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략) 내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 아 민주노조 우리의 사랑 투쟁으로 이룬 사랑 / 단결투쟁 우리의 무기 / 너와 나 너와 나 철의 노동자"

이 노래를 기억하십니까? 1990년 세계노동절 101주년 기념으로 장산곶매에서 제작한 16㎜ 노동영화 <파업전야>의 주제가 '철의 노동자'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민주노조 사수를 위해 점거농성을 하던 노동자들이 회사가 고용한 깡패들로부터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고 끌려나옵니다. 지켜보던 동료들이 하나 둘, 쇠파이프와 멍키스패너를 손에 쥐고 함성을 외치며 작업장을 박차고 뛰쳐나갑니다. 그와 동시에 안치환이 부른 '철의 노동자'가 울려 퍼지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갑니다.

 판매서비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파업 투쟁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 <카트> 포스터.

판매서비스 비정규직 여성노동자의 파업 투쟁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 <카트> 포스터. ⓒ 명필름

<파업전야>는 1987년 6월 항쟁과 7~8월 노동자대투쟁의 여진 속에 실제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과 촬영해 만든 '불순한 영화'였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대학가를 중심으로 상영하는데도 노태우 정권은 최루탄과 곤봉을 휘둘러댔습니다. 당시 노동상담소에서 일하던 기자 역시 노동자들과 '닭장차'를 뚫고, 최루탄 가스를 흡입하며 봐야했습니다. 그로부터 어느덧 20여 년이 흘렀고 민주화가 됐으니, 노동현장은 달라졌을까요?

상상해 봅니다. <파업전야> 속 청년 노동자들이 가정을 꾸렸다면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최근 개봉한 <카트>는 그들의 아내이자 아이들의 엄마일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삶을 절절히 보여 줍니다. 특히 <카트>의 마지막 장면은 20여 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파업전야>의 마지막 장면과 겹치며, 2014년의 한국사회 역시 별반 달라진 게 없다고 고발합니다. 노동자의 삶은 예나 지금이나 '을'이었다고.

한국사회 임금노동자 1800여만 명. 그 중 비정규직 820여만 명. 이 가운데 여성 비정규직은 440여만 명. 4인 가족 중 1명은 비정규직 노동자인 셈입니다. 이들의 한 달 평균 임금은 113만원 수준으로 4명 중 1명은 최저임금 시급 5210원에도 못 미치는 임금을 받고 있습니다. <카트>는 440여만 명에 이르는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의 '절규'에 관한 논픽션입니다.

노조의 '노'자도 몰랐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가 파업에 나선 이유

 더 마트 본사가 계산원과 청소노동자들에 대해 일괄적으로 근로계약 해지를 통보하자 순례 등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는다.

더 마트 본사가 계산원과 청소노동자들에 대해 일괄적으로 근로계약 해지를 통보하자 순례 등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는다. ⓒ 명필름


<카트>의 얼개는 크게 두 축으로 전개됩니다. 대형마트 '더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근무하는 비정규직 선희(염정아)와 혜미(문정희), 고참 청소노동자 순례(김영애)를 한 축으로, 선희의 고등학생 아들 태영(도경수)과 88만원 세대 미진(천우희) 그리고 정규직 대리 동준(김강우)을 또 다른 한 축으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선희는 "회사가 살아야 우리가 산다!"는 구호를 철석같이 신봉합니다. 5년간 근무하면서 벌점 1점 없고, '까대기'(대타근무)를 지시해도 어긴 적이 없으니까요. 정규직 전환이 코앞이라고 믿고 있는 모범사원입니다. 반면 혜미는 결혼 전 정규직으로 근무하다 결혼 후 다니던 회사에서 부당해고를 당한 싱글맘입니다. 까대기는 물론 회사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른 적이 별로 없는 불량사원입니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를 경원시하며 근무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의 휴대폰으로 '근로계약 해지' 문자가 일시에 날아듭니다. 본사에서 계산원과 청소원을 외주화해 용역업체로 돌리려고 한 것입니다. 직접계약에 의해 채용한 비정규직을 용역업체를 통한 간접고용으로 전환하면 같은 비정규직이라도 임금은 더 싸게, 노동 강도는 더 세게, 정리해고는 손쉽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업과 대학 등에서 용역업체를 통한 간접고용을 선호하는 이유지요.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은 이들은 중간관리자에게 하소연을 하지만 겁박만 당합니다. 이때 혜미가 앞장섭니다. 그리고 주저하던 선희도 동참합니다. 마침내 노동조합의 '노'자도 잘 모르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듭니다. 얼결에 노조대표를 맡은 선희는 혜미, 순례와 함께 사측과의 협상에 나섭니다. 하지만 평소엔 '여사님'으로 부르던 회사는 이들을 '투명인간' 취급합니다. 사측의 행태에 분노한 선희 등은 이윽고 매장을 점거하고 파업투쟁에 돌입합니다.

