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사를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 영화 두 편이 상영 중입니다. <국제시장>과 <강남 1970>입니다. 두 영화가 주요 시대 배경으로 삼는 시점은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인 1970년대입니다. 두 영화는 동시대를 시·공간의 무대로 삼고 있지만, 질감과 관람 포인트는 많이 다릅니다.

<국제시장>은 1950년 6·25 당시 흥남철수부터 이산 가족 찾기까지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가족이라는 둥지를 지키기 위해 생사를 넘나들었던 아버지 세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척박한 분단과 독재의 땅에서 가족을 위해 희생해 온 아버지의 일대기를 통해 억세게 질긴 민초의 역사를 조명합니다.

<강남 1970>은 '욕망의 땅' 강남 개발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추악한 천민자본주의의 민낯을 까발립니다. 5·16 군사쿠데타 출신의 공화당 국회의원들이 대통령 선거 자금 마련을 위해 암투를 벌이는 모습을 통해, 어떻게 '강남불패 신화'와 부동산 투기왕국이 만들어졌는지를 조명합니다.

<강남 1970>은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비열한 거리>로 이어진 유하 감독의 거리 시리즈 완결판으로 불립니다. <강남 1970>은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도 전작들보다 밀도가 헐겁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저 그런 깡패영화로 취급받기도 합니다.

기자는 영화를 삐딱하게 보기 위해 주먹들의 피 칠갑 향연을 걷어냈습니다. 대신 영화의 배경이 되는 남서울개발계획을 통해 한국 천민자본주의가 어떻게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는지, 누가 <국제시장>에서 덕수와 같은 아버지들의 삶을 지배하며 숱한 가정을 풍비박산 냈는지 그리고 여전히 강남 노른자위 땅을 차지하며 한국사회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자들이 누구인지 들여다봤습니다.

박정희 정권 남서울개발계획 발표... '강남 신화'가 시작되다

 한국 천민자본주의의 민낯을 고발하는 영화 <강남 1970> 포스터.

한국 천민자본주의의 민낯을 고발하는 영화 <강남 1970> 포스터. ⓒ (주)모베라픽처스


먼저 남서울개발계획에 대해 간략히 살펴야 합니다. 남서울개발은 개발계획 발표 당시 서울시 기획관리관이었던 손정목 전 교수가 쓴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5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하 감독이 "그 당시 땅 얘기를 통해 돈의 가치가 어떤 도덕적 가치나 민주적 가치보다 우월한 세상, 뒤틀린 자본주의 세상에 대해 역으로 반성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 모티브로 삼았다"고 밝힌 바로 그 책입니다.

책에 따르면 강남 개발은 당시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 등이 주도한 '박정희 대선자금 프로젝트'에서 비롯됩니다. 이들은 1968년 착공된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계기로 영동지역의 400만 평을 구획정리사업지구로 지정합니다. 영동제1구획정리가 오늘날의 서초구고, 제2구획정리로 만들어진 게 강남구입니다. 지금 강남 신도시의 밑그림이 이때 그려진 것입니다. 이후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공사, 영동 아파트지구 개발사업 등이 잇따라 발표됩니다.

구획정리로 땅을 강제로 빼앗는 가운데 본격적인 토지 매입이 시작됩니다. 공화당에서 나온 자금으로 서울시 관계자 등이 강남 일대의 허허벌판을 싼값에 사 모읍니다. 땅이 확보되자 서울시는 1970년 남서울개발계획을 발표합니다. 땅값이 몇 백 배로 뛰어오릅니다. 이른바 부동산 투기의 전설로 회자하는 '말죽거리(양재역) 신화'가 탄생한 것입니다. 이윽고 천문학적인 금액의 대선자금이 청와대에 상납 됩니다.

