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상위 1%의 탐욕에 저항하는 99%다. 달러가 아닌 인간을! 부자에게 세금을! 의료보험 지원! 미국연방준비은행을 해체하라! 군산복합체를 해체하라! 전쟁을 끝내라!"

"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는 구호와 함께 세계 금융자본주의의 심장부인 월가에서 불붙은 시위가 미국을 넘어 세계 각지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월가의 부패와 탐욕 그리고 실업 등 사회적 불평등에 항의하며 촉발된 청년들의 시위가 세대와 계층, 지역을 넘어 경제정의와 정치개혁 등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타파하고 '착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세우려는 사회변혁운동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구호에서 주목되는 것 중의 하나는 "우리는 99%"입니다. 그 99%는 세계경제 위기를 낳고서도 부패와 탐욕을 자행하는 1%의 반대개념입니다. 그들은 99가지를 독점한 1%로 인해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등으로 전락한 이들입니다. 또 그들은 한줌도 안 되는 1%에 비해 한 사회를 구성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을 따라하지 못해 안달이 난 20대 80의 한국사회를 '점령'해 희망을 세울 99%입니다.
 
헌데 그들 중 일부가 낯익은 가면을 쓰고 월가에 등장했습니다. 한 편의 영화를 통해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저항의 상징이 된 '가이 포크스' 가면입니다. 신자유주의가 초래할 미래사회의 묵시록에 맞서 저항하고 궐기할 것을 촉구한 영화 <브이 포 벤데타>(2006년 개봉)의 바로 그 인물 'V'입니다.

 통금시간을 어긴 이비가 핑거맨 등 밀고자들에게 체포될 순간 나타난 V는 자신을 ‘공허하고 소멸해 버린 국민들의 원성을 대변한다’고 소개한다

통금시간을 어긴 이비가 핑거맨 등 밀고자들에게 체포될 순간 나타난 V는 자신을 ‘공허하고 소멸해 버린 국민들의 원성을 대변한다’고 소개한다 ⓒ 워너 브러더스사


영화는 "기억하라! 기억하라! 11월 5일을. 화약 음모 사건을. 그 사건은 결코 잊혀선 안 된다"는 나탈리 포트만의 내레이션으로 오프닝을 엽니다. 그 사건이란 1605년 11월 5일 영국의 제임스 1세 정부의 독재에 항거하기 위해 장작더미 아래 36배럴의 화약을 숨겨 의회 지하터널로 잠입했다가 체포되어 처형된 실존 인물 '가이 포크스'를 가리킵니다.

때는 제3차 세계대전을 발발한 미국이 몰락하고 영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2040년. 핑거맨으로 불리는 집단이 조지 오웰의 <1984년>을 방불케 할 정도로 완벽하게 영국사회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스피커와 TV 화면에서는 1%의 메시지가 쉼 없이 전파를 타고 있습니다. 저항에 대한 처벌은 혹독합니다. 정치적 반대자는 물론 동성애자 등 사회적 소수자와 무슬림, 흑인 등은 정신집중 수용소로 끌려가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니까요.

그런 어느 날, 방송국에서 일하는 이비(나탈리 포트만)가 통금시간이 지나 거리로 나섰다 핑거맨들에게 체포될 순간, '가이 포크스'의 형상을 본 뜬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사나이 V(휴고 위빙)가 나타나 그녀를 구합니다. 그가 가면을 쓴 이유는 억압과 통제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서 저항 정신을 되살리기 위한 것. 우여곡절 끝에 V는 이비의 도움을 받으며 런던 시가지에서 폭약과 불꽃을 터트리는 등 거사를 예고합니다. 

그와 함께 영화는 '하나 된 국민, 하나 된 조국'을 통치 이념으로 내건 독재자 아담 셔틀러(존 허트)를 통해 1%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셔틀러가 언론조작을 통해 국민들이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지 못하도록 어떻게 통제하고 권력을 유지하는지를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영화의 이 장면은 1%에 불과한 금융자본과 정치권력, 주류 언론들이 결탁해 침묵과 순종을 강요하는 작금의 신자유주의를 대비시키며 관객들로 하여금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성찰하는데 있어서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비유와 상징이 절묘합니다.