지난여름 홈플러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근무복에 '10년을 일해도 월급 100만원, 이 기막힌 현실을 바꾸고 싶습니다'라고 써 붙이고 거리에 나섰습니다. 이들의 근무시간은 하루 4.5시간, 7시간, 7.5시간 등으로 쪼개져 있습니다. 주 40시간 근무를 초과하면 시급의 50%를, 하루 8시간 이상근무하면 휴게시간 등을 지급해야하기 때문입니다. 홈플러스만이 아니라 이마트 등 대형마트 대부분이 이런 '쪼개기 계약'을 일삼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마트 노동자들은 방광염은 기본이고 하지정맥류 등을 달고 삽니다. 혜미처럼 '진상 고객'이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하면 '시키는 대로' 굴욕과 멸시를 감수해야 합니다. 우리가 일주일에 한두 번 들르는 마트의 계산원들이 겪고 있는 현실의 일부입니다. 홈플러스의 노동자들이 거리에 나섰던 것처럼, 영화 속 선희와 혜미, 순례가 파업에 나선 이유이기도 합니다. 영화는 이들이 파업에 나서면서 본론으로 진입합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던 전태일 정신이 현재진행형인 까닭

 동준이 본사에서 정규직도 연봉계약직으로 전환한 후 회사를 매각한다는 사실은 알고 뒤늦게 노조에 가입해 노조위원장을 맡는다.

동준이 본사에서 정규직도 연봉계약직으로 전환한 후 회사를 매각한다는 사실은 알고 뒤늦게 노조에 가입해 노조위원장을 맡는다. ⓒ 명필름


<카트>는 지난 2007년 이랜드그룹의 비정규직 계산원의 대량해고에 맞선 여성노동자들이 홈에버 월드컵점을 점거하고 510일간 파업을 단행한 홈에버 투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홈에버 투쟁의 속살을 사실적으로 재현하지만 여기에 머물지 않고 미진과 동준 등 88만원 세대와 정규직 노동자 등으로 외연을 확장합니다. 이들은 언제든지 '을'로 내몰릴 수 있는 우리들을 대변하니까요.

태영은 급식비도 제때 못주는 엄마의 삶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주도 수학 여행비를 벌기 위해 알바를 하던 편의점에서 임금을 받지 못하게 되면서 엄마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미진은 이를 앙다물고 스펙을 층층이 쌓은 후 면접을 50번 이상 봤으나 매번 낙방했습니다. 영화는 미진을 통해 낙타가 바늘귀 통과할 정도로 어려운 직업시장을 불나방처럼 떠돌아다니는 88만원 세대의 절박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마트에서 선희와 혜미의 손을 맞잡아 주는 이는 동준입니다. 정규직마저 연봉계약직으로 전환한 후 회사를 통째로 매각할 수순을 밝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동준은 '단결의 손'을 내밀고 노조위원장까지 맡습니다. 연대와 단결은 우산을 빌려 주는 것이 아니라 비를 맞으며 같이 걷는 것이니까요. 영화는 혜미의 과거가 그랬듯이 동준을 통해 신자유주의 시대에는 정규직도 '자본의 논리'에서 예외가 될 수 없음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요즘 청년들 사이에서는 '열정 페이'라는 자조적인 말이 유행입니다. '열정이 있으니까 저임금도 감수하라'는 이 말은 기업들의 노동력 착취를 빗댄 말입니다. 중소기업중앙회 비정규직 여성노동자가 휴일 근로, 쪼개기 계약, 성추행 등을 견뎌오다 정규직 전환 대상에서 탈락하자 자살한 것은 '열정 페이' 시대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입니다. 얼마 전 청년유니온이 청년세대를 1회용 티슈처럼 한 번 쓰고 버리는 '블랙기업'에 맞설 것을 선포한 것도 여기에 연유합니다.

그리고 영화는 관객인 우리에게도 되묻습니다. 고객의 이름으로 마트를 찾았다 파업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선희를 향해 혹 "불편을 끼치면 안 되잖냐"고 눈살을 찌푸린 적이 없었냐고. 세대나 직종을 불문하고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노동자들끼리 조금의 불편도 감수하지 못하느냐고. 당신도, 사실은, 노동자 아니냐고.

<카트>는 전태일 열사 44주기인 11월 13일 개봉했습니다. 또한 11월 13일은 홈에버 투쟁이 끝난 날이기도 합니다. 부지영 감독이 의도했든 아니든 '전태일 정신'을 잊지 말자는 메시지가 읽힙니다. 40년 전처럼 지금도 선희, 혜미, 미진과 같은 '현대판 시다'들이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에 허덕이고 있으니까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정신'이 현재진행 중인 까닭입니다.

나라 곳간 거덜낸 새누리당 정권 '복지' 말할 자격 있나

 선희는 파업으로 월급을 받지 못해 전기까지 차단당하고 혜미는 아들을 파업 현장에 데려와 함께 생활한다. 영화는 둘 사이를 통해 진정한 단결의 정신이 무엇인지 세밀하게 그려낸다.