이 과정에서 시선을 끄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1971년 시행된 잠실지구 공유수면 매립공사처럼 땅 짚고 헤엄치는 공사를 정권으로부터 넘겨받은 건설사들이 떼돈을 버는 장면입니다. 건설사들은 그 돈의 일부를 정치자금으로 상납하고 다시 이권을 챙기는 과정을 되풀이하며 그룹이 되고, 재벌이 됩니다. 또 하나는 강북에 있던 경기고 등의 강남 이전입니다. 강남 개발 촉진책의 일환으로 진행된 명문고 이전은 이후 강남8학군으로 위세를 떨칩니다.

강남 개발을 통해 알 수 있듯이 1970년대 박정희 유신정권과 서울시, 건설사는 부동산 투기의 공범입니다. 또한 한국자본주의를 천민화(賤民化), 기생화시킨 주범입니다. 이들에게 '지갑은 곧 권력'입니다. '지갑'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도덕적 가치 따위는 싹부터 말살해버립니다. 그럴 때 지갑으로부터 권력이 나오니까요. 이들에 의해 촉발된 부동산 투기는 80~90년대를 휩쓴 후 대한민국을 '투기공화국'의 반석 위에 단단히 올려놓습니다.

"영동을 명동으로 만들 수 있어, 위에서 부채질만 잘해주면…."

 천애고아 종대가 주먹 생활을 청산하고 세탁소를 차린 길수와 딸 선혜 등과 보낸 행복한 한 때. “내 땅 한번 원 없이 만들어 보겠다”는 종대의 욕망은 모두를 산산조각 내 버린다.

천애고아 종대가 주먹 생활을 청산하고 세탁소를 차린 길수와 딸 선혜 등과 보낸 행복한 한 때. “내 땅 한번 원 없이 만들어 보겠다”는 종대의 욕망은 모두를 산산조각 내 버린다. ⓒ (주)모베라픽처스


영화의 중심엔 종대(이민호)와 용기(김래원)가 있습니다. 순전히 입에 풀칠하기 위해 정치깡패에 휩쓸린 두 사람은 얼떨결에 야당 전당대회장에 각목을 들고 뛰어들었다가 헤어집니다. 3년 뒤 재회한 두 사람은 동네 건달과 조폭으로 만나 남서울개발계획을 배경으로 돈과 권력을 향한 무한 질주에 몸을 내던집니다.

종대와 용기의 뒤에는 5·16 쿠데타 출신 공화당 국회의원 서태곤과 재정위원장 박승구가 있고, 또 그 뒤에는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남산의 김 부장이 버티고 있습니다. 김 부장은 대선자금을 모으기 위해 허허벌판의 지도 위에 매직으로 죽죽 선을 긋고는 '여기는 아파트 단지', '고속버스터미널' 등의 개발계획을 제시하며 땅을 사들일 것을 지시합니다.

종대는 강남 복부인 민 마담과 함께 강남의 땅을 사들입니다. 민 마담은 "영동을 명동으로 만들 수 있어, 위에서 부채질만 잘해주면..."을 입에 달고 삽니다. 용기는 명동파의 막내에서 넘버원에 오르기 위해 서슴없이 칼을 휘두릅니다. 이들 뒤에서 서태곤과 박승구는 충성경쟁을 벌이며 대선자금 모금을 현장에서 지휘합니다. 여기까지는 앞서 손 전 교수가 책에서 기록한 것처럼 1970년대 박정희 정권이 주도하던 정치권력과 폭력의 지형도를 날것 그대로 화면에 재현합니다.

이후 영화는 돈과 땅과 폭력이 피 칠갑이 되어 저잣거리에서 나뒹구는 끔찍한 광경을 쉼 없이 펼쳐 놓습니다. 그와 함께 1970년대 한국사회 풍속의 단면도 재현합니다. 대표적인 게 박정희를 위시한 5·16 쿠데타 세력의 유흥문화입니다. 김 부장과 국회의원이 참석한 룸살롱에서 민 마담은 일본 엔카 '블루 나이트 요코하마'를 일본어로 부르고, 이들은 아련한 향수에 젖습니다. 엔카가 70년대 서울 밤거리를 넘실거린 데는 5·16 쿠데타 세력의 취향이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조소와 풍자는 여기까지입니다. 전반부에도 종대와 용기가 부동산 투기에 뛰어들기까지 롱 테이크로 촬영하듯 지루한 서사가 이어지더니 후반부에서는 땅을 둘러싼 권력과 폭력의 탐욕을 칼부림으로만 처리해버립니다.

