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균 감독, 임안자 평론가

배용균 감독, 임안자 평론가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자료(임안자)

 
1980년대의 마지막 해였던 1989년, 대구에서 제작된 영화 한 편이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그해 로카르노국제영화제 황금표범상, 감독상, 촬영상, 청년 비평가상 수상과, 제42회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Un Certain Regard) 부문 수상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된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었다.
 
충무로라는 한국영화 중심을 벗어나 지역에서 제작된 영화가 세계적으로 주목받은 것은 전례가 없는 이변이었다. 1989년은 충무로에서 작은영화·소형영화로 불리던 영화들이 독립영화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시기였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대구에서 창작된 첫 독립영화로서 대구영화의 상징으로 부각된다.
 
1990년대 지역 영화운동의 특징은 서울을 중심으로 축적된 영화운동의 성과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개혁적 젊은 영화인들이 구체제에 맞서 충무로의 진보영화 전선을 확대해가는 과정에서 뒤늦은 출발이 이뤄졌다는 데 있다.
 
하지만 지역 영화운동은 대부분 사회변혁운동으로서의 영화보다는 새로운 영화에 대한 갈증을 바탕으로 했기에 주로 시네마테크 성격이 강했다. 그렇다고 군사독재 시기 정치·사회적 현실에 대해 방관한 것은 아니었다. 심의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검열이 존재하는 현실에서, 이를 돌파하기 위한 다양한 노력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던 시대적 흐름을 잇고 있었다.
 
운동으로서의 영화가 도드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기본적으로 저항정신이 내재돼 있었다. 1980년대 민주화 투쟁 이후 불어닥친 문화개방 흐름에 맞춰 질적으로 저하된 기존 한국영화 대신 새롭고 다양한 영화를 추구하던 열정이 영화운동을 형성하고 발전시킨 것이다. 
 
대학 영화동아리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이후 중요한 변화는 대학가에 영화동아리가 등장한 것이었다. 비록 1980년 서울대 얄라셩 이후 1985년 서울지역 대학 영화서클(동아리)이 집중적으로 생겨났던 것과 비교하면 다소 늦은 출발이었으나, 1989년에서 1990년대로 접어들며 여러 대학에서 영화동아리가 등장한 것은 특별했다.
 
1990년대 중반 대학 영화동아리는 경북대 꿈틀, 빛그림, 계명대 햇살, 한누리, 대구대학교 영화세상, 경북산업대학교(현 경일대학교) 시넬레온, 계명전문대 사진영상과 영상클럽 아이콘 등이 존재했다.
 
가장 먼저 만들어진 것은 계명대 햇살로 1988년 준비작업을 통해 사진 전시회를 개최했고, 집회 때 영화상영을 하는 활동을 하다 1989년 정식 동아리가 됐다. 노동자뉴스제작단이 만든 16mm 비디오로 만든 <전국노동자뉴스> 등을 상영했고, 매년 영화제를 개최했다.
 
경북대학교 꿈틀은 비디오 영상 동아리로 1990년 10월 31일 창립했고, 매해 비디오 영화 발표회와 만화영화제(1994년)를 만들었는데, 단편영화를 비디오로 제작했다. 꿈틀에서 만들어진 비디오 영화는 <또는 어떻게 내가 걱정을 멈추고 지구를 사랑하게 되었는가>(11분 25초. 1993년 5월, 한받 연출), <아 대한민국> (4분 25초. 1994년 11월, 연출 노재원·박범필·최진호),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8분 10초. 1995년 11월. 연출 정승렬) 등이었다.
 
경북대 영화동아리 빛그림은 1993년 5월 정식 동아리 인정받은 후 가을부터 비디오 창작활동 시작했다. 1994년 봄 서울예전(현 서울예대) 영화과와 단편영화제 개최를 시작으로 봄 가을에 영화제 개최했다. 1994년~1995년 비디오 영화 <노을에 기댄 이유>, <블루 시티>, <깨달음> , <?>, <머리가 약한 사람들>, <페널틱 키커의 불안> 등을 제작했다.
 
이들 대구지역 대학 영화동아리의 주된 활동은 비디오 영화제작이었다. 다른 지역보다 비디오 카메라를 제작에 활용한 것은 대구의 특징이었다.
 
경북산업대 영화동아리 시넬레온 1994년 6월 만들어져 1995년 3월 본격적 활동을 시작했고, 비디오 영화 <옛것을 찾아서-우리의 소리>를 제작했다. 계명전문대 사진영상과 영상클럽 아이콘은 1994년 3월 시작돼 CF와 영화 전반에 대한 학습과 함께 비디오 <노을에 기댄 이유> < 5월 소냥도, Sognando > 등을 제작했다
 
계명대에는 햇살 외에 한누리가 1992년 결성돼 1993년 회원모집에 들어가 1994년 실질적 활동을 시작했다. 대구대 영화세상은 1985년 야학 봉사활동으로 시작된 동아리가 1993년 영화와 연극을 공부하면서 1994년 영화로 방향을 전환한 경우였다.
 
 백승빈 감독

백승빈 감독 ⓒ 백승빈 제공

 
다만 이 대학 영화동아리들은 대구 영화운동의 흐름을 주도하거나 주축을 담당하지는 않았다. 서울의 대학 영화동아리 출신들이 충무로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대학동아리에서 배출된 영화인은 경북대 꿈틀 한받(감독), 노재원(제작자. 꿈틀 대표), 계명대 햇살 백승빈(감독), 한누리 김화범(인디스토리 이사) 등이었다.
 
1999년~2001년까지 계명대 '햇살' 대표를 3년 역임한 백승빈(감독)은 "대학 시절 보고 싶었지만 구할 수 없었던 영화들이 캐비닛 가득 들어있는 모습을 보고 반해 바로 영화동아리에 가입했고, 동아리 활동을 오래 하다가 졸업을 하고 나니 제대로 영화 공부를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라며 "결국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입학했고, 햇살 대표 경력이 한국영화아카데미 지원서의 공란을 채우는 데 보탬이 됐다"고 덧붙였다.
 
이들 대학 영화동아리는 1990년대 초반 장산곶매 <파업전야>와 영화제작소 청년의 <어머니, 당신의 아들>의 민중운동 진영의 중요한 연대사업으로 대구지역에서 상영될 때 노동자예술문화운동연합 영상분과 새날 등과 함께 상영을 조직했다. 당시 경북대 대강당, 계명대 시청각실 등에서 상영이 이뤄졌으며, 필름을 뺏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지 이를 저지하기 위해 격렬한 충돌이 이어졌다.
 
문화운동 기반으로 성장한 영화운동
 
하지만 대학 영화동아리가 영화운동의 주변부 역할만 맡았을 뿐 실질적인 대구의 영화운동은 문화운동의 틀 안에서 성장했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부터 반독재 민주화를 위해 투쟁했던 사회변혁운동의 갈래로서 문화운동이 자리했고, 이를 발판으로 대구 영화운동이 태동한 것이었다.
 