억압과 통제의 굴레를 끊고 해방 광장에 서다

셔틀러는 언론조작과 함께 감청과 도청 등 '전자 파놉티콘'을 24시간 작동시킵니다. 이 가운데 셔틀러가 장악한 BTN 방송국 직원의 고백은 인상적입니다.

"우리 일은 뉴스를 보도하는 거야. 꾸며내는 것은 정부가 하는 일이야."

언론조작으로 대중들의 정치적 무관심이 증폭될수록 권력은 1%에게 더욱 집중되고 이러한 권력의 집중과 신민형 정치문화가 필연적으로 독재와 전체주의를 부르는 과정을 에둘러 표현한 것입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에서 따온 아담 셔틀러가 영국의 상징인 성조지 십자가를 로센 십자로 바꾼 연단에서 ‘하나 된 국민, 하나 된 조국’에 대해 연설하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에서 따온 아담 셔틀러가 영국의 상징인 성조지 십자가를 로센 십자로 바꾼 연단에서 ‘하나 된 국민, 하나 된 조국’에 대해 연설하고 있다. ⓒ 워너 브러더스사


문제는 셔틀러가 언론을 장악하고 소통의 통로를 철저히 차단시키며 여론을 조작을 하는 것이 영화로 끝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일찍이 이명박 정부는 인터넷 실명제 등으로 인터넷 바다에 말뚝을 박고, 방송법을 개악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출연 금지시켰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보수언론들 역시 얼마 전까지 월가의 시위를 외면하거나 취사선택해 보도했습니다. 마치 셔틀러가 언론조작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와 기득권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원천봉쇄하듯이, 한국과 미국의 보수언론들은 1%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대중들의 의식을 조작해 온 것입니다.

이런 셔틀러에 대항하기 위한 V의 타격수단 역시 방송입니다. 셔틀러의 메시지를 생중계하고 있는 방송국에 침입해 방송을 중단시키고 자신의 메시지를 국민에게 중계합니다. 틈만 나면 국가위기를 들먹이고 혼란을 부추기며 실제로는 권력다지기에 혈안이 된 1%에 맞서 "국민의 힘으로 정부를 바꾸자"고 제안합니다. 또한 V는 이비에게 가상체험을 통해 무감각했던 분노를 일깨워주고, 그 와중에 이비는 삭발을 당하지만 희망의 씨앗을 싹틔워 갑니다.

이비의 삭발 대목은 단순히 여전사의 탄생을 뜻하지 않습니다. 억압과 통제에 길들여진 무기력한 대중들이 깨어 있는 시민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두려움 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1대 99의 사회를 뒤집어엎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그런 이비를 매개로 V는 개인적인 투쟁에서 시민들과의 연대로 저항을 확장하면서 V와 셔틀러의 치열한 공방전은 불꽃을 튀깁니다.

분노한 대중들이 행동에 나서는 장면으로 카메라가 이동하면서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습니다. 인기 프로그램의 진행자 고든이 셔틀러를 패러디하는 쇼를 만들었다 살해당하고, 언론조작은 더욱 노골적으로 횡행하고, 그에 비례해 셔틀러를 향한 V의 공세가 가열되면서 사람들은 침묵과 굴종을 털어내기 시작합니다. 이윽고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 하나, 둘 거리로 나서고 거대한 가면의 물결이 광장을 점령해 버립니다. 이비의 말처럼 그들은 "나이고 우리 모두"였던 것입니다.

영화의 이 장면은 월가를 '점령'한 다양한 인종과 계층과 연령의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내용이 풍부한 하나로 연대해 나가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10인 10색이었던 그들이 기획팀, 미디어팀, 음식팀, 의료팀 등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미국 전역에서 후원해 온 물과 피자 등을 사이좋게 나눠 먹으며 '탐욕에 찌든 월가를 점령하여 세상을 바꿔나가자'고 구호를 외치는 것이나 폭력과 공포, 세뇌와 회유에 짓눌렸던 영화 속 사람들이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광장에서 해방을 맞는 것이나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현실의 '가이 포크스'들이 펼쳐 놓는 저항은 영화 속 '가이 포크스'를 능가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처럼 뉴욕증권거래소 인근 주코티 공원에서 누구나 참여하고 발언할 수 있는 총회를 매일 열고 시위를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다양한 가치를 지닌 다양한 사람들의 시위답게 이들이 '점령'해 가는 활약상은 트위터, 페이스북, 유투브 등 다양한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중계되고 결집됩니다. 어디서 본 것 같다고요? 2008년 한국사회를 점령했던 '촛불시위'가 바다 건너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들불처럼 되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월가의 점령 서울의 점령으로 이어지다

