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의헌 감독 단편영화 <동상이몽>
송의헌(대구독립영화협회 제공)
대구독립영화협회 결성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는 1999년 후반부터 진행됐다. 1999년 11월 15일, 대구영화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한다는 목적으로 손영득 외 14명(조중현, 송의헌, 안유학, 양우석, 윤성근, 오한택, 황성원, 김경훈, 황철현, 김효선, 원승환, 배청식, 우영호)이 대구영화제작 연대 기구 결성을 발의했다. 11월 22일에는 손영득 외 6인(송의헌, 황성원, 김효선, 양우석, 오한택, 원승환)으로 대구영화제작 연대기구 창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됐다.
발의자 중에 데뷔작 <변호인>(2015)으로 천만 감독이 된 양우석(감독)이 있었던 것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2000년 전후로 대구에서 창작된 작품이 늘어났는데, 양우석은 1999년 첫 작품으로 단편 <탄탈로스의 5월>을 제작했다. 양우석은 "일반적인 단편영화 형태 영상물이었다"며 "당시 대구 한 방송국 피디로 있던 시기에 만든 것으로, 방송국에 있었으나 목표는 영화 연출이었다"고 말했다.
손영득은 "양우석(감독)이 송의헌(감독)과 친분이 있었고, 대구방송(TBC)에 있으면서 대구독립영화협회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참여한 것이다"라고 기억했다.
송의헌은 "양우석 감독의 <탄탈로스의 5월> 제작이 마무리될 때 처음 만났고, 조언을 구해 많은 이야기를 나눈 후 대구독립영화협회 결성 과정에서 함께 했다"면서 "영화적 관점과 기술 등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양 감독은 디지털영화 제작시스템에 큰 관심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창립준비위원회는 1999년 12월 한국독립영화협회와 부산독립영화협회를 각각 방문해 지지와 연대를 요청했다. 발기인 서명 작업에 돌입하면서 대구지역 영상 관련 인사들의 의견을 수렴한 후, 2000년 1월 15일 국제기획이라 불렸던 국제리서치에 대구독립영화협회 창립준비위원회 임시사무실을 개설했다. 처음에는 영화제작연대기구라는 이름을 쓰다가 독립영화협회로 구체화한 것이다.
이어 2000년 2월 9일 창립준비위원회를 확대 구성해 창립준비위원장으로 경북대 독문과 김창우 교수를 추대했다. 설립 발기인은 이준동을 포함해 모두 186명이었다.
당시 준비 과정에서 중요한 도움을 준 사람이 이준동(제작자. 전 전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이었다. 창립준비위 임시사무실이 자리했던 국제기획(국제리서치)은 이준동이 대표인 회사였다. 손영득은 "국제기획 사무실은 대구독립영화협회의 요람과도 같았다"고 말했다.
대학 시절 연극 활동을 했던 이준동은 2001년 <오아시스> 프로듀서를 맡아 영화제작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까지 서울과 부산 등을 오가며 사업 수완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준동은 "당시 대구 사무실이 100평 정도로 넓어서, 대구독립영화협회 창립 준비 공간을 내줄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011년 10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와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을 응원하기 위해 '영화인 희망버스'에 참가한 이준동 대표가 팔짱을 낀채 정지영 감독 등과 함께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유성호
원승환은 "당시 대구독립영화협회 외에 민예총 대구지부도 이준동 대표 사무실에 들어와 있는 등 대구 문화예술운동 단체들의 사무공간이었다"며 "예술마당솔도 같은 건물 지하에 있었다"고 말했다. 이준동의 공간이 대구 문화운동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남태우(대구경북시네마테크 대표)는 "국제기획에 이준동 선배가 영화를 연구하기 비디오 기기를 갖춰 놓고 있었다"면서 "이후 영화제작을 위해 서울을 갔으나 독립영화 활동을 하다가 상업영화로 진출한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이준동은 박광수 감독 <그 섬에 가고 싶다>(1993)에 제작관리로 참여하기도 했다.
