신인왕 타이틀을(바로, 이종범을 59대 8로 물리치고)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신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완숙한 기량'이라는 이유로 신인왕 투표에서마저 제외되었던 장효조의 1983년(그는 그 해 .369의 타율로 타격왕이 된 것을 비롯, 리그에서 가장 높은 장타율과 출루율을 기록했다)을 제외한다면 그때까지의 프로야구사에서 가장 압도적으로 리그를 지배한 신인은 바로 양준혁이었다.
[괴물의 진화] 9시즌동안 3할 대 타율에 20개 이상의 홈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