결국, 영화는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권력과 땅의 커넥션과 구조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꼬여버린 채, 장르의 법칙을 충실히 따르는 것으로 급선회합니다.

'자본의 성채'에서 '강남의 아들'로 화려하게 변신

 공화당 서태곤 의원이 권력투쟁에서 박승구를 제압한 후 민마담과 춤을 추고 있다. 영화는 서테곤을 통해 ‘강남불패 신화’의 역사를 까발린다.

공화당 서태곤 의원이 권력투쟁에서 박승구를 제압한 후 민마담과 춤을 추고 있다. 영화는 서테곤을 통해 ‘강남불패 신화’의 역사를 까발린다. ⓒ (주)모베라픽처스


영화 속 군상들은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몇몇을 제외하곤 모두 산산조각이 납니다. <국제시장>의 덕수가 질긴 생명력으로 유신정권의 캐치프래이즈였던 '조국 근대화의 기수'를 온몸으로 체현했다면 조직의 중간보스를 하다 손을 끊은 길수(정진영)는 종대를 지키려다가 예상치 못한 결론을 맞이합니다.

이윽고 종대를 비롯해 용기, 길수의 딸 선혜 그리고 권력의 하수인들까지 철저하게 농락당한 후 용도 폐기됩니다. 그들에게는 '말죽거리의 신화'였으나 이들에게는 한편의 '말죽거리 잔혹사'였던 것입니다. 길수가 종대를 자신의 호적에 입적까지 하면서 지키려고 했던 가족은 덕수가 생이별을 한 여동생을 찾고 노년에 아들딸과 화목한 시간을 보내는 것과는 결을 달리한 것입니다.

권력 암투에서 승리한 서태곤은 축배를 들며 '강남의 아들'로 화려하게 변신합니다. 그는 한국사회 상위 10%가 전체 부동산의 절반 가까이 어떻게 소유하게 됐는지를 보여주는 산증인입니다. 또한 공화당으로부터 민정당-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옷을 갈아입으며 권력을 독점해 온 권력자입니다. 박정희가 만든 '강남불패의 신화'는 이렇게 유구한 역사를 계승하며 딸 박근혜에게 '승리의 역사'를 승계해 주었던 것입니다.

반면 저잣거리의 민초들은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할 신세로 전락합니다. 영화의 남서울개발계획은 폭력적인 도시계획의 전형으로 꼽힙니다. 1971년 유신정권이 판자촌 철거민 13만여 명을 광주(성남)로 강제 이주시키면서 발생한 이른바 국가 폭력의 대표적 사례로 꼽히는 '광주대단지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38년이 지난 2009년 1월 20일. 용산4지구 남일당 건물 4층에서 강제철거 중단과 주거생존권을 요구하며 농성하던 세입자들이 공권력에 의해 화마에 휩싸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용산참사로부터 다시 5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금 남서울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조성된 잠실에 롯데월드타워가 들어섰습니다. 비행기의 항로까지 바꿔가며 위용을 떨치는 롯데월드타워를 배경으로 영화에서 일장연설을 하는 이가 있습니다. 노구를 이끌고 총선에 출마한 서태곤입니다. 그는 하늘이 무색하게 치솟아 오른 롯데월드타워 등 '자본의 성채'를 향해 다음과 같이 일장연설을 터트립니다.

"여러분~ 강남에서 낳고 자란 강남의 아들, 강남을 정치일번지로 만들겠습니다~ … …"

강남 1970 남서울개발계획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 강남불패 신화 광주대단지사건 용산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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