송의헌(감독)은 "대구독립영화협회 창립되던 당시 이준동 대표가 큰 힘이 돼 주셨다"고 강조하면서, "<봉인된 시간>을 번역하신 김창우 교수, 자유극장 대표, 지역 변호사 등등 많은 분의 응원 속에 대구독립영화협회가 출발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매일신문은(2000년 2월 19일 자) 대구 독립영화협회 창립 소식을 전하며 "그동안 열악했던 지역의 영화 제작 활성화와 영상문화의 저변 확대를 목적으로 결성되는 비영리 단체. 영화의 제작 지원은 물론 각종 영화제를 통한 독립·단편 영화의 배급과 영화관련 정책 연구, 영화교육 등의 사업을 펼쳐나갈 예정이다"라고 보도했다.
이 기사에서 송의헌은 "대구 독립영화협회는 21세기 영상문화의 세기를 맞아 지역의 실질적인 영상 주체가 될 것이다"라며 "영화에 관심이 많은 지역의 유명 인사들이 대거 발기인으로 참여해 전망이 밝다"고 자신했다.
원승환은 "1998년 한국독립영화협회(이하 한독협)가 생긴 것은 독립영화 단체 사람들이 모인 것이고, 탄압받던 독립영화인들이 제도권에 들어간 것이었다"며 "전국에 작업하는 사람들이 다 모인 것은 지역별로 단체를 따로 만들 만큼 역량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울에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서울은 이름이고 공간이지. 부산, 대구 등 전국 각지 단체의 개인들이 다 모여서 한독협을 만들었으나, 1년 뒤인 1999년 부산영화제가 열리는 부산에서 부산독립영화인협회가 만들어지면서 '다른 지역에서도 이런 걸 만들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회상했다.
또한 "한국영화인협회 대구지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젊은 사람들이 영화단체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많은 지역에서 있었고, 1999년도에 대구에서 영화단체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젊은 독립영화 정신으로 새롭게 시작
▲대구독립영화협회 창립식
대구독립영화협회 제공
대구독립영화협회는 2000년 3월 17일 대백프라자 11층 대백예술극장에서 창립대회를 열고 공식적인 출범을 알렸다. 서울과 부산에 이은 세 번째 독립영화협회의 탄생이었다. 창립준비위원회는 이날 김삼력(감독)이 읽은 취지문을 통해 대구독립영화협회를 만드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창립취지문] 대구독립영화협회를 건설하며...
60년대 영화사 통폐합 조치 이후 대구의 영화제작은 맥이 끊겨왔다. 물론 그간에 대구영화제작을 위한 움직임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노력들은 영화제작환경과 시장에 대한 경험과 정보가 부족하여 의도한 성과를 남기지 못하였거나, 개인적인 작업으로 그치고 말았다. 대구의 영화제작을 다시 활성화 시키는 일은 한두 편의 장편영화 제작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대구영화 제작문화를 다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화려하고 일시적인 영화의 제작이 아니라 뿌리에서부터 시작하는 영화 인력의 생산과 생산된 영화 인력들에 의한 지속적인 영화제작일 것이다.
우리는 젊은 독립영화의 정신으로 새롭게 시작하려고 한다.
독립영화는 경제적 독립이나, 검열로부터의 독립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자유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자유이듯이, 독립영화는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혹은 영화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 스스로가 세운 그 무엇을 위해 부단히 준비하고 노력하는 영화다. 스스로의 필요성, 목적성에 의해 영화를 만들어갈 때, 그것은 단순히 오락적이지 않고 상업적이지 않을 수 있다. 그 안에서 영화는 제작자와 관객,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영화를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 과정은 치열한 자기 정제의 과정이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며 함께 만들어가고자 하는 독립영화다.
대구에는 영화를 만들어왔거나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지금 여기라는 전제 속에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를 위한 연대다. 자신을 단련하며 서로에게 자극이 되며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단단한 연대다. 대구독립영화협회는 충분히 여건이 갖추어진 속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다. 그 여건마저 함께 만들어가야 하며 오히려 이것을 만들어가기 위해 출발하는 것이다.
이제 시작이다. 우리는 함께 가고자 한다.