따라서 대구 영화운동의 이해를 위해서는 전사(前史)로서 대구의 문화운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구와 경북은 1980년대 광주학살의 원흉이었던 전두환과 노태우 군사독재의 정치적 본거지로 자리했으나, 1940년대 해방 전후 대구는 조선의 모스크바라 불릴 만큼 꽤나 진보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던 도시였다. 해방 직후 점령군으로 진주한 미 군정의 실정에 굶주린 민중들이 들고일어난 1946년 10.1 대구항쟁은 현대사에서 상징적인 민중봉기였다. 1960년 독재자 이승만에 항거했던 2.28의거에서 볼 수 있듯 반독재투쟁의 선봉이기도 했다.
 
대구 영화운동에 태동에 도움을 준 것은 문화운동에서 연극이었다. 대구 연극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 이필동(전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집행위원장)이었다. 서울에서 연기를 공부하고 대구로 돌아와 배우와 연출자 등으로서 40년간 대구 연극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이필동은 1967년 극단 인간무대를 창단했고 1971년에는 극단 공간, 1977년에는 극단 원각사를 창단하는 등 활발한 연극 활동을 펼쳤다. 1982년에는 누리예술극장을 개관해 1970년 중반부터 싹텄던 소극장 운동의 터를 닦았다.
 
이필동의 영향으로 연극을 시작한 것이 동생이었던 이준동(제작자. 전 전주영화제 집행위원장)이었다. 대학에서 마당극단을 만들어 연출하는 한편으로, 형과 함께 당시 연극 전용 소극장 '누리예술극장'을 운영할 만큼 이준동의 영화 인생 기초는 대구와 연극이었다.
 
 1981년 문을 연 누리예술극장

1981년 문을 연 누리예술극장 ⓒ 이필동

 
대구 영화운동의 발판이 된 것은 연극인 김성익이 1993년 8월 문을 연 '열린공간큐'였다. 김성익은 1980년 7월 생겨난 대구 분도소극장의 분도극회 창립회원이었다. 분도소극장은 공연법상 정식허가를 받지 못한 극장에서는 월 6일 이상 공연을 할 수 없었던 박정희 유신독재 치하에서 대구의 젊은 연극인들이 1978년부터 2년에 걸친 실랑이 속에 정식허가를 받은 1호 극장이라는 상징성이 있는 공간이었다. 1970년대 소극장 운동의 성과물이었고, 대구 실험극의 성지로 평가받고 있다.
 
영남일보(2008년 8월 8일)에 따르면 김성익은 "1984년 10월 극단 '우리무대'가 생겨날 때 기획책임자로 참여해 배우가 중심이 아닌 스태프 중심 극단을 만들었다"라고 밝혔다. 아스 밀러 작 '다리 위에서 바라본 풍경'에서 새로운 홍보기법을 도입했고, 예고 포스터와 본 포스터 시스템을 만들었으면, 전석 매진 사례를 이어가는 덕분에 배우들에게 러닝개런티를 지급한 것은 대구 연극사에서 보기 힘든 사건이었을 만큼 돋보이는 활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구의 첫 뮤지컬로 기록되는 <밤마다 사랑을>을 제작했고 1993년 유선방송 시대를 겨냥해 문화공연기획 프로덕션 역할을 했던 '프로큐'를 만들었으며, 소극장 시대가 끝날 무렵인 1993년 8월15일 폐관된 수성극장을 열린공간큐로 개조했다.
 
'열린공간큐'에 앞서 1990년 대구 민중문화운동 진영은 공연과 영상 검열이 일상화된 현실에 맞서기 위해 거점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대명동에 개소한 '예술마당 솔'(초대 대표 정지창 영남대 교수)이었다. 연극을 비롯해 전시, 공연, 토론회 등 다양한 행사들과 함께 작은 영화제나 상영회가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예술마당 솔'보다 '열린공간 큐'가 대구 영화운동의 산파 역할을 한 것은 해외 예술영화를 적극적으로 소개하면서 영화에 관심 있는 청년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덕분이었다.
 
 1993년 8월 개관한 열린공간 큐

1993년 8월 개관한 열린공간 큐 ⓒ 이필동

 
열린공간큐는 개관 행사로 1993년 8월 15일~21일까지 진행된 전국 팔도굿 한마당을 개최했다. 김성익은 당시 조선일보(1993년 8월 18일 자)에 "전국팔도굿한마당은 미신이라는 이유로 사라져가는 무속을 우리의 전통문화라는 측면에서 무대에 올려 관객들이 이를 현대적인 의미로 재해석하고 느끼도록 하자는 뜻에서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라고 밝혔다.
 
2008년 영남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전국팔도굿한마당으로 열린공간큐를 열었다. 일주일 동안 굿을 했다. 서양에도 왜 있지 않은가 '굿닥터'라고. 처음 그 극장을 봤을 때 흥분했다. 무대도 있고 뒤편에 넓은 공간도 있고, 아,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야말로 열린공간으로 다 채우고 남을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열린공간큐는 120여 평에 2백석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지만 일 년 내내 행사가 끊이질 않는 '열린 곳'이었다. 대구 매일신문(1997년 1월 8일 자)은 '팔도 굿 한마당'을 비롯 대학연극단의 비경연 '대학극 한마당', 고등학생 대상인 '청소년 연극축제'등을 개최하고 있고, 대관료가 싼 편이라 열악한 형편의 공연이 가능해 고등학생 록밴드의 공연도 심심찮게 이뤄지고 있다"고 전했다.
 
장르와 대상을 구분하지 않는 데다 연극 영화 음악 미술작가와의 만남, 여기다 일반극장에서 대관을 꺼리는 대중음악 공연과 노동단체나 전교조 행사 등 '반체제적' 행사까지 망라한 곳이었다.
 
특히 1994년부터 한 달에 한 번 이상 개최되는 영화제는 새로운 영화에 목마른 대구 관객들의 갈증을 해소해 주는 기회였다. 1994년 2월부터 '열린공간큐'에서는 오슨 웰즈의 <시민 케인> 등 '비평가들이 뽑은 좋은 영화 베스트10', '감독선정 베스트10', '히치콕영화제', '영국영화제', '사이버펑크영화제', '펠리니 회고전' 등등 매월 정기적인 영화제가 개최되고 있었다.
 
열린공간큐의 영화제는 당시 대구지역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것이었다. 할리우드 영화가 절대적 영향력을 차지하는 상황에서 예술영화 수입이 쉽지 않았고, 검열 등을 거처야 하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비디오출시도 되지 않은 작품들이 대다수였다. 예술성이 뛰어난 영화에 목마른 상당수 대구 관객들에게 다양한 장르의 고급영화를 선보이는 기회였다.
 
