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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 포스터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 포스터
ⓒ 커튼우드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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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가는 가을, 잊고 있던 가족의 사랑을 다시 일깨워주는 걸작 두 편이 최근에 개봉했습니다. 지난해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등을 수상한 멕시코의 거장 알레한드로 곤잘레츠 이냐리투가 연출한 <비우티풀>과 올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미국의 거장 테렌스 맬릭 감독의 <트리 오브 라이프>입니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부모와 자식,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모름지기, 자식은 하늘이 내린다고 했습니다. 생명은 부부의 사랑을 빌려 태어나지만, 자식은 하늘이 세상에 내리는 축복이라는 뜻입니다. 밖으로만 싸돌아다니는 서방을 하염없이 기다린 채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라며 장탄식을 늘어놓는 아낙의 푸념도 사실은 자식에 대한 간절함을 하늘에 빗댄 여인네의 욕망에 다름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와 자식을 잇는 '하늘의 끈'은 신자유주의의 안과 밖에서 다른 모습으로 영화 속에서 묘사됩니다. 바르셀로나의 빈민촌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악을 쓰던 아버지의 마지막 삶의 궤적을 쫓는 <비우티풀>이 그 밖이라면, 텍사스의 한 가족을 장대한 '생명의 역사'로 묘사하며 애증으로 뒤엉킨 아들의 시선으로 아버지를 이해해가는 <트리 오브 라이프>는  그 안에 놓여있습니다. 

그럼에도 두 영화는 맞닿습니다. 가족과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고,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고, 불편한 관계를 헤집는 사이 '하늘의 끈'을 회복시켜 놓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얼굴을 잊지 않고 또 당신을 이해하고 갈등을 완전히 해소시키며 '가족을 복원'해 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신자유주의의 안이든 밖이든 가족을 지키려는 아버지의 자리는 위협받고, 실패하고 있으며, 아버지의 그런 발버둥은 자식들에게 대물림되고 있으니까요.

바르셀로나 뒷골목 걷는 그의 얼굴에서 본 내 아버지

깊은 밤, 아빠의 거친 손과 딸의 작은 손이 화면을 가득 채우며 <비우티풀>은 시작합니다. 아빠가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진짜 다이아몬드"냐고 속삭이는 딸의 손에 아빠는 반지를 끼워준 뒤 "이젠 네 반지"라고 소곤거리며 손을 꼭 쥐어줍니다. 오프닝과 엔딩에서 반복되는 이 장면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훼손되며, 갈가리 찢어지고, 끝내 사멸해가는 아버지들의 비루한 삶을 함축하며, 영화의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경기도 안산시 원곡동의 '국경없는 마을'을 옮겨놓은 듯한 '엘 라바'에서 욱스발(하비에르 바르뎀)은 밀입국자들의 취업을 알선하는 인력 브로커로 일합니다. 짝퉁가방 공장을 운영하는 중국인 사장을 대신해 경찰에게 상납하고, 아프리카 이주민들이 가방을 팔 수 있도록 행상자리를 봐주고, 경찰의 일제단속에도 대비해야 합니다. 비록 그들의 임금에서 소개비를 챙기며 연명하지만 자식들에 대한 사랑은 지극정성입니다.

페인트칠은 벗겨지고 곰팡이는 구석구석 피어 있는 지저분한 집이지만 아빠가 차려주는 저녁밥은 늘 맛있었다.
 페인트칠은 벗겨지고 곰팡이는 구석구석 피어 있는 지저분한 집이지만 아빠가 차려주는 저녁밥은 늘 맛있었다.
ⓒ 필라멘트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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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만 단란한 저녁식사 자리. 매일 먹는 시리얼에 질린 막내아들이 햄버거와 튀김을 먹고 싶다고 투정부리자 아버지는 시리얼을 접시에 담으며 이거는 햄버거, 이거는 튀김이라며 주문을 외우고 식탁엔 이내 웃음꽃이 핍니다. 반면 인생은 즐기는 것 외에 남는 게 없다는 엄마는 알코올 중독에 조울증 환자입니다. 어린 남매와 남편은 관심 밖이며, 엄마의 자리는 늘 비어있습니다. 

그런 어느 날, 피오줌이 멈추지 않아 찾은 병원에서 의사는 그에게 전립선암이 전신으로 전이됐다고 선고합니다. 남은 시간은 고작 몇 개월. 걸핏하면 돈을 요구하는 아내가 아이들을 거둘 수 있길 기대해 보지만 그건 어려워만 보입니다. 누구에게도 자신의 병을 알리지 않은 욱스발의 지옥의 사투는 시작되고, 카메라는 냉정한 시선으로 그의 뒤를 쫓습니다. 경찰의 대대적인 일제단속으로 수입원이 끊기자 욱스발은 중국인 밀입국자들을 건설현장 노동자로 공급하는 일을 제안하면서 영화는 예상치 못한 파국으로 치닫습니다.