2000년 3월 17일
대구독립영화협회 창립준비위원회
대구독립영화협회가 일성으로 강조한 것은 창작이었다. 지속적인 영화제작과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여건에 방향성을 설정한 것이었다. 서울을 제외하고 다른 지역보다 왕성했던 창작 욕구가 독립영화협회 결성의 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송의헌은 "다른 후배들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작업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생각에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지역 독립영화협회를 조직해야 한다는 목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초대 대표는 손영득이었고, 사무국장은 원승환이었다. 손영득은 "회의를 한번 했었는데 대표를 정해야 했다. 누가 할래? 했더니 손영득 대표가 나이가 제일 많으니 대표하셔야 한다고 해서 맡은 거였다"며 "나이순으로 하자고 하니 어쩔 수 없었다"고 말했다.
송의헌은 "나이도 그렇고, 애니메이션은 하는 인원이 적은 데다 실사영화를 하는 우리는 현장을 왔다 갔다 해야 하기에 손영득 대표가 제일 적합했다"고 기억했다. 원승환은 "창립 준비할 때 경북대 재학 중이던 김삼력(감독)과 고등학생이었던 최태규도 열심히 참여했다"며, "최태규는 이후 김삼력 감독 작품에 출연도 하고, 대구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고 말했다.
▲대구독립영화협회 창립영화제 포스터
대구독립영화협회 제공
대구독립영화협회는 출범과 함께 3월 17일부터 19일까지 사흘간 대백예술극장에서 창립영화제를 개최했다. 이어 다양한 상영회와 행사를 연이어 마련했다. 5월 17일∼19일까지 자유극장에서 개최한 '짧은영화 극장가다'는 한강 이남 최초의 개봉관 단편영화 상영이라는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7월과 8월에는 대구영화포럼과 영화·애니메이션 아카데미를 열었다.
11월 8일~12일까지는 대구 달서구 푸른방송 문화센터에서 대구독립영화협회가 만든 첫 영화제를 개최했다. 대구지역 영화제의 대표가 된 제1회 '대구단편영화제'의 출발이었다.
대구단편영화제 시작은 원승환 사무국장이 한국독립영화협회 배급팀장을 맡아 서울로 옮겨가기 전 대구시에 제안서를 낸 것이 계기가 됐다. 대구영상축제를 제안한 것이었는데, 1천만 원 예산 지원을 받게 된 것이다.
손영득은 "대구에서 영화행사를 하면 예산도 배정받을 수 있다고 해서 제안한 것이었다"며 "처음에는 비용이 적게 드는 상영회로 하려다가 송의헌 감독이 영화제를 해야 한다고 해서 영화제로 결정했다"고 회상했다.
송의헌은 "대구에서 만든 영화를 상영하거나 볼 수 있어야 하는데 당시는 영화를 제작해도 영화제에 선정되지 않으면 제대로 볼 수 없는 환경이다 보니 지역에서 만든 영화를 상영할 기회를 얻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었다"며 "지역 영화가 만들어지는 분위기였고, 대구 제작영화에 기회를 주지 않으면 너무 힘들어진다고 생각해 대구단편영화제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전두환 생가 방화
대구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남태우(배우. 대구경북시네마테크 대표)가 본격적으로 영화운동에 참여한 것은 대구독립영화협회 결성 직후부터였다. 한국독립영화협회 활동을 위해 서울로 옮겨간 원승환의 뒤를 이어 2000년 8월부터 대구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을 맡아, 제1회 '대구단편영화제'의 실무 준비를 책임진 것이다.
남태우는 "이런 쪽 일이 힘들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어서 개인적 취향으로는 맡고 싶지 않았으나 손영득(감독)과 송의헌(감독)이 도와달라고 했다"라며 "그 전화를 받은 게 2000년 8월 14일이라 광복절 지나고 하루 생각해 보다가 8월 16일 응하게 됐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 모습이 대구독립영화협회 사무차장이었던 김삼력 감독 <아스라이>(2007)에 동산동 국제기획에서 신문지 깔고 누워있는 장면으로 나왔다"고 덧붙였다. <아스라이는 대구독립영화협회 활동을 소재로 만든 영화였다.