열린공간큐 회원이었던 원승환(인디스페이스 관장)은 "10년을 살던 안동에서 대구로 전학을 온 고등학교 시절, 내 유일한 즐거움은 대학가에서 불법 비디오를 보는 것이었다"며 수업이 일찍 끝나는 토요일엔 언제나 대학가 주변을 얼쩡거리며 '스크린'이라 불리던 불법 영화카페의 상영작 목록을 체크하고 가장 볼만한 영화가 상영되는 곳에서 종일 영화를 봤다"라고 회상했다.
 
또한 "1994년 대구에도 비디오영화제가 열리기 시작해 아르바이트해서 번 돈으로 등록금을 내고 남은 돈으로 가장 먼저 한 것은 영화제를 개최하는 문화공간인 '열린공간큐'에 1년 회원에 가입한 것이다"라면서 "매월 열리는 영화제를 다 볼 수 있다는 조건은 더할 나위 없는 호조건이었고 이후 영화제가 열리는 매월, 매일 영화를 보러 다녔다"고 추억했다.
 
당시 봤던 영화들은 <시민케인>, <전함 포템킨>, 히치콕의 영화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펠리니의 영화, 그 시절 유행했던 각종 컬트·호러영화였다. 원승환은 "비디오로 영화를 보는 것이었지만 대학가 '스크린' 카페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영화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었다"고 덧붙였다.
 
한받(감독. 인디뮤지션)은 "대학 1학년이 끝날 즈음인 1993년 12월 열린공간큐를 알게 됐다"며 "당시는 예술영화들에 대한 대중들의 열기가 관심의 수준을 서서히 벗어나면서 작가주의 영화들이 선보이던 때였기에 열린공간큐를 통해 쉽게 접하기 힘든 영화들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은 자극이 됐다"고 말했다.
 
이어 "화질이 너무나 열악한 복사판 비디오테이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화질 따윈 상관없다는 듯, 화질에 대한 보상을 자신의 가슴과 머리로 해가면서 그간의 목마름을 해소코자 엄청나게 모여들었고, 영화라는 것이 지식인들이나 대중들 사이에서 매력적으로 비쳤고 열광적으로 체험되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1970년대 문화적인 갈증을 해소해줬던 서울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의 영화 해방구 역할을 1990년대 대구에서는 열린공간큐가 감당한 것이다. 2005년 문을 닫을 때까지 10년 넘게 운영됐는데, 김성익은 1970년대 프랑스문화원 영사기사로 영화학도들에게 다양한 편의를 제공했던 박건섭(작고, 전 부천영화제 부집행위원장)과 같은 존재였다.
 
영화언덕의 출발
 
 영화언덕 창립 당시 회원들

영화언덕 창립 당시 회원들 ⓒ 이진이 제공

 
1994년부터 개최된 열린공간큐의 다양한 영화제들은 시네마테크 운동의 태동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대구 영화운동의 시발점이었던 영화동호회 '영화언덕'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열린공간큐 개관 초기부터 오가며 영화언덕이 만들어질 때 주축이 됐던 이진이(작가)에 따르면 영화언덕이 만들어진 계기는 열린공간큐에서 영화제를 맡고 있던 김은희의 제안이 바탕이 됐다. 김은희는 영남대학교 천마극단에서 활동했던 대학 연극패 출신이었다.
 
초기부터 영화를 보러 다녔던 이진이는 "꾸준히 보러오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김은희가 영화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을 만들고 싶다는 뜻을 밝혀 참여하게 됐다"고 말했다. 1970년대 프랑스문화원 시네클럽과 독일문화원 동서영화연구회가 생긴 것과 비슷한 과정이었다.
 
1994년 6월 열린공간큐를 기반으로 하는 '영화언덕'이 출범했다. 영화언덕이란 이름은 대구의 구가 언덕 구(邱)자라 한글 이름으로 만든 것이었다. 회장은 권태엽, 총무는 김은희가 맡았고, 초기 회원은 이진이, 서영지 등 10명 정도였다.
 
서영지(영화자막가)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94년 열린공간큐에서 영화제를 개최했고, 신문에 실렸거나 극장에 붙은 동호회 회원 모집 광고를 보고 모임에 참석했던 것 같다"며 "막내 회원으로서 여러 행사를 준비할 때 줄곧 실무적인 일을 맡았다고 회상했다.
 
이진이는 "이후 계명대 영화동아리 햇살에서 활동했던 박은주와 최해만 등이 가입하면서 회원은 20명 정도로 늘어나게 됐다"고 말했다.
 
영화언덕의 첫 행사는 7월 3일 수성동 열린공간큐에서 개최한 영화감상 및 비평토론회였다. 루이스 자네티 저 <영화의 이해>를 교본으로 한 영화이론 연구와 함께 사이버 펑크영화감독인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작 <비디오 드롬>을 보는 시간이었다.
 
 <시네힐> 창간호

<시네힐> 창간호 ⓒ 서영지 제공

 
이진이는 "당시 날짜를 정해서 모였는데, 다들 수줍음이 많았으나, 영화 이야기하는 시간은 해맑고 재밌을 만큼 모두 영화와 문학, 예술 분야에 공력이 대단한 젊은이들이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함께 나눈 영화 이야기를 글로 묶고 싶어서 잡지를 하나 만들자고 제안해 1994년 겨울 <시네힐>을 창간했다고 기억했다. 이름은 영화언덕을 영문으로 표기한 것이었고, 계간지 형태로 1년에 4회 발행됐다. <시네힐>은 이후 영화모임의 분화 과정에서 소식지를 만드는 선례로 작용했다.
 
영화언덕은 열린공간큐를 바탕으로 하고 있었으나 서울에서 시작된 '영화공간1895'-'씨앙씨에'-'문화학교 서울'로 이어지던 시네마테크 운동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진이는 "열린공간큐의 영화담당자들이 이미 서울의 시네마테크와 교류를 하면서 비디오테이프 영화를 확보하고 있었고, 영화언덕이 결성되면서 회원들이 자연스럽게 열린공간큐의 영화 일을 맡아 했다"며 "영화언덕을 운영하면서 씨앙씨에와 문화학교 서울에서 비디오를 빌렸는데, 그런 과정을 겪으면서 영화언덕이 독자적인 시네마테크로 나아가자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열린공간큐 김성익 대표님이 많이 도와주신 덕분에 1년 정도 시간이 흐른 후 열린공간큐를 나와 대구 약전골목 안에 작은 공간을 얻어서 독립할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한받(감독)이 영화언덕에 가입한 것은 1995년 초였다. "우연히 대구백화점(대봉동 프라자점)에서 개최된 서울단편영화제의 순회상영회를 보러 갔다가 뜬금없이 회원가입신청서를 쓰게 되면서 영화언덕에 가입했다"며 "훨씬 전부터 마음속으로는 회원가입을 하고 싶었는데, 1995년 4월 말 약전골목에 있던 영화언덕의 사무실을 찾아 가보니 진정 내가 꿈꿔왔던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고 회상했다.
 