영화의 제목은 욱스발과 같은 처지의 아버지들이 놓인 현실을 상징합니다. 머리를 땋아주던 아빠에게 안나가 '비우-티-풀'을 어떻게 쓰냐고 묻고, 욱스발은 소리 나는 대로 쓰라고 알려줍니다. 그리고 얼마 뒤 딸이 그린 그림을 본 아빠의 얼굴에는 회한이 깊게 내려앉습니다. 그림 속엔 소리 나는 대로 'Biu-ti-ful'이라고 써있습니다. 남겨질 자식들을 위해 기저귀를 찬, 죽어가는 몸으로 그악스럽게 돈만 모아가던 그에게 틀린 철자를 고쳐줄 여유도, 시간도, 희망도 없었던 것입니다.

욱스발이 아버지의 관에서 꺼낸 유품을 딸과 함께 살펴보면서 가족의 역사를 조근조근 설명해 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욱스발이 아버지의 관에서 꺼낸 유품을 딸과 함께 살펴보면서 가족의 역사를 조근조근 설명해 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 필라멘트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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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들과 소통하는 능력을 지닌 욱스발을 통해 영화는 죽은 아버지와 떼죽음 당한 중국인들의 영혼을 등장시킵니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코 독재정권의 억압에 저항하다 멕시코로 도피하던 중 배 안에서 죽습니다. 중국인들의 죽음은 그가 자식들을 위해 저지른 작은 욕심이 화근이 됩니다. 비루한 한 남자의 삶과 죽음에서, 경계에 선 이들의 삶과 죽음으로 확장하면서 영화는 '경계인의 역사'를 증언합니다. 그가 여느 브로커와 달리 불법이주민들과 이웃처럼 도탑게 지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경계인의 동질성' 때문이었습니다.

그 동질성은 아버지에 대한 해갈되지 않는 그리움으로 나타납니다. 욱스발이 평생 간직한 반지는 그의 아버지가 도피하면서 어머니에게 준 반지입니다. 그때 욱스발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욱스발은 딸에게 반지를 끼워주며 숨을 거두고, 해체되는 가족의 잔해를 이어 붙이려 안간힘을 다하던 그의 소원은 삼대에 걸친 비극으로 저뭅니다. '내 아버지께 이 영화를 바칩니다'는 엔딩 자막이 오랫동안 저린 아픔으로 남는 이유는 욱스발과 그의 아버지에게서 우리네 아버지들의 얼굴이 겹쳐 보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두려운 존재였던 아버지가 집을 비우면 '해피'했다

한편 <트리 오브 라이프>는 생명의 시원을 알리는 듯 흔들리는 태고의 빛을 따라 흘러나오는 남자의 독백으로 시작합니다. 이윽고 뉴욕 맨해튼에서 잠을 깬 성공한 건축가 잭(숀 펜)이 아버지 오브라이언(브래드 피트)과 통화한 후 자신의 유년시절을 회상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20여 분에 걸쳐 우주의 빅뱅부터 포유류의 등장까지 생명의 탄생과 소멸의 역사를 현학적인 영상미로 펼쳐 놓습니다. 수많은 상징과 이미지를 차용한 보기 드문 장면들이지만 물질과 시간과 공간이 서로 연관된 우주의 변화과정이라고 이해하면 읽기가 까다롭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그러한 '생명의 역사'가 한 가족의 서사를 묘사하기 위한 장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영화는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아버지 오브라이언은 가부장적 권위의 화신입니다. 그에게 세상은 강한 자만이 생존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이며, 투쟁의 장입니다. 어떠한 의문이나 말대답도 용납 않는 그는 아들 삼형제를 엄격한 규율로 훈육하며 독일병정으로 키웁니다. 반면 자식이 세상의 빛을 보는 순간부터 따스하게 보듬어준 엄마는 경외의 대상인 아버지와의 갈등으로 방황하는 아들을 품어 안는, 생명과 사랑의 자애로운 현신입니다.

단란해 보이는 저녁식사 자리. 아버지는 밥 먹는 동안은 입 다물라는 명령을 어긴 둘째의 멱살을 잡아 내쫓고, 말리는 큰아들 잭은 먹방에 처박아둡니다. 내내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던 엄마는 겁에 질린 막내를 부둥켜안고 울먹이고, 아버지는 홀로 식사를 마칩니다. 문을 세게 닫은 잭에게 살살 닫는 연습을 50회 시키고, 세상은 싸움이라며 자신의 턱에 주먹을 날리는 훈련을 시키며, 할 수 없다는 말 대신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만하라고 지시합니다.

