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기 홈런2002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한국시리즈 첫 우승을 결정짓는 끝내기 홈런을 날린 마해영
삼성 라이온즈
대졸에 상무까지 경유해서 들어온 프로 10년차로 이미 30대 중반에 들어서던 거포. 게다가 전년도 3억8천에 달했던 만만치 않은 몸값. 그런 그에게 보상금 포함 40억 이상의 돈을 배팅할 구단이 없으리라는 나름의 계산이 삼성에게 있었다. 그러나 그 해는 창단 이후 3년 연속 중상위권에 머물며 더 높은 곳에 대한 욕심을 품기 시작한 기아와 3년 연속 꼴찌의 수모를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롯데가 삼성이 독주하던 FA시장의 새로운 큰손으로 뛰어들었던 그 해였고, 그 와중에 정수근과 이상목, 진필중, 박종호 등이 애초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조건으로 유니폼을 갈아입었던 그 해였다.
마해영도 4년간 28억(보상금 포함 45억1천만원)의 조건을 제시한 기아로 이적했다. 삼성과의 협상시한이 끝나자마자 러브콜을 보내온 기아였고, 자존심을 살려준 데 '감동'하며 그 자리에서 곧장 사인을 해버린 마해영이었다. 그러나 기아와 마해영, 둘 사이의 아름다운 관계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마해영은 2004년 시즌 초부터 기아의 4번 타자로 기용되었지만 2할대 초반을 전전하는 선수생활 초유의 부진을 거듭했고, 6월 이후 제 페이스를 찾으며 시즌 타율을 2할8푼대로 맞추어 놓았지만 홈런은 프로생활 중 가장 적은 11개에 그치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5년에도 홈런 수는 별반 늘지 않은 12개였고, 그나마 타율마저 떨어지며 .266으로 시즌을 마치고 말았다. 이종범, 장성호로 묶인 중거리포의 화력을 극대화해 팀을 창단 첫 우승으로 이끌어주어야 할 '우승청부사'로서는 낙제점이었다.
"고향 팀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FA로 많은 돈을 받고 타향 팀으로 가니까 항상 눈치를 보게 되더라구요. 전에는 잠깐 부진해도 '그냥 그러다 말겠지' 했는데, 여기서는 '돈을 얼마를 주고 데려왔는데…' 하는 시선이 느껴지는 거죠. 차라리 말로 하고 야단을 치면 낫겠는데…."따지고 보면 '최악'이랄 것까지는 없는 성적이었지만, 그는 고스란히 '먹튀'라는 오명을 써야 했다. 2005년, 기아는 의욕적인 투자에도 창단 이후 처음으로 꼴찌를 경험해야 했고, 그 원인을 분석하는 이마다 '45억짜리 우승청부사의 배신'을 맨 앞줄에 넣어야 했기 때문이다.
삼성 시절 '국민타자' 이승엽에게조차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던 단단한 자존심. 거액의 FA계약자로서의 중압감과 그것을 부채질하는 미묘한 의심과 불만의 눈초리. 거기에 부산에서 광주로, 인문적인 의미로 보자면 이 나라의 이 끝에서 저 끝으로 보내져 겪어야 했던 타향살이의 생소함과 삼십 대 중반을 넘어선 거포가 피해갈 수 없었던 미묘한 순발력과 배트스피드의 변화까지. (덧붙이자면 지도자와의 갈등까지) 모든 악재들이 그 순간 뒤섞이며 그의 하향세를 이끌었다.
FA, 먹튀, 방출2006년에는 LG로 트레이드되었지만 충분한 경기 출장의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채 더 가파른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고, 2007년에는 2군에서조차 방치되다시피 하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작년 시즌 초, 김재박 감독이 경기마다 딱 두 타석씩만 기회를 주는 것 같던데, 그렇게 테스트 받는다는 느낌으로 임할 때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게 되지 않았습니까?"마해영은 떠올리기만 해도 몸이 굳어온다는 듯 앉은 자리에서 허리를 비틀며 난감한 웃음을 흘렸다.