또한 "쉽게 접할 수 없는 영화들을 마음껏 빌려볼 수 있다는 점이 첫째로 좋았고, 보물창고 같던 '영화언덕'이 너무나 좋아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계속 영화를 보며 사무실에서 살기까지 했다"고 덧붙였다.
 
한받은 "경북대 '꿈틀' 활동보다 영화언덕 활동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고 말했는데, 서영지도 "학교생활보다 영화언덕 활동을 열심히 했고,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일을 배울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영화인협회 대구지부 비판
 
 영화언덕이 개최한 컬트영화제

영화언덕이 개최한 컬트영화제 ⓒ 서영지 제공

 
1980년 이후 서울과 지역 상관없이 영화동호회가 생기면서 가장 기본적으로 추진했던 것이 영화제 개최였다. 영화언덕도 다르지 않았다. 1995년 1월 개최했던 컬트영화제가 대표적이었다.
 
그런데, 준비 과정에서 기존 영화인 단체였던 한국영화인협회(영협) 대구지부 일부 운영진과 갈등을 빚으면서 난관을 맞게 된다. 이 때문에 1994년 12월에 예정했던 영화제가 연기된다.
 
발단은 영화언덕이 계간 <시네힐>을 통해 영협 대구지부를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영화인협회 대구지부는 매해 대구영화제를 개최하고 있었다. 1992년 대구시민영화축제로 시작해 대구시민영상제에서 이름을 바꾼 행사였다.
 
하지만 상업영화 무료상영 형태를 띠고 있었던 행사가 영화상영 없이 친교 행사나 공연행사로 바꾸면서 논란이 됐다. 멋대로 행사를 바꾸는 것에 대해 영화언덕이 날카롭게 비판한 것이었다.
 
이진이는 1994년 12월 <시네힐> 창간호에 쓴 '제도권 영화제의 허상-대구영화제에 다녀와서'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대구영화제 허술한 행태에 맹폭을 가했다.
 
이진이는 "11월 대구영상문화의 발전을 위한다는 그 행사는 하나의 해프닝이었다"라며 "어수선한 장내는 마치 어느 싸구려 카바레를 방불케 했고, 영화제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 행사는 그야말로 행사를 위한 행사일 뿐이었다"라고 비판했다.
 
또한 "이미 내정되어 있는 시상에 각본처럼 짜여진 상투적이고 진부한 진행은 시골 서커스단의 공연을 연상케 했다"면서 "3회 대구영화제는 주최 측의 표현의 빌리자면 문화시민인 대구시민들의 무관심(?) 속에서 진행됐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만일 그날 그 행사에 왔던 사람들이 대구시민을 대표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아줌마들이 너무 많았다. 마치 곗날 같았다"며 "대구시의 굵직굵직한 단체들이 총동원된 행사는 과연 누구를 위한 행사였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1990년대 중반은 충무로 주도권을 놓고 영화운동 진영과 충무로 구체제의 다툼이 치열할 때였다. 비록 대구에서 시네마테크 활동에 참여한 젊은 시선이었으나, 구체제 영화인들이 행태를 용납하기 어려웠던 것이었다. 표현 하나하나가 매우 강렬했는데, 이진이는 "당시는 뭣 모르고 혈기만 왕성하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했다.
 
영화언덕의 비판에 발끈한 영협 대구지부는 영화언덕이 12월 준비하고 있는 컬트영화제가 불법 복제한 비디오로 영화제를 개최하는 것이다"라며 경찰에 고발한다. 감정적인 보복이었다. 결국 12월 28일~31일까지 열린공간-큐에서 하려던 컬트영화제는 장소를 옮겨 이듬해 1월 경북대 대강당에서 개최할 수 있었다.
 
영화언덕은 당시 컬트영화제 자료집에 실린 글에서 영화제를 보러온 관객들에게 "영화언덕이 디디고 서 있는 이 땅이 너무나 황폐한 불모의 땅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각이 선행됐다"며 "기세등등한 기성세대가 휘두르는 권력의 횡포에 분노와 절망을 삭일 수 없었으며 동시에 본 영화제에 대한 일반 대중의 기대 이상의 관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는 소회를 밝혔다. 이어 "아직 많은 것이 부족하고 흠집투성이지만 영화언덕이 내딛는 한 걸음 한걸음에 뜨거운 성원과 관심 가져주시길 부탁드린다"고 응원을 요청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영협 대구지부가 영화제 개최를 경찰에 고발한 사실이 널리 알려지면서 노이즈 마케팅이 됐다는 점이었다. 이진이는 "덕분에 경북대 대강당이 관객들로 가득 차며 성공적인 영화제가 됐다"면서 "다만 수익을 내면 그게 불법이 된다고 해서 흥행한 만큼 수익은 거의 없었다"고 회상했다. 영화제 수익으로 잡지도 더 잘 만들고 영화언덕만의 공간을 확보하려고 계획은 진척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서영지는 "컬트영화제가 성공했고, 이후 열린공간-큐의 영화 프로그램 기획에 관여하면서 자연스럽게 시네마테크로 도약했던 계기가 된 것 같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당시 영화언덕은 주로 영화상영회와 영화이론 학습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여기에 더해 특별한 것은 영화 제작이었다. 지역의 영화운동이 상영과 비평 등의 비중이 높았던 것에 비하면 제작이 이뤄진 것은 대구의 특징적인 활동이었다.
 
총무였던 김은희는 영화언덕 활동 시작을 전한 매일신문(1994년 07월 16일 자) 기사에서 "회원 중에 8mm 소형영화의 제작 경험을 가진 회원이 많아 앞으로 영화비평은 물론 8mm, 16mm 영화제작에 까지 활동범위를 넓혀 나갈 예정이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실제로 영화 제작이 이뤄지면서 두 편의 작품이 만들어졌다. 이진이가 제작한 <인서트코인>(박순원 연출)과 제목이 글자가 아닌 쉼표 두 개로 표기한 < , , >(한받 연출)이었다.
 
비록 필름이 아닌 8mm나 가정용 비디오카메라로 찍은 영화지만 기술의 발전과 영화언덕 회원들의 열정이 빚어낸 의미 있는 성과물이었다. 이진이는 "<인서트코인>은 캠코더로 찍고 배우들도 영화언덕 회원들이 나서 공동작업으로 제작됐다"고 말했다. 한받은 "< , , >은 1993년 대학에 입학해 경북대 영화동아리 '꿈틀'에서 활동하면서 첫 번째 작품인 <또는 어떻게 내가 걱정을 멈추고 지구를 사랑하게 되었는가?>이후 두 번째 작품이었다고 말했다.
 
