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기억들 하시는지요? 지난 2007년 제17대 대통령선거를 앞둔 신년벽두. 당시 한나라당 대권주자였던 박근혜 전 대표가 신년인사회에서 "영국 대처 총리가 영국병을 고쳤듯이 중병을 앓고 있는 대한민국을 고쳐 놓겠다"고 역설했습니다. 이어 그는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워 새로운 대한민국을 건설하기 위해 일부 귀족 노조의 불법 파업이나 시위 등에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날 신년인사회를 두고 일부 언론들은 '한국판 대처리즘'의 대두라며 호들갑을 떨었습니다. 노동운동 등엔 강력하게 대응하고 기업과 민간에겐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하겠다니 대처리즘의 부활인즉, 맞습니다. 박 전 대표에게 당시 한국은 좌파 포퓰리즘이 득세하고 무질서와 공권력의 무력화로 중병을 앓고 있던 1970년대 말의 영국처럼 보였을 테니까요.

그로부터 5년이 지났건만 한국사회는 아직도 중병을 앓고 있을까요? 다시 대권도전에 나선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어떻게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울까요? 그리고 그는 여전히 대처리즘을 멘토로 삼고 있을까요? 이러한 물음에 답을 던져주는 영화가 개봉했습니다. 식료품 가게 주인의 딸로 태어나 영국 보수당 최초의 여성당수를 거쳐 1979년부터 1990년까지 11년 동안 총리를 역임한 마가렛 대처의 생애를 다룬 <철의 여인>입니다.

'원조' 철의 여인과 '한국판' 철의 여인

"난 매일 매일 전쟁을 치르며 살았다"고 자신의 생애를 회상한 대처의 젊은 시절. 그는 영국을 바꾸기 위해 일찌감치 정치에 입문한다.
 "난 매일 매일 전쟁을 치르며 살았다"고 자신의 생애를 회상한 대처의 젊은 시절. 그는 영국을 바꾸기 위해 일찌감치 정치에 입문한다.
ⓒ 필라멘트픽쳐스

관련사진보기


슈퍼에서 우유를 사온 늙수그레한 여인이 값이 올랐다고 푸념을 늘어놓으며 남편과 샌드위치를 먹습니다. 문밖에선 보좌관이 경호를 제대로 못한 경찰에게 주의를 주고, 여인은 외출하려는 남편에게 슈트를 챙겨줍니다. 하지만 남편은 암으로 이미 죽었고, 치매와 신경쇠약을 앓는 여인은 남편의 환영을 향해 끝없이 중얼거립니다. 그날 밤, 여인은 자신의 자서전 '마가렛 대처'에 친필 사인을 하며 2차 대전이 한참이던 젊은 날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처녀 시절 대처의 관심사는 정치입니다. 또래 아가씨들처럼 꽃단장을 하고 끼리끼리 어울려 다니는 것엔 흥미가 없습니다.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옥스퍼드대에 입학하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합니다. 이처럼 대처가 일찌감치 정치에 눈을 뜨게 된  데는 아버지의 영향력이 컸습니다. 그랜덤의 시장이자 골수 보수주의자인 아버지는 대처의 정치적 사표로 그의 정치역정에 늘 동행합니다. 

영화는 시종일관 과거와 현재를 교차 편집하며 대처의 일대기를 조명합니다. 하지만 정치인 대처에 대한 입체적인 접근보다는 겉핥기에 머뭅니다. 대신 카메라는 대처의 영욕을 나열하는데 가운데 가족보다 권력을 좇았던 늙고 병든 여인의 회한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럼에도 영화의 행간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원조'로서 대처와 대처리즘을 일별하는 데는 그닥 어려움이 없습니다.

사실 영화의 덕목은 따로 있습니다. 최장기 재임기록을 남기며 옛 소련으로부터 '철의 여인'으로 불렸던 대처를 통해 박근혜 위원장을 교차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판 철의 여인'으로 불릴 정도로 강인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그는 대처와 많은 점에서 닮은꼴입니다. 간결하고 야무진 귀부인 이미지 때문은 아닙니다. 그가 대처리즘을 벤치마킹했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애국심이라는 대전제 위에 신뢰와 원칙의 정치를 표방하는 점에서 둘은 비슷합니다.

두 정치인의 닮은꼴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은 정치관입니다. 주지하다시피 대처는 긴축재정, 공공부문 민영화, 복지예산 삭감, 노동운동 강경진압, 미국일변도의 강경외교, 반공노선 등을 농축해 대처리즘을 태동시켰습니다. 박 위원장은 이 중에서 복지부분을 제외하고는 대처와 별다른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대처가 박 위원장의 멘토 중 한 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유입니다. 영화 속 대처가 과연 어떤 인물이었기에 강산이 두 번 바뀌었음에도 '철의 여인'은 여전히 위세를 떨치는 걸까요?