"아, 정말 죽겠더라고요. 한 번 스윙을 할 때마다 자꾸 더그아웃 쪽의 눈치를 보게 되는데 …."11경기에서 허락받은 32번의 타석. 그가 때려낸 것은 한 개의 단타와 한 개의 홈런. 7푼 1리라는 낯설고도 소름끼치는 숫자가 그의 지난 2007년 시즌 성적이었다.
그리고 2008년, 더 이상 트레이드의 재료로서도 효용을 가질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LG는 그를 방출하는 친절을 베풀었고, 그는 다시 입단테스트를 거쳐 5천만원이라는 형식적인 연봉으로나마 고향팀에 복귀하는 행운을 누렸다.
"도대체 문제가 뭐였습니까?"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것이 가장 본질적인 질문인 것은, 그 역시 아직 풀어내지 못한 질문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글쎄요, 저도 답답하죠. 어디 부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체중이 불어난 것도 아니고. 훈련을 게을리 한 것도 아니고."실제로 그는 선수생활 시작한 이후로 특별히 심각한 부상을 당한 적도 없었고, 수술을 받은 적도 한 번도 없으며, 전성기와 별다를 것 없는 체중을 유지하고 있다. 그가 언제나 훈련량이 많은 편에 속하는 선수로 평가받아온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아무래도, 경기 감각이 떨어졌던 데서 찾아야 할까요?"변명 같아서, 먼저 뱉을 수 없는 말을 내가 먼저 물었다.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큰 것 같고…, 물론 FA계약이라는 선택을 제가 한 거니까 누굴 원망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한 번 감각이 꺾이고 나니까 다시 올라가기가 쉽지는 않아요."물론 그것이 그에게 찾아온 부진의 원인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 나이를 먹어가고 상대 투수들의 수준과 경향이 변화해가는 과정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그의 기술적, 심리적 문제들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이유들이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그리고 고약하게 얽혀들었는지는 정말 모를 일이다. 어쨌든 그는 단맛 쓴맛을 모두 보고서야 한 바퀴 돌아 친정팀으로 돌아왔다.
그저 약속과 의리를 지키고 싶었을 뿐
▲복귀신고2008년 4월 1일, 시즌 홈 개막전에서 마해영이 부산팬들에게 복귀를 신고하는 큰절을 올리고 있다.
롯데 자이언츠
2000년, 선수협 사건은 프로 야구사를 뒤흔들어놓았고, 마해영 개인도 엄청난 여파를 경험하게 된다. 당시 박용오 KBO총재가 '선수협이 만들어지면 프로야구를 그만두겠다'는 초강경발언을 쏟아내는 가운데 각 구단 사장들은 선수협에 가입한 선수들을 전원 방출하겠다는 결의를 했고, 결국 우여곡절 끝에 봉합되기는 했다.
하지만 심정수, 양준혁, 박충식, 강병규, 박재용 등 '미운털'이 박힌 주동자급 선수들이 트레이드되거나 옷을 벗었다. 롯데의 중심이자 상징이 되어가던 마해영이 졸지에 삼성으로 밀려난 것도 바로 그때였다.
"모르겠어요. 결국 그 사건이 저한테도 엄청난 영향을 미쳤는데…, 99년 시드니올림픽 예선 때 대표팀에 모인 선수들이 선수협을 만들자고 결의를 하고 약속을 했어요. 우리같이 자리 잡은 선수들이 아니라 신인이나 후보, 어렵게 생활하는 선수들을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저는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고, 의리를 지키고 싶어서 끝까지 했죠. 결국 그것 때문에 팀에서 나가게 됐지만… 지금도 후회는 없어요." 하지만 좋지도 않은 일로 헤어졌던 구단과의 재결합. 앙금이 남아있지는 않을까?
"솔직히, 외국인 감독이 부임하는 기회가 아니었다면, 제가 돌아올 수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감독님께 참 감사하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산팬들이 저를 이렇게 기억해주고 찾아주지 않았다면, 절대 불가능했을 일이니까, 정말 감사한 마음이구요."국내 최고 수준 거포의 화력을 포기하고 팬들의 지독한 비난마저 감수해가며 그를 내쳤던 구단이었다. 불과 5천만원의 '푼돈' 외에 필요한 비용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를 다시 받아들인 구단과 그 사이에는 말하기 복잡한 사연이 있을 수밖에 없다. 더 이상 깊이 캐묻는 것은, 그를 곤란하게 만드는 일일 수 있었다.