'영화언덕'에서 '제7예술'로
 
 제7예술 홍보물

제7예술 홍보물 ⓒ 서영지 제공

 
제작에 대한 열의가 커지면서 영화언덕은 2년 만에 재편된다. 1996년 4월 26일 제7예술로 이름을 바꾼 것이다. 이진이는 "영화언덕 회원들이 진학과 취직으로 활동이 뜸해졌을 때, 상대적으로 젊은 20대 초 중반 서영지(영화자막가)와 한받(감독)이 주도한 것이 제7예술이 생겨난 배경이다"라고 설명했다.
 
서영지는 "영화제를 찾는 관객의 발길도 줄어들고 초기 회원들이 취업과 결혼 등으로 활동이 약해지던 과정에서 창작 학습을 하던 10명 정도의 젊은이들이 영화언덕의 바통을 이어받아 본격적인 씨네마뗴끄 단체로 탈바꿈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영화언덕에서 창작활동에 적극적이었던 회원은 한받(감독)이었다. 그는 "영화언덕에서 창작부를 활성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며 "영화를 보는 것에서 나아가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굳이 필름으로 만들 필요도 없다. 비디오 캠코더가 있지 않은가. 캠코더를 들고서 무엇이든 찍어 보자고 했다, 몇몇 동의하는 친구들과 함께 화요일과 토요일 모여서 영화를 제작하는 화토 모임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우선 내가 연출을 하기로 하고 시나리오를 썼다. 준비됐다고 생각해서 촬영을 시작했다."
 
그러나 한받은 "촬영 도중 쉽게 지쳐버렸고, 결국 영화는 미완성인 체로 '창작부'는 활동을 멈췄다"면서 "일련의 행동이 영화언덕의 내부 분열을 일으켰고, 나의 주장을 굽히지 않다 보니 회원들의 반대 의사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한받은 "1995년 말에 대구비디오영상축제를 개최하면서 나와 친구들은 새로운 영화운동 단체를 꿈꾸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영화언덕이 제7예술로 확장하는 과정에 대구비디오영상축제가 발판 역할을 한 것이다.
 
 대구비디오영상축제 홍보물

대구비디오영상축제 홍보물 ⓒ 한받 제공

 
대구비디오영상축제는 1995년 12월 영화언덕이 개최한 비경쟁 단편영화제였다. 8mm 홈비디오와 베타 비디오 포맷을 활용한 영화제로 국내외 창작물을 보던 영화제에서 대구에서 직접 만든 작품을 보는 영화제로 발전한 것이었다. 1회는 '영화백년 비디오 0년'이라는 타이틀로 대우빌딩(현 영남일보 사옥)에서 개최됐는데, 영화언덕과 대학교 동아리들이 공동 주최했다.
 
한받은 "영화언덕 총무였던 서영지와 함께 기획하고 준비했다"며 "1995년 12월 28일 영화 100주년 기념일이라는 날에 대구 젊은이들의 비디오 영화들을 모아서 상영회를 개최한 것이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한받과 서영지는 대구의 대학교 중심으로 영화동아리나 영상창작동아리들을 수소문해서 직접 방문해 비디오 영화들을 섭외했다. 한받은 "서영지 함께 정말 열정적으로 움직였다. 예산이 없었기에 대구 교동의 비디오 가게들을 돌며 협찬을 구할 때 흔쾌히 도와주던 가게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언젠가는 호기롭게도 우방건설을 찾아가기도 했을 정도였다면서 결과는 협찬 실패였지만 도전하는 패기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대구비디오영상축제가 끝난 이후 4개월 뒤 시작된 제7예술은 김희경이 대표를 맡았고, 운영진은 기획 총무 서영지, 자료관리 김현진, 연구팀장 한받, 창작팀장 최재호, 홍보 김현주, 신입회원을 위한 영화의 이해반 팀장 최해만 등이었다. 회원은 이산아, 노대호, 임종오 등이었다.
 
한받은 "제7예술 회원은 영화언덕에서 함께 일했던 서영지와 몇몇 친구들을 설득해 가입하게 했고 대구비디오영상축제를 통해 알게 된 다른 대학 영화과 학생들도 영입했다"며 "아르바이트로 촬영을 해주던 웨딩 촬영 전문 업체의 친구들까지 설득해 동참하게 했다"고 말했다.
 
대표였던 김희경은 영남일보(1996년 10월 12일 자) 인터뷰에서 "비디오영상축제에 참가했던 회원 각자가 볼거리를 가져와 공통된 뜻을 확인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서영지는 "김희경이 학생 때 학내 활동을 많이 해서인지 말도 잘했고, 리더십이 좋아 대표를 맡게 된 것이었다"고 말했다.
 
한받은 제7예술에 대해 "대구 최초의 씨네마떼끄였고, 이름은 오래전에 한 저명한 평론가가 '영화'를 '제7예술'이라 부르는 데서 따왔다"며 "기존의 영화언덕이 가졌던 영화동호인회의 성격과 한계에서 벗어나 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관객 운동, 단편영화 제작과 영상자료원(씨네마떼끄)을 지향한 영화단체였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결코 영상자료원이 된 적은 없었다"면서 "회원들이 다 같이 영화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고 평가했다.
 
 제7예술이 발행한 소식지 <이미지나간이미지>

제7예술이 발행한 소식지 <이미지나간이미지> ⓒ 서영지 제공

 
제7예술은 창작팀, 연구팀, 기획팀 등 세 개의 팀으로 나뉘어 운영됐다. 창작팀은 시나리오 개발을 시작으로 영화 제작에 중점을 두었고, 연구팀은 기존의 영화 스터디 모임 외에도 회지를 만들거나 소규모의 영화제를 기획하기도 하였다.
 
1996년 10월에는 작은영화제라는 이름으로 매주 토·일요일 동성로 골목의 '쟁이' 카페에서 상영회를 개최해 마니아들의 호응을 얻었다. 1997년 1월에는 경제정의실천연합 등과 함께 대구시민영화축제를 개최했다.
 
기획팀은 전반적인 단체의 운영과 함께 큰 영화제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데 중점을 두고 활동했다. 이후에는 전국적인 관객중심의 영화-운동에 참여하고자 전국 시네마떼끄 연대 모임에 대구 지역 대표로 참여했다. 영화언덕이 <시네힐>을 만들었듯 제7예술은 소식지로 <이미니나간이미지>를 발행했다. 한받이 지은 이름이었다.
 
시네마테크로서 창작에 주안점을 둔 제7예술은 8mm 필름과 가정용 비디오카메라를 활용해 영화를 만들었다. 한받은 "언제나 비디오카메라라도 들어서 그것이 한없이 어설프고 실험적이라도 뭔가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만큼 영화 창작에 목이 말랐던 시절이었다"고 말했다.
 