가부장적 권위의 화신인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엄마와 아들 삼형제. 아버지의 빈자리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얼까?
 가부장적 권위의 화신인 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엄마와 아들 삼형제. 아버지의 빈자리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무얼까?
ⓒ 커튼우드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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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에게 혼난 날이면 잭은 잠들기 전 침대 머리맡에 앉아 "왜 아빠는 상처를 줄까? 아빠에게 말대꾸하지 않도록…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할 수 있도록 해달라"며 기도합니다. 두려운 존재가 되어버린 아버지가 회사 일로 집을 비우면 '해피'합니다. 큰 도마뱀을 잡아 와 엄마를 기겁하게 만들고 온 집안을 쾅쾅거리며 뛰어다니는 등 해방구를 만들어버립니다. 하지만 잭이 여느 아이처럼 사춘기를 겪으면서 부자 간의 반목과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그 와중에 둘째가 사고로 죽습니다. 엄마의 독백처럼, 기타도 잘치고 그림도 잘 그리며 유순하기만 했던 아들을 앞세운 아버지는 참척(慘慽)의 슬픔에 젖습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던가요? 세월이 흘러도 오브라이언 부부의 가슴에 생긴 상처에는 딱지가 앉지 않고, 뼛속 깊이 스며드는 시림과 떨림에 아버지의 눈물이 바닥날 즈음, 잭은 아버지에게 한 걸음 다가섭니다.

마치 휴대폰 속에 남은 딸의 마지막 음성을 지우지 못하는 어느 아빠처럼, 잘생긴 아들의 얼짱 각도를 바탕화면에 남겨 놓은 어느 엄마처럼, 오브라이언은 아들의 체온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방을 치우지 못합니다. 다시금 영화가 '생명의 역사'로 공간과 시간을 이동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에 커다란 무덤처럼 남아 있는 아들의 방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신는 커다란 구두처럼 움쩍도 하지 않는 산 인줄로만 알았던 당신이 실업자가 되고 맙니다.

언제나 처음처럼 그곳에 있었던 아빠를 기억해주렴...

<비우티풀>의 아버지 욱스발에게는 오해와 갈등, 상처와 고통, 증오와 화해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에겐 더없이 사납고 흉폭한 신자유주의가 짊어지울 가난과 핍박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야 할 어린 딸과 아들을 향한 애끓는 단장(斷腸)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죽음을 앞두고서도 의연하고자 했던 아버지는 피오줌을 철철 흘리는 자신의 모습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 딸을 부둥켜안고 속삭입니다. 사진 한 장과 반지로만 남은 자신의 아버지처럼 기억하지 말아달라는 듯이.

"내 눈을 봐, 내 얼굴을 봐. 아빠를 기억하겠다고 약속해. 잊지 마, 안나. 아빨 잊지 마, 내 사랑 안나."

오브라이언이 첫 아들 잭의 작은 발을 어루만지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오브라이언이 첫 아들 잭의 작은 발을 어루만지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 커튼우드 픽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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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해체에 직면한 <비우티풀>에 비해 <트리 오브 라이프>는 마천루에 에워 쌓인 사무실에서 실업자가 된 아버지를 회상하는 잭을 통해 이해와 화해의 실타래를 풀기 시작합니다.

강한 사내만이 살아남는다고 했던 아버지가 엄마의 어깨에 기대 훌쩍이고 엄마는 등을 토닥여 줍니다. 생전처음 보는 아버지의 눈물. 멀찍이서 훔쳐봤지만 심상치 않다는 걸 압니다. 가족의 숨결과 체취가 구석구석 배어 있는 집도 비워야 합니다. 어깨가 축 처진 아빠가 처음으로 눈높이를 맞춘 채 울먹이며 말합니다. 품에 안긴 잭은 아빠도 약하고 사랑 받길 원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낍니다.

그리고 잭은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되면서 깨닫습니다. 살다보면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겪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모든 일들이 왜 일어났는지 알게 된다는 것을. 정작 자신은 실패한 엔지니어이면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식들을 사랑해 온 아버지의 속내를.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식, 이 셋이 모여 둥지를 틀고 새로운 가족의 서사를 만들어 나갈 때, 비로소 인생은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영화의 메인카피처럼 서로의 진심을 몰랐을 뿐 '사랑은 늘 그곳에 있었'음을.

그리고 영화 <트리 오브 라이프>는 포스터 한 장에 이 모든 것을 담아냅니다.

'세상에서 처음 만난 아버지와 아들. 손이 닿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은 작은 발. 터질 듯한 설렘에 엄지손가락을 조심스레 대어 보자 꿈틀거리는 작은 발. 믿을 수 없는 경이로움이 손끝에서, 두 눈에서, 가슴으로 퍼지며,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만났습니다.'

이제, 그대에게 전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가족이 켜켜이 쌓은 이별과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고 남아 있다면, 두 영화가 관객의 몫으로 남겨둔 말을 전합니다. 

"언제나 처음처럼 늘 그곳에서 당신을 기다려주는 사랑을 기억하라고."


태그:#비우티풀, #트리 오브 라이프, #아버지와 아들,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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