대처와 박근혜의 닮은꼴...대처를 보면 박근혜가 보인다

보수당 당수로 선출된 대처가 두 팔을 치켜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영국의 번영을 위해 우리는 결정하는데 있어서 단 1초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보수당 당수로 선출된 대처가 두 팔을 치켜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그는 "영국의 번영을 위해 우리는 결정하는데 있어서 단 1초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 필라멘트픽쳐스

관련사진보기


영화는 여장부 대처의 일면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24살의 나이로 하원의원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한 대처(메릴 스트립)에게 사업가 데니스(짐 브로드벤드)가 청혼을 합니다. 대처는 "남편 품에 안긴 채 부엌에서 설거지나 하면서 살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고, 둘은 결혼합니다. 그러나 영국을 바꾸기 위한 대처의 '애국심' 앞에 결혼생활은 걸림돌로 작용하고, 대처는 단호하게 남편과 아이들의 손을 뿌리칩니다.

이 대목은 박근혜 위원장이 "나는 나라와 결혼했다"는 결혼관과 접목됩니다. 그는 1974년 스물두 살에 퍼스트레이디가 되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살해될 때까지 다양한 국정경험을 쌓으며 뼛속까지 '애국심'을 각인시켜 갑니다. 당시 청와대 보좌진들의 보고를 듣고 수첩에 메모한 일화는 지금까지 전해집니다. 20대 처녀가 '수첩공주'로서 정치적 소양을 닦으며, 일찌감치 권력의지를 싹 틔웠는지도 모릅니다.

1959년 보수당 의원에 당선된 대처는 승승장구합니다. 1974년 교육부장관을 거쳐 1979년 영국 역사상 첫 여성총리이자 보수당 당수가 됩니다. 그에 앞서 영화는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합니다. 1975년 전국광산노조의 파업으로 기간산업이 마비되자 보수당 각료회의는 유화책을 취하지만 대처만이 강경론을 개진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자신의 발언에 콧방귀를 끼는 각료들을 훑어보다 "사람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아버지의 말을 떠올린 후 거사를 도모해 당수에 오른다는 것입니다.

대처에게 아버지가 그렇듯 박근혜에게도 '아버지의 DNA'는 각별합니다. 얼마 전 개관한 박정희기념관에서 박 위원장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겠다"고 천명했습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정수장학회에 대해서는 "나와 무관하다"며 한사코 선을 그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정수장학회는 그의 대선 행보를 틀어쥔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박정희의 딸'이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라 5·16 쿠데타라는 역사성과 함께 그 그림자가 현재진행형으로 관철되고 있음을 함의합니다.

보수당 당수로 발돋움하기 전 대처는 참모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이미지 메이킹 작업을 시작합니다. 요점은 특권층 귀부인 이미지를 탈색하는 것. 모자와 진주목걸이를 벗고, 목소리도 짧고 남성적인 저음으로 바꾸며 손동작 등을 가미합니다. 부단한 훈련과 연출 끝에 대처는 변신합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대처 총리'의 이미지는 이렇게 해서 탄생합니다.

'정치인 박근혜'의 이미지는 대처와 닮았습니다. 차이점이라면 대처가 치마만 입은 것에 비해 박근혜는 위기에 처해 있을 때마다 바지차림으로 돌파했다는 점입니다. 이 역시 이미지 관리의 일환일 뿐, 평소 박근혜의 복장은 대처처럼 고풍스러운 귀부인 차림새입니다. 즉, 영화는 정치인의 겉모습이나 이미지는 정치철학과 역사의식 등 정치인 본연의 정체성을 희석시키는 장치가 될 수도 있음을 대처의 변신을 통해 보여줍니다.

박근혜는 혹시 MB의 전철을 밟는 게 아닐까?
 
1984년에 일어난 광산노조의 총파업 당시 시위 군중들이 대처의 차를 에워싸고 "타도 메기"를 외치고 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단호하게 대처해 나간다.
 1984년에 일어난 광산노조의 총파업 당시 시위 군중들이 대처의 차를 에워싸고 "타도 메기"를 외치고 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단호하게 대처해 나간다.
ⓒ 필라멘트픽쳐스

관련사진보기


1979년 5월 4일. 대처는 영국 수상 관저인 다우닝가 10번지로 입성합니다. 그리고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를 인용한 그 유명한 수락 연설을 합니다. "불화가 있는 곳에 화목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달라고. 그리고 미국의 레이건과 손을 잡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집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갈등과 불신과 절망이 뒤엉킨 채 폭발합니다.