영화언덕에 이어 2회부터 제7예술이 주최하게 된 대구비디오영상축제는 1998년 6월 6회까지 이어졌다. 5회까지 제7예술이 주관했던 대구비디오영상축제는 1998년 6월 28일 씨네마떼끄 아메닉이 주최한 6회로 끝나게 된다. 4회 이후 한받이 집안 사정으로 인해 제7예술 활동을 중단하면서 서영지가 주도하다가 마무리된 것이었다. 한받은 "독립영화 보다는 '비디오'영화라는 기존의 영화를 갱신하는 새로운 영화예술을 생각했었다"고 당시 활동을 돌이켰다.
 
6회 대구비디오영상축제 상영작들은 1998년 7월 30일~8월 2일까지 열린 인디포럼98 대구상영회 때 소개되는 등 서울의 독립영화 행사와 영향을 주고 받으며 지역독립영화 창작의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이진이는 "대구비디오영상축제는 대구단편영화제의 기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씨네하우스의 등장
 
대구 시네마테크는 제7예술만이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1996년 6월 또 하나의 새로운 시네마테크 모임이 만들어졌다. 영화창작모임으로 시작한 씨네하우스가 10월 대구교대 앞에 상영공간을 만들어 활동 폭을 넓힌 것이었다. 대부분 지역에서 하나의 시네마테크가 중심이었던 데 비해 대구는 달랐다. 복수의 시네마테크가 활동한 것이었다.  

단편영화 제작모임으로 시작한 씨네하우스는 10월 씨네마테크의 모습을 갖추게 되는데, 이때 실무를 책임진 것은 원승환(인디스페이스 관장)이었다. 일찍부터 '열린공간큐'를 오갔으나 영화언덕이나 제7예술에 참여하지 않았던 원승환은 "1996년 여름 권용철이라는 의사가 영화를 만들기 위해 동성로에 '씨네하우스'라는 카페를 열고 운영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간 것이었다"고 말했다.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아 사람을 구한다고 해서 내가 하겠다고 주변 지인에게 의사를 소개해 달라고 했다. 기본적으로는 커피와 음료를 파는 카페였으나 카페 운영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고 영화를 상영하는 일에만 관심 있었다. 권용철 원장을 설득해 대구교대 앞 지하 공간에 상영공간을 마련해 시네마테크를 1년 6개월 정도 함께 운영했다. 당시 학교 선후배 관계였던 김화범 (인디스토리 이사), 천기학(감독, 단편영화 <창경원> 등)과, 김화범의 소개로 만난 노재원(제작자. 영화사 꿈틀 대표) 등과 같이 활동했다."
 
 씨네하우스 소식지

씨네하우스 소식지 ⓒ 서영지 제공

 
씨네마떼끄 씨네하우스 구성은 권용철 대표와 원승환 사무국장을 비롯해 영화제작팀 윤희성, 연구팀 천기학, 영화제기획팀 김화범, 권은기, 손려모 등으로 구성돼 있었다. 회원은 90명 정도였고, 회지 <씨네하우스>를 발행했다
 
영화제기획팀에서 활동했던 김화범은 "그냥 영화 보러 갔었고, 당시 그런 예술영화들을 많이 봤다"며 "어떻게 보면 학교 졸업하고 직장에 취직했거나 했을 것 같은데, 씨네하우스 왔다 갔다 하면서, 물론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이쪽 방면으로 일을 찾고 싶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명확히 영화 쪽의 길은 아니었으나 학교 졸업 후 IMF가 터졌고, 할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하는 시기에 시네마테크에서 영화 공부도 하면서 1999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으로 진학해 서울로 학교를 다녔다"고 덧붙였다. 결과적으로 시네마테크 활동이 영화에 발을 딛게 한 것이었다.
 
씨네마떼끄 씨네하우스는 1996년 7월 칸 베를린영화제 수상작 영화제를 시작으로 8월 저패니메이션영화제, 아프로-아메라칸 영화제를 개최했고, 상영공간을 별도로 마련한 10월 이후에는 '2001 시네아스트영화제'를 개최했다.
 
당시 매일신문(1996년 10월 18일 자)은 "10월 21일부터 11월 9일까지 영화제작모임인 대구 씨네하우스에서는 21세기를 이끌어갈 세계의 신예 감독들을 선정해 매일(일요일제외) 2편씩 상영하는 2001 시네아스트 영화제를 개최한다"고 보도했다. 이어 "선정된 감독은 중국의 6세대 감독 장위안을 비롯, <심플맨>의 할 하틀리, <레닌그라드 카우보이 미국에 가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바디 에어리언> 아벨 페라라, <멈춰 죽지만 살아날거야>의 비탈리 카네브스키 등 13명이다"라고 소개했다.
 
1997년 4월에는 '4월 영화제'를 열어 5개국 대표 감독 8편을 상영했다. 70년대 뉴저먼 시네마를 이끌었던 독일 베르너 헤어조그 감독 <아귀레> <신의 분노>, 이탈리아 브루노 보제토 감독의 <알레그로 논 트로포>, 일본 이와이 순지 감독 <러브레터>, 츠카모토 신야 감독 <데쓰오 철의 사나이> 등이었다.
 
1997년 4월과 5월에는 '영상시대1: 한국영화전', '영상시대 감독전2-하길종'을 개최해 1975년 새로운 한국영화를 추구했던 영상시대 동인 이장호, 김호선, 하길종 감독 등의 작품을 소개했다.
 
6월항쟁 10주년을 맞아 6월 2일~24일까지 저항의 한국 독립영화 16편과 투쟁의 역사로 점철된 제3세계 영화 12편을 모은 '한국독립영화전'과 '제3세계 영화전'을 개최했다. 상영작은 <파업전야>, <닫힌 교문을 열며>, <어머니, 당신의 아들>, <황무지>, <우리는 전사가 아니다> 등 1980년~1990년대 초반 제작된 한국 영화운동의 대표작들이었다. 3세계 영화로는 알제리 민족해방운동을 그린 <알제리 전투> 쿠바 사회주의의 자화상 <저개발의 기억>, 브라질 민종 소외와 사회변혁을 그린 <검은 신 하얀 악마>, 칠레의 독재와 투쟁 다큐멘터리 <칠레전투> 등이었다. 
 