▲전두환 생각 방화 사건을 보도한 MBC 뉴스에 나온 남태우 이름
MBC
남태우는 대학 시절인 1988년 11월 11일 광주학살의 원흉이었던 전두환의 합천 생가 방화 혐의로 구속됐을 정도로 학생운동의 전면에 섰던 운동권이었다. 당시 구속 집행정지로 석방된 후 불구속 재판을 받았으나, 1989년 징역 2년 6개월 집유 3년을 선고받았다.
남태우가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94년 서울에서 처음으로 국제영화제가 준비될 때였다. 지인이었던 기자의 소개로 국제에버그린영화제 행정담당 스태프로 참여한 것이 계기였다. 당시 김동호(강릉영화제 이사장)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륜) 위원장이 조직위원을 맡았던 영화제로 서울의 첫 국제영화제가 될 뻔했었다.
하지만 국제에버그린영화제는 무산됐는데, 주최 측은 영화 검열을 이유로 밝혔다. 이에 대해 남태우는 "초기 사전검열이 문제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항의 끝에 국제영화제의 위상에 맞게 검열을 하지 않기로 조정됐었다"며 "행정담당으로 서울시 동아일보,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등을 만나고 다녔으나, 실질적으로는 준비 부족과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영화제가 무산된 것이었다고"고 말했다.
남태우는 이후 서울의 케이블 채널에 다니다가 1999년 8월 15일 시민단체 새대구경북시민회의가 대안 언론으로 창간한 인터넷신문 < JUST > 편집장을 맡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그는 "부담되는 일이 아니었기에 2001년까지 인터넷신문과 대구독립영화협회 일과 병행했다고 말했다.
남태우가 대구독립영화협회결성 이후 주로 관심을 기울인 건 제작 외의 분야였다. 그는 "다수의 독립영화가 사장되는 안타까운 현실과 대중과의 소통이나 제작비가 회수되는 경우가 적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면서, 제작보다 독립영화를 지역 사회에 알리는 일에 주력해 배급과 상영, 정책 등에 집중했다"고 밝혔다.
대구단편영화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실무 책임을 맡아 단편영화를 알리는 데 기여했고, 2002년에는 대구경북시네마테크를 만들어 지역 내에서 영화문화의 다양성 확보를 위해 매년 정기적으로 예술영화 기획 상영을 주도했다. 예술영화전용관이었던 동성아트홀의 탄생도 남태우의 작품이었다.
대구의 예술영화전용관은 2003년 대구 매일신문 영화담당 기자였던 김중기(영화평론가)가 씨네아시아-구 아세아극장 2관에 개관한 필름통이 최초였다. 하지만 1년 만에 중단되면서 남태우는 독립영화 상영을 잇기 위해 다른 극장을 찾아다녔고, 2004년 동성아트홀을 설득해 독립예술영화전용관으로 전환 시켰다.
남태우는 "필름통은 영화를 좋아해서 나선 김중기 기자와는 다르게 건물주는 지원금에만 관심이 있다 보니 좌석도 못 채웠고, 배급 상영에도 관심이 없어, 일부 배급사가 필름을 돌려받지 못하기도 했다"다며 "시네마테크 활동을 위해서는 극장을 계속 구해야 하고, 대구단편영화제도 극장을 구해야 했기에 안정적인 극장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남태우 대구경북시네마테크 대표
남태우 제공
남태우는 대구독립영화협회 활동에 대해 "2009년 말까지 10년간 대구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을 맡았으나, 들어오는 수입은 없고 나가는 비용만 있던 어려운 환경이었다"며 "어떻게든 독립영화를 알려야겠다는 생각만 있었기에 상영과 배급을 비롯해 운영비를 감당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게 됐다"고 말했다.