영화는 1984년에 일어난 광산노조의 총파업 당시의 화면을 통해 영국사회를 둘로 갈라놓은 분열의 씨앗과 세계 금융위기의 근원지인 대처리즘을 펼쳐놓습니다. 대처는 광산과 부두노동자 등을 구조조정하는 한편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공공부문 민영화를 밀어붙이며, 돈벌이가 안 되면 무조건 문을 닫는 등 신자유주의 화신으로서의 진면목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분노한 시위대는 총리 관저를 나온 대처의 차량을 에워싸고 "매기 타도, 당신은 어머니가 아니라 괴물"이라고 절규하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균열의 틈새는 안방에서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1934년 이래 가장 높은 실업률과 생산력 저하로 유례없는 불경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긴축재정을 놓고 대처와 각료들 간에 충돌합니다. '나와 내 방식은 언제나 옳다'며 긴축재정을 고집하는 대처의 독선과 아집은 측근들의 저항을 불러오고 그의 정치인생은 서서히 종언을 고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치매 진료를 받고 온 대처가 자신에 대한 찬반 뉴스를 보며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다"며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클로즈업합니다.

정치인의 이름 뒤에 이즘(ism)을 붙인 것은 대처가 최초입니다. 헌데, 박근혜 위원장의 미니 홈페이지 주소 뒷자리에도 '근혜이즘'을 뜻하는 'ghism'이 명기되어 있습니다. 과연 그의 정치철학과 노선이 무엇이기에 '이즘'을 붙였을까요? 박 위원장은 종종 보수주의를 기반으로 한 따뜻하고 유연한 '실용주의'를 자신의 정치이념이라고 말해왔습니다. 그의 실용주의는 박정희기념관에서도 언급했듯이 국민이 잘 먹고, 편안히 잘사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실용이 이번에는 MB와 닮은꼴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논란이 되고 있는 '남부권 신공항' 건설입니다. 애초 박 위원장이 총선 공약으로 꺼내든 배경은 흔들리는 '부산 민심'을 잡기 위한 것. 결과는 되레 '민심 악화'로 귀결됐습니다. 지난 대선 때 영남권에서 톡톡히 재미 본 MB를 복습하려다 제대로 외통수에 걸려든 셈입니다. 소 닭 보듯하며 유독 MB와의 차별화를 강조했음에도 그와 비슷한 전철을 밟는 이유는 무얼까요?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후 보수당 당 대표 선거가 실시되지만 대처는 "난 영국 수상"이라며 여유를 부리다 선거에서 패배한다. 대처가 의사당에 홀로 앉아 있다.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후 보수당 당 대표 선거가 실시되지만 대처는 "난 영국 수상"이라며 여유를 부리다 선거에서 패배한다. 대처가 의사당에 홀로 앉아 있다.
ⓒ 필라멘트픽쳐스

관련사진보기


잎새는 달라도 이들의 뿌리가 모두 같기 때문입니다. 대처리즘과 쌍둥이인 '레이거노믹스'는 국정지표로 작은 정부와 감세, 복지 축소를 내세웠습니다. 그리고 법질서와 국가 기강을 무너뜨리는 집단 이기주의에 대해 일체의 타협없이 단호하게 대처했습니다. 그 결과 대처리즘은 복지 해체로 인한 극심한 빈부격차로 영국사회를 골병들게 했고, 레이거노믹스는 미국을 세계금융위기의 발화점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사실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는 MB의 국정철학이자 박 위원장이 기자회견 등을 통해 누누이 강조해 온 지론이기도 합니다. 최근 박 위원장은 19대 총선 공약을 발표하면서 '한국형 복지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고전적 대처리즘에 비견하면 가히 혁명적이나 보편적 복지가 대세인 시대에 대처식 복지를 고수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수백조 원이 필요한 재원마련입니다. 그는 지출을 60% 줄이고 대신 세금을 40% 더 걷겠다고 밝혔습니다.

긴축재정론자인 박 위원장이 부자증세는 반대하면서 세금으로 복지 재원의 상당부분을 충당하겠다?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이는 경제민주화를 당 강령으로 채택하면서 결코 재벌때기리는 아니라고 했던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혹시 대처가 1989년 시행한 인두세(지역주민세)처럼 빈부차이 없이 동일한 액수로 세금을 부과하겠다는 것은 아니겠지요?

기본적으로 대처리즘의 복지관은 복지를 척결해야 할 의존문화로 보거나 수급대상자 위주의 제한적 복지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가 주창한 한국형 복지모델이 의구심을 사는 뿌리 깊은 이유입니다.

박정희기념관에서 그는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모두가 골고루 잘사는 나라를 위해 필요한 것은 '아버지의 정신'"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그는 총선과 대선의 삼두마차로 복지와 경제민주화와 일자리 창출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들 공약이 지난 대선에서 이 대통령이 '대선 표밭'을 겨냥해 제시했다 용도 폐기한 신공항이나 '747공약'의 재현이 아니기를 기대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요?


태그:#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박근혜, #대처리즘, #보편적 복지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