 일본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한 장면

일본 애니메이션 <원령공주>의 한 장면 ⓒ 스튜디오 지브리

 
특히 일본 애니메이션 상영회도 개최했는데, <원령공주>는 씨네하우스 상영에서 대박 날 정도로 상당한 호응을 받은 작품이었다. 원승환은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외국에 유학하고 하면, 8mm 테이프를 들여오면, 혼자 보기 아까우니까 외국어를 하는 분이 자막을 넣어서 더 많은 사람이 보고. 이런 방식으로 시네필들의 폭이 넓어졌고, '열린공간 큐'에서 그런 영화들을 보면서 관객으로 활동을 하다가 나처럼 그런 영화들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상영사업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역 언론의 시각은 다소 비판적이었다. 매일신문(1998년 2월 16일 자)은 "대구의 씨네마떼끄운동이 변질되고 있다"며 "제7예술, 씨네하우스 등 대구의 씨네마떼끄에서 열리고 있는 일본영화와 일본 애니메이션 상영전이 제도권의 흥행 논리를 그대로 답습해 얄팍한 상혼에 빠졌다"고 지적했다.
 
또한 "<수병위인풍첩> <요수도시> 등 일본 애니메이션에서도 저질에 속한 영화를 그대로 상영하거나,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 같은 포르노형식의 영화까지 소개할 계획이다"라고 보도했다. "지난달에도 왕가위감독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무단으로 상영하다 수입사인 모인그룹의 고발로 테이프를 압수당했고 지난 4일에는 대구개봉 예정이던 영화 '킹덤'을 불법 비디오로 상영하다 수입사에 적발됐다"는 내용도 전했다.
 
하지만 당시는 1996년 부산영화제가 시작되면서 해방 이후 금기시됐던 일본영화와 해외 예술영화에 대한 관심이 늘어만 가던 상황이었다. 특히 부산영화제 초기 일본영화나 애니메이션은 모든 상영이 매진될 정도로 인기가 폭발적이었다. 저작권 개념이 약한 시기였기에 불법복제 테이프를 통해 검열 영향이 미치지 않는 영화를 보던 것은 그 시절 시네마테크의 통과의례였다.
 
1997년 대선에서 첫 민주정부가 들어섰으나 1998년 2월은 아직 새정부 출범 전인 상황으로 사회 분위기가 금방 풀어진 것도 아니었다. 검열기구가 사라지고 등급분류로 바뀐 것이 1999년 6월이었다. 검열과 문화개방에 대한 문제 제기보다는 상영작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 언론의 모습은 당시 분위기를 엿보게 하는 한 단면이었다.
 
씨네마떼끄 아메닉
 
 아메닉을 이끌었던 원승환과 이영은

아메닉을 이끌었던 원승환과 이영은 ⓒ 서영지 제공

 
1998년에 접어들며 시네마테크 활동에 변화가 생겼다. 제7예술과 씨네하우스가 하나로 합쳐 씨네마떼끄 아메닉이 생겨난 것이다. 1998년 2월 씨네하우스 운영에 대한 견해 차이로 원승환과 권용철이 결별한 것이 계기가 됐다.
 
제7예술과 씨네하우스는 1997년 전국의 시네마테크 활동 단체들이 연대한 전국시네마테크연합이 만들어질 당시 각각 대구를 대표하는 단체로서 참여하고 있었다.
 
서영지는 "상업적인 프로그램이 많아서 씨네하우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으나, 후원자와 상영관을 갖춘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며 "전국씨네마떼끄연합에서 교류하다 친해지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씨네마떼끄 아메닉 초대 대표는 제7예술 김희경이 맡았으나, 직장인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원승환이 대표를 맡게 됐다"고 덧붙였다.
 
당시 아메닉 사무국장이었던 서영지의 영남일보(1998년 7월 2일 자) 인터뷰에 따르면 "아메닉은 사전에 없는 말로 대구의 시네마테크하면 떠올릴 수 있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자고 해서 회원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지은 새 고유명사"였다.
 
서영지는 "아메닉(AMENIC)은 시네마(CINEMA)의 영어스펠링을 거꾸로 배치한 것으로 원승환이 제안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또한 "아메닉은 영화 수용자(소비자)운동을 지향했고 전영쾌락, 여성영화제, 인디포럼, 독립영화정기상영회 등을 개최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도 있지만 영화언덕과 제7예술이 아메닉으로 이어진 것이었다"며 "1999년에 학교에 편입하면서 활동을 접었으나, 제7예술 후반기에 들어오신 이영은이 아메닉을 끝까지 지켰다"고 덧붙였다.
 
한받은 "1998년 제7예술 주요 창립회원인 내가 개인 사정으로 빠지면서 단체의 색깔이 모호해졌고, 열성적인 운영위원들로 계속 유지되던 제7예술은 비슷한 성격의 아메닉으로 흡수되면서 사라진 것이다"라고 말했다.
 
씨네마테크 아메닉은 독립영화 상영회 개최와 함께 해외 고전영화나 수입되지 않는 당대 예술영화 및 독립영화들에 대한 상영 활동이 중심이었다. 1996년 시작된 인디포럼과 서울단편영화제 상영작을 소개했다. 소식지로는 < amenic >을 발행했다.
 
 씨네마떼끄 아메닉이 발행한 소식지

씨네마떼끄 아메닉이 발행한 소식지 ⓒ 서영지 제공

 
원승환은 "1997년 제4회 서울단편영화제에 특별상인 '젊은시네마네크상' 심사를 위해 전국의 시네마테크 단체들이 영화제에 참여했고, 이 단체들을 중심으로 제4회 서울단편영화제 본선 상영작들과 한국 독립영화사를 다룬 서울영상집단의 다큐멘터리 <변방에서 중심으로>를 묶어서 전국 순회 상영을 했다"며 "대구 아메닉은 당시 전국 순회 상영에 16mm 필름 영사와 영어 대사 작품인 윤종찬 감독의 <메멘토> 한글자막 제작 등에 기술적인 기여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또한 "순회 상영 경험이 인디포럼98의 전국 순회 상영으로 이어졌다"면서 "당시 서울단편영화제나 인디포럼 대구 순회 상영의 예산은 입장료로 충당했고, 대구의 경우 상영은 주로 동아쇼핑 8층 아트홀을 이용했는데, 관객들의 참여가 많아서 회당 100명씩 찾아올 때도 있었다"고 당시 활동을 설명했다.
 
씨네마떼끄 아메닉은 독립영화상영회 외에 대구에서 개최된 영화제에 지원과 연대 활동도 펼쳤다. 1998년 5월 13일~16일까지 대구 계명대 대명동캠퍼스 시청각실에서 개최된 '98 대구여성영화제'는 대구여성회와 여성의전화가 주최했으나, 씨네마떼끄 아메닉이 여성과 현실연구회와 함께 공동으로 주관했다.
 
'98 대구여성영화제'는 주제별 상영을 통해 여성 영화의 다양한 흐름을 알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구성됐는데, 상영작은 종군위안부 문제를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조명한 세키쿠치 노리코 감독의 <전장의 여인들>을 비롯해 레즈비언을 다룬 줄리아 다이어 감독의 <늦게 핀 꽃> 등 모두 18편이었다.
 