남태우는 상영과 배급 외에 독립영화 제작에도 나서 현종만 감독 < Memories:2.18 대구지하철참사 >(2004)와 김동현 감독 <상어>(2007) 프로듀서를 맡기도 했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가 대구지역에서 제작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특히 독립영화의 활성화를 위해 영상미디어센터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 대구영상미디어센터의 설립에도 역할을 했다. 그러나 2006년 영상미디어센터 소장 선임 과정에서 지원자로 최고점을 받았음에도 탈락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당시 영상미디어센터 위탁 법인인 대구디지털산업진흥원 박광진 원장이 비민주적인 월권행위로 직권탈락시키면서, 대구영상미디어센터 운영위에 참여한 대구독립영화협회와 민예총 등에 소속된 운영위원들이 탈퇴하는 등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남태우는 "박광진 원장이 영상미디어센터의 독립적인 운영에 공감하고 있었고 소통이 잘 됐었는데, 갑자기 태도가 바뀐 것이었다"며 "직권탈락시킨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진 것은 아니나, 전후 상황을 볼 때 학생운동 전력과 전두환 생가 방화 사건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대구사회복지영화제 제공
대구 영화운동에 학생운동 출신으로는 김상목(대구 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을 빼놓을 수 없다. 1990년대 이후 학생운동과 노조 활동가를 거쳐 2010년이 돼서 대구 독립영화 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뒤늦은 합류였으나 대학과 노동운동에 현장에서의 꾸준한 활동성이 영화로 옮겨진 것이었다.
김상목은 "1995년 대학 재학시절 열린공간큐 등 지역의 민간 시네마테크를 드나들었고, 초기 부산영화제와 인권영화제 등에도 때마다 참여했다"며 "1998년 총학생회 활동 과정에서 학내 축제인 대동제 때 <킹덤>과 <해피투게더> 등을 상영하면서 독립예술영화의 잠재력을 확인했다"라고 말했다.
이어 "대학 졸업 후 2007년 노조 상급단체 전임자로 활동할 때 2007년 마이클 무어 감독 <식코> 상영회 실무 등을 맡으면서 영화비평에 관심이 생겨 공부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김상목은 2010년 이후 대구사회복지영화제 출범과 함께 프로그래머로 활동하면서 영화 칼럼니스트와 영화인문학 강좌 등의 교육 활동에도 나서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민중운동의 정신을 영화를 통해 이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사회 시대 민중을 향해 소리쳐야 했다"
대구 영화운동의 기점이었던 열린공간큐는 긴 시간 문화운동의 거점 구실을 톡톡히 해내며 12년을 버티다 2005년 5월 문을 닫았다. 대구의 문화혁명기지로 불렸을 만큼 김성익이 모든 재산을 투입해 민중문화와 독립영화, 언더그라운드 활동을 기획하고 지원했던 소중한 공간은 기억으로만 남겨졌다.
돈 되는 일이 아니었기에 열린공간큐의 운영난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김성익이 안 좋은 상황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던 것은 "돈 만드는 것도 기획력이었기에 돈이야기를 하기가 싫었다"는 것이다. 아무런 대책도 없다 보니 열린공간큐를 담당했던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요원이 전기료를 대신 내줬을 정도였다고 한다.
김성익은 영남일보(2008년 8월 8일) 인터뷰에서 1990년대 문화운동에 대해 "말 그대로 운동성을 빼고는 문화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며 "사회·시대·민중을 향해 끊임없이 소리쳐야 했다"고 회상했다.
▲열린공간큐 김성익 대표 절음 시절 모습김성익 제공
이진이(작가)는 "1990년대 대구 영화운동에서 열린공간큐와 김성익 대표의 활동과 도움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강조했다. 서영지(영화자막가)도 "열린공간큐와 김성익 대표가 안 계셨다면 영화언덕이라는 단체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대구 영화운동이 열린공간큐와 김성익에게 평생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것과 다름이 없다는 의미였다.
이진이는 "필름통을 개관했던 매일신문 기자 출신 김중기(영화평론가)의 도움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서, "1990년대 대구의 시네마테크 활동에 깊은 관심으로 끊임없이 기사화해 외부에 알렸다"고 말했다. 이어 "개인적으로 벤처기업 키노키즈를 만들 때 사무실 보증금 100만 원을 빌려주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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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도 충무로 아닌 대구 고집" 지역 영화의 뚝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