선희는 파업으로 월급을 받지 못해 전기까지 차단당하고 혜미는 아들을 파업 현장에 데려와 함께 생활한다. 영화는 둘 사이를 통해 진정한 단결의 정신이 무엇인지 세밀하게 그려낸다. ⓒ 명필름


때 아닌 복지논쟁으로 나라가 들썩입니다. 박근혜 정부와 보수언론이 무상보육과 선택적 복지를 내세우며 무상급식과 보편적 복지를 공박하는 것은 사실 적반하장도 유분수인 격입니다. 엄밀히 따진다면, 박근혜 정부는 '복지'를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습니다. 7년간의 집권기간 동안 경제를 외치면서도 나라 곳간을 거덜 내고, 부자 증세에 등을 돌린 장본인이 새누리당 정권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논쟁의 뿌리는 이명박 정부의 방만한 국가 재정운영, 즉 '사자방'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4대강은 30조의 혈세가 투입되고도 매년 5천억원의 유지비에 3200억원의 이자를 물어야 합니다. 자원개발은 41조원의 혈세가 투입됐으나 손실만 35조원에 달한 데다 앞으로 5년간 31조를 더 쏟아 부어야만 합니다. 방위사업 무기도입 비리는 국정감사를 하지 않는 한 그 규모를 짐작하기 조차 어렵습니다.

사실 무상급식과 무상보육을 한꺼번에 시행할 수 있는 방안이 있습니다. 2009년 25%에서 22%로 깎아준 법인세를 정상화하고, 10대 기업에만 200조 원이 넘는 사내유보금에 세금을 부과하면 됩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는 2014 세법개정안에서 대주주에게 혜택을 몰아주었으며, 상속·증여세는 완화했고, 재산과세는 언급조차 없었습니다. 공평과세로 조세정의를 실현하는 게 아니라 '복지 먹튀, 서민 증세, 대기업 퍼주기'로 일관한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에서 '한국형 복지국가'를 구호로 내걸고 당선됐습니다. 공약집에는 보편적 복지국가라는 슬로건도 반영했습니다. 그러나 집권 2년도 채 안 돼 경제민주화는 실종됐고, 복지국가의 두 기둥인 연금과 의료는 폼만 잡다 다 걷어차 버렸습니다. 한마디로 박근혜 집권 2년은 복지정책의 은폐와 축소의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노동현장의 복지 또한 민주노총과 전교조 등에 대한 배제 전략으로 일관해 왔습니다.

문제는 무상급식과 같은 보편적 복지가 축소될 경우 피해는 애꿎은 학생들과 부모인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집중된다는 점입니다. 하루 종일 어두운 방안에 혼자 방치된 채 인형을 끌어안고 TV를 보며 "조미김이 제일 맛있다"고 하는 선희의 어린 딸 민영은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우리시대 가난한 아이들을 상징합니다. 영화는 작금의 복지논쟁이 누구를 위한 논쟁이고, 복지여야 하는지를 웅크리고 잠든 민영이를 통해 분명하게 대변합니다.

수많은 선희, 혜미, 순례, 동준, 옥순, 미진들을 응원합니다

 선희와 혜미가 경찰의 물대포를 맞으며 매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카트를 밀고 앞장선다. 영화는 열린 결말을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현장에 대한 관심과 응원을 당부한다.

선희와 혜미가 경찰의 물대포를 맞으며 매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카트를 밀고 앞장선다. 영화는 열린 결말을 통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현장에 대한 관심과 응원을 당부한다. ⓒ 명필름


홈에버 투쟁은 절반의 승리였습니다. 해고자 28명 중 노조간부 12명의 퇴사를 조건으로 협상이 타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노동현장의 힘은 이명박근혜 정권 7년간 약화되었습니다. 복지국가의 역할은 노동자의 삶이 밑바닥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노사관계의 공정한 규칙을 세우고 지키는 것인 데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현실과 달리 영화 속 선희와 혜미의 노조는 불법파업과 손해배상 판결이라는 죽음의 독배를 피해 승리할 수 있을까요?

<카트>의 비정규직 여성노동자들은 '단결하고, 연대하면 이길 수 있다'고 절규합니다. 또한 거장 켄 로치 감독의 영화 <빵과 장미>처럼 생존을 위한 밥(빵) 못지않게 인간으로서 존엄(장미)도 중요하다고 선언합니다. 용역 깡패들에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 나가면서 울부짖는 선희의 다음의 말은 이 모든 것을 담아냅니다.

"결근 한 번 안하고 연장 근무하며 바보같이 일만 했습니다. 회사가 잘 되면 저도 잘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짤리고… 저희가 바라는 건 대단한 게 아닙니다. 이렇게 외치는 저희를 봐달라는 겁니다. 저희 얘기를 들어달라는 겁니다. 저희는 투명인간이 아닙니다. 저희도 인간답게 일하고 싶습니다."

그런 선희를 향해 부지영 감독은 영화의 열린 결말을 통해 이렇게 화답합니다.

"(중략) 아무것도 몰랐던 이들이 부당한 현실에 눈을 뜨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낼 때,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자기 삶의 온전한 주인공이 됩니다. 믿었던 세상을 잃지만, 동료를 얻고, 가족을 발견하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투명인간이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려는, 지금, 이곳의, 수많은 선희와 혜미, 순례, 동준, 미진들을 응원합니다."

영화 카트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88만원 세대 복지논쟁 파업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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