원승환은 "당시 여성단체의 두 축이 대구여성회와 대구여성의전화였는데, 두 단체를 하나의 공동주최로 묶어낸 것은 김희경 대표와 서영지 사무국장이 아메닉 활동을 주도했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1999년 2회 행사를 진행할 때 여성 문제를 다룬 지역 영화들을 공모하기도 했었다"면서 "2회 때는 장소도 큰 공연장이었던 대백예술극장에서 진행했고, 대구 영화계에서 정말 중요한 활동이었는데,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 같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서영지는 "김희경 대표가 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아서 여성영화제 개최에 주도적 역할을 했고, 아메닉 활동 때도 방향성을 정했다"면서 "주요 회원에 여성이 많아서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고 말했다. "김희경 대표를 비롯해 이영은, 김은영, 조경희 등 회원들은 아메닉 해체 이후에도 여성 단체에서 '신난걸'이라는 밴드 활동을 했다"고 덧붙였다.
 
아메닉은 1998년 11월부터는 독립영화 정기상영회를 시작했다. 당시 매일신문(1998년 11월 19일 자)은 "씨네마떼크 아메닉 첫 정기상영회가 11월 29일 오후 2시, 4시 동아쇼핑 8층 아트홀에서 열린다"며 "상영작은 제12회 스위스 프리부르 국제영화제 단편 경쟁부문 그랑프리를 수상하고 제3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던 유상곤 감독의 <길목>과 <표류>, 역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됐던 박진형 감독의 <옹이> 등 3편으로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시간도 마련한다"고 전했다.
 
특히 이듬해인 1999년 1월 17일에는 동아쇼핑 8층 아트홀에서 대구 감독들의 작품을 모으는 독립영화 상영회를 개최해 주목받았다. 매일신문(1999년 1월 14일 자)은 영화 "제작환경이 열악한 대구에서, 그것도 대중의 폭넓은 관심을 받기 어려운 단편영화라는 한계를 딛고 꾸준히 작품활동을 하는 대구 감독들의 작품이 한자리에 모이는 시간이다"라며 의미를 부여했다. 상영작은 송의헌 감독의 16mm 단편영화 <동상이몽>, 김홍완 감독의 첫 작품 <상실>, 한받 감독의 신작 <기관총 불루스-네가 알지 못하는 불루스의 고전> 등이었다.
 
 한받 감독이 연출한 <기관총 블루스>의 한 장면

한받 감독이 연출한 <기관총 블루스>의 한 장면 ⓒ 한받

 
당시 영화를 상영했던 한받(감독)은 "내가 연출한 영화를 최초로 일반 시민들에게 보여준다는 사실에 몹시 흥분되고 떨렸으나 감개무량한 소회와는 별도로 영화는 다소 엉망이었다"고 회상했다.
 
"원래 제작계획은 컴퓨터로 영상을 편집하는 것이었다. 높은 사양의 컴퓨터가 필요했으나 그런 컴퓨터를 마련할 자금이 없었다. 결국 기존 방식대로 8mm 비디오테크 두 대를 갖다 놓고 이어 붙였는데, 음향 전체의 싱크(SYNC)가 맞지 않는 상황으로 우스꽝스럽게 작품을 완성하게 됐다"
 
다만 "대구의 한 전문대학교 영상학과 교수님이 차를 한잔 마시자고 해서 같이 마시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내 영화를 인상 깊게 보았다고 같이 일해보지 않겠냐고 제의를 하셨다. 그런 이야기를 듣자 그만 우쭐해져 버렸다"고 덧붙였다.
 
한받은 <기관총 블루스> 제작을 계기로 1998년 대안적 창작단체 'VVF(Vada Video Fighters. 바다 비디오 전사들)이라는 비디오 영화 제작 단체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창작에 대한 열의가 남달랐기 때문이었다.
 
한받에 따르면 VVF는 1998년 공익근무요원 복무를 필한 이후 의욕적으로 <기관총 불루스>를 제작하면서 만든 단체명으로 구성원은 모두 5명이었다. '바다 비디오 전사들'이라는 이름은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츠카모토 신야 감독의 영화 <동경의 주먹>의 크레딧에 나온 제작단체명(해수 괴물 시어터)을 보고 착상을 얻어 짓게 됐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한받의 이름을 부를 때 '받아'라고 하는데, 발음상 '바다'를 연상시키는 데서 알 수 있듯 한받이 중심이 돼 모인 단체다.
 
한받은 "당시 제7예술의 연구팀장으로 있다가 개인 사정으로 나오게 되면서 제작 중심의 단체를 구상하고 있을 때였다"며 "마침 신작 <기관총 블루스>를 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스태프로 일하던 다른 4명이 의기투합했고 그렇게 나를 포함해 5명의 회원으로 구성해 대구 명덕 로터리 근처에 한 빌딩 지하실에 사무실을 차렸다. 운영은 5명의 회비로 운영했다"고 말했다.
 
 VVF 사무실에서 한받 감독

VVF 사무실에서 한받 감독 ⓒ 한받 제공

 
하지만 <기관총 불루스>에 대한 비평에 상처를 받으면서 1년 만에 활동을 접은 한받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어느 날 저녁 VVF 사무실에서 술자리가 생겼다. 자주 만나던 아메닉 대표가 내가 졸고 있는 틈을 타서 <기관총 블루스>에 대해 신랄한 평가를 해댔다. 조는 척하면서 듣고 있던 난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심장이 뛰고 열을 주체할 수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분께 욕을 하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일 이후로는 아메닉과 발길을 끊었고 VVF 사무실에도 드문드문 갔으며, 곧이어 VVF는 자연스레 해체됐다"
 
한받은 "5년간 후회 없이 열심히 하다가 25살에 영화를 접었다"면서 "실제로 영화를 찍었더니 어설프고 부족함이 많았고, 자신에게 기대가 컸던 것 같다. 1999년 무렵 상경하여 영화계에 작품을 소개하려다 절망하고는 영화감독의 꿈을 포기했다"고 회상했다.
 
한받은 "서울에서 학교 선배들과 벤처 회사 '지구에서 살아남는 법(JSB)'를 설립했으나 실패한 후 빚더미에 올라 중국에 가 있었다"고 말했다. 이때 상해에서 클래식 기타를 사서 인민광장 등에서 잠시 노래한 것이 계기가 되면서 2000년대 이후 뮤지션 아마츄어증폭기(현재는 야마가타 트윅스터)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영화제에 초청돼 축하공연을 맡는 등 영화와의 끈을 계속 이어가는 중이다.
 
비록 영화의 꿈은 접었지만 1990년대 한받의 창작활동은 비디오영화를 통한 대구지역 제작 역량 강화에 일조했고, 시네마테크 중심의 기존 영화운동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게 평가된다.
영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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