"400여 년 전에 한 위대한 시민이 11월 5일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게끔 했습니다. 그가 희망한 건 공정과 정의, 그리고 자유의 심오한 의미를 세상에 일깨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세상을 올바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V가 방송국에서 행한 이 연설은 두 가지를 함의합니다. 셔틀러의 억압과 통제를 가져온 책임은 시민들에게도 있다는 것. 침묵과 굴종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참여'해야 한다는 것. V는 시민들의 참여를 격려하기 위해 수많은 '가이 포크스' 가면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월가의 저항이 일자리를 잃은 청년실업자 30여 명의 '참여'에서 촉발된 것처럼 가면을 쓴 런던 시민들이 한 명, 두 명 참여하면서 군인들의 총칼을 밀어내고 광장으로 집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V가 죽은 뒤 광장을 가득 매운 '가이 포크스'들이 V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폭죽이 터지면서 국회의사당이 파괴되는 장면을 보고 있다.

V가 죽은 뒤 광장을 가득 매운 '가이 포크스'들이 V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폭죽이 터지면서 국회의사당이 파괴되는 장면을 보고 있다. ⓒ 워너 브러더스사


1% 체제의 전복을 꿈꿨던 무수한 '가이 포크스'들이 광장을 점령한 채 폭죽이 터지는 가운데 국회의사당이 파괴됩니다. 그리고 이를 지켜보던 시민들은 동시에 가면을 벗습니다. 서로 다른 모습과 개성과 가치를 가진 이들이 99%의 민주주의를 달성한 후 자신의 민낯을 드러낸 채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민주적 연대를 통한 시민사회의 시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마치 1%의 부자들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99%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정치를 하자는 월가의 연대처럼.

광장을 점령한 이들 '가이 포크스'는 단순히 얼굴을 가리는 가면이 아닙니다. 통제와 억압의 굴레를 깨트리기 위한 시민의 희망과 목소리를 담아내는 저항의 상징입니다. 월가를 점령한 '가이 포크스'가 그렇듯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고 체념을 분노로 바꾸는 행동의 상징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두 전직 대통령이 우리에게 유언으로 남긴 '깨어 있는 시민의 행동하는 양심'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영화에서 V가 이비에게 하는 다음의 말은 영화의 메시지를 함축합니다. 억압과 통제로 국민들을 무릎 꿇리고 침묵과 굴종을 강요하는 셔틀러에 대한 이 비유는 공교롭게도 국민들로부터 두려움과 회피와 포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 4년에 대한 민심의 현주소를 대변하기도 합니다.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국민을 두려워해야 한다."

 99%의 힘으로 오는 15일 서울시청 광장을 점령할 것을 촉구하는 포스터.

99%의 힘으로 오는 15일 서울시청 광장을 점령할 것을 촉구하는 포스터. ⓒ 다음 아고라

그래서일까요? '99%는 강하다'는 구호를 내건 월가의 점령이 서울의 점령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99%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최후의 보루가 시민의 힘임을 선언하는 점령 계획이 하나둘 채근을 하고 있습니다.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해 희망버스를 함께 탔듯이 이제 부자증세, 보편적 복지 실현, 고액 등록금 철폐를 위해 연대의 깃발을 치켜세우려 합니다.

월가의 저항의 진원지는 세계 금융자본주의의 심장부인 월스트리트입니다. 이제 서울을 99% 저항의 진원지로 만들어야 합니다.

국민들 두려워하지 않는 이명박 정부와 안하무인의 금융자본에 맞서 오는 15일 여의도와 서울역과 명동 그리고 시청광장에서 수많은 '가이 포크스'들의 멋진 퍼포먼스를 기대하는 이유입니다.

브이 포 벤데타 월가를 점령하라 월가 시위 99%의 힘 가이 포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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