그 밖에도 감독에 대한 이야기, 후배들에 대한 이야기, 또 임수혁 선수에 대한 이야기들을 묻고 답했고, 너무 속 깊은 이야기는 나도 가슴 속에만 두기로 했다.
그날 경기에 출장할 일은 없다고 했지만, 그도 더그아웃을 지켜야 했다. 그러면서 파이팅도 외쳐주고, 안타를 친 후배에게는 축하를, 삼진을 먹고 들어온 후배에게는 위로를 해주는 것도 그의 역할이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물었다.
"사실, 예전에는 이렇게 인터뷰를 하거나, 팬들 만나서 사인 해주고, 사진 찍어주고 그런 것 좀 귀찮게 여겨지고 그러셨죠?""솔직히, 좀 그런 것도 있었죠. 특히 언론에 대해서는, 제가 그렇게 친절한 편이 아니었으니까 … 좀 거만하다, 뭐 그렇게 보는 분도 계셨고. 정말 경기 끝나고 피곤한데 몰려들어서 사인해달라 뭐해달라 그러시면 좀 귀찮은 생각이 있었죠. 그런데 요즘에는 정말 그런 분들 사랑 덕분에 내가 있구나 하는 걸 알게 되니까,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해드리죠."그리고 말끝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뭐, 성적이 좋아야 그게 정말 보답이 되고, 더 기쁘게 해드리는 건데…."선수의 꿈, 팬들의 바람
▲가르시아와 함께동계훈련중 마해영을 업은 채 훈련에 임하고 있는 가르시아롯데 자이언츠
시범경기 때, 친정 복귀를 신고하는 2루타를 터뜨렸던 날의 그가 떠올랐다. 이대호가 등장했을 때보다도 배는 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팬들 앞에서 3루쪽 라인을 뚫고 나가는 안타를 치고 2루 베이스에 안착한 그가,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수줍게 웃는 장면을 TV 카메라맨은 집요하게 클로즈업했고, 나는 그가 눈물이라도 흘리면 어쩌나 긴장하며 시려 오는 코끝을 꼭 집어 다스렸었다.
'정상에 있을 때 작별하고 싶은' 것이 선수들의 꿈이기도 하지만, '마지막 한 숨까지 하얗게 태우도록 곁에 두고 싶은' 것이 팬들의 욕심이기도 하다. 마해영의 선수로서의 꿈에는 이미 진한 얼룩이 배어버렸지만, 그가 다시 한 번 솟구쳐 정상에 오르지 못한다 해도 팬들은 그를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구경꾼과 달리, 팬이란 그런 것이다.
더 이상 하루건너 하루씩 홈런을 때려내지 못한다고 해도, 아니 결정적인 역전 찬스에서 병살타를 때리고도 1루까지 포기하지 않고 달리는 모습만 보여준다면 원망하지 않는 팬들과, 대여섯 점쯤 앞서거나 뒤진 채 맞은 8회나 9회, 승부가 이미 결정되고 나서야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며 찾아주는 팬들을 원망하지 않는 선수. 그들이 함께 지키는 야구장은 경쟁으로 살고 죽는 사회, 그 안에서도 가장 치열하고 극적인 경쟁이 벌어지는 야구장이 가지는 역설적인 멋과 낭만의 증거다.
그리고, 내가 야구를 사랑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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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 관한 여러가지 글을 쓰고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했던 '맛있는 추억'을 책으로 엮은 <맛있는 추억>(자인)을 비롯해서 청소년용 전기인 <장기려, 우리 곁에 살다 간 성자>, 80,90년대 프로야구 스타들의 이야기 <야구의 추억>등의 책을 펴냈다.
단맛 쓴맛 보고, 한 바퀴 돌아 친정팀 온 마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