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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영화계 진보와 보수의 비율을 9:1이라고 한다. 그만큼 영화계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보수정권 시절 '블랙리스트'에 영화인 대다수가 이름을 올릴 정도로, 저항은 거셌다. '한국영화운동 40년'에선 몇 차례에 걸쳐 한국영화운동에 대해 돌아본다.
성하훈 기자
한국 영화의 세계화, 그 중심엔 '이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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