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에 제작된 <작은 풀에도 이름이 있으니> 한 장면
바리터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는 사무직 여성 노동자들의 문제를 담은 국내 최초 작품이다. 1987년 6월 항쟁과 7,8,9월 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 향상된 사무직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 투쟁 과정 등을 그렸다. 2부로 구성된 영화는 회사 일을 하면서 가사 노동과 육아 등에 시달리는 여성 노동자의 모습과 함께, 미혼 사무직 여성들이 민주노조를 결성해 회사의 탄압에 맞서 사수하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김영, 권은선, 김소연 등이 배우로 출연했다. 여성영상집단 바리터의 첫 작품으로 한국여성민우회와 공동으로 기획하고 제작했다.
권은선(영화평론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은 "여성운동단체와 여성영화창작자 단체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으로, 기혼 사무직 여성 노동자와 미혼 사무직 여성 노동자의 노동 조건과 젠더 억압이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했다"고 평가했다.
또 "여성 노동자 개개인의 노동조 건과 삶의 조건을 드러내고, 그것을 공동체적으로 사고하고 나누고자 했던 제작 의도가, 영화의 제목을 비롯하여 그 내용과 형식에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는 생산직 현장 노동자들이 주목받던 탓에 영화적으로 대중적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비슷한 시기 제작된 장산곶매의 <파업전야>의 큰 성공과는 대조적이었다.
서선영(시나리오 작가)는 "그때 당시에는 '여성 사무직 노동자'를 다룬다는 것에 내심 부끄러움을 가졌다"면서 "지금까지도 회자하는 <파업전야>는 공장에서 일하는 남성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였고, <파업전야>를 찍었던 장산곶매 선배들도 '야, 뭐 그런 영화를 찍고 있냐?'고 말해 마음이 조금 위축돼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요즘은 직장 내 성평등과 성희롱이 너무나 중요하고 와 닿는 주제이지만, 당시에는 완전히 아웃사이더가 된 느낌이었다"고 덧붙였다.
김소영은 "당시는 '여성 사무직 노동자'라는 존재가 이제 막 등장하던 시대였다"며 "바리터는 여러 층에서 '웬 여성?' '웬 사무직?'이라는 압력을 받았다. 우리와 뜻을 함께할 동지도 드물었다"고 밝혔다.
상영은 대학가 축제 등을 통해 이뤄졌다. 독립영화 제작과 상영이 불법으로 취급받던 시기에 <오! 꿈의 나라>를 통해 형성된 대학가 배급망이 활용된 것이다. 변영주는 "초청받은 대학교에 가서 상영하는 방식으로 관객들을 만났다"고 말했다.
서선영는 "영사기와 필름을 직접 들고 대학교 축제를 돌면서 배급했던 기억이 쓸쓸하게 남아있다"며 <파업전야>는 많은 사람이 모였고, 데모할 준비도 다 돼 있어 끝나면 다 시위하러 나가고 했지만, 우리 영화는 정말 쓸쓸했다. 관심이 없는 거다, 영화에 공감하지 않은 대학생들을 보며 쓸쓸하게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기억했다.
변영주(감독)는 "페미니스트가 모여 만든 '바리터'는 누구보다 좌파이고 그 자체로 독립영화 집단이었지만,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그때 독립영화를 했던 사람을 지금 다시 보면, 여전히 우리가 가장 좌파고 독립영화였다"고 회상했다. 이어 "바리터 활동에 어떤 후회도 없지만, 딱 하나 후회가 있다면 '어째서 우리는 언제나 증명하려고 했을까?'"라는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해산
바리터는 이후 도성희가 연출한 <우리네 아이들>(1989)을 두 번째 작품으로 만든다. 도시 빈민 여성의 현실을 고발한 다큐멘터리로 부모들이 일하러 간 사이에 죽음을 맞은 남매 사건이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였다.
이후 여성단체와 노동단체의 영상물을 만들거나 편집하는 프로덕션 일을 담당했고, 새로운 형식의 다큐멘터리를 고민하며 변영주를 비롯한 도성희, 홍형숙, 홍효숙 등은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전열>(1991) 제작에도 참여했다.
변영주는 "<전열>은 촬영을 끝내고 편집 단계에서 유학 문제 등으로 도성희(감독)가 중국으로 갔다"며 "나와 신명화(프로듀서)가 편집을 했고 도성희(감독)가 잠시 귀국해 후반작업을 맡아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바리터에서 활동했던 여성영화인들. 도성희, 서선영, 김소연, 김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여성영화운동의 개척자 역할을 했던 바리터는 2년 정도의 활동을 이어가다 1991년 해산한다. 변영주는 "그즈음 정치적 분위기를 살펴보면, 김영삼의 3당 합당으로 정국이 경색됐고, 마침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됐다"면서 "도성희 감독 같은 경우는 집이나 사무실로 이상한 전화가 걸려오는 등의 일을 겪으면서 정보기관인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의 사찰에 대한 공포감이 생겨 중국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가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나는 다큐멘터리를 계속 만들었고 다른 사람들은 유학을 가거나 각자의 갈 길로 가면서, 자연스럽게 바리터가 흩어지는 수순을 밟게 된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김소연(프로듀서, 영화사 무스칸)은 "1991년 취업을 했으나 일이 잘 안 맞아서 그만두고 8월쯤 다시 바리터 활동을 하고 싶어 찾아갔다"며 "변영주 등이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얼마 있다가 각자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진로를 선택하면서 1991년 9월쯤 발전적 해체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소연은 "이후 변영주와 함께 푸른영상에서 활동했다"면서 "1993년 <낮은 목소리>를 제작을 위해 만들어진 변영주의 기록영화제작소 보임이 바리터의 역사와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본다"고 평가했다.
1995년 이후 <낮은 목소리> 제작에 참여한 황윤정(프로듀서)도 비록 '바리터'는 사라졌으나 그 정신이 변영주를 매개로 '기록영화제작소 보임' 으로까지 이어져왔기에 <낮은 목소리> 작업을 하는 내내 '바리터' 출신 선배들인 김소영, 도성희, 홍효숙, 김영 등에게 지속적으로 아주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변영주는 "바리터의 역사나 정신은 당신 회원이었던 각자가 자신의 길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계승한 것으로 기록영화제작소 보임도 그 일부분이지 바리터를 나 혼자 계승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푸른영상은 나와 김동원(감독), 장산곶매에서 활동했던 오기민(프로듀서) 등 세 사람이 함께 만들었다"며 "이후 신혜은(프로듀서)이 합류했고, 오기민(프로듀서)은 상업영화로 갔으며, 나는 <낮은 목소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극장 개봉을 목적으로 했기에 기록영화제작소 보임을 만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혜은은 이후 <낮은 목소리> 3부작을 비롯해 변영주의 모든 영화 프로듀서를 맡는다.
<낮은 목소리> 기록영화제작소 보임
기록영화제작소 보임이 본격적으로 출범한 것은 1993년 6월이었다. 서초동 옥탑방에 사무실을 꾸린 변영주는 1993년 국제매춘에 관한 '아시아 보고서'인 다큐멘터리 영화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이어 <낮은 목소리> 3부작을 제작하며 일본군 종군위안부 문제를 스크린에 담는다.
<낮은 목소리>는 1980년대 말 본격화된 여성영화운동의 대표적 작품으로 영화적인 의미도 상당하다. <작은 풀에도 이름이 있으니>를 통해 사무직 여성노동자를 다루고 <전열>로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에 주목했던 여성영화운동이 빈민들의 보육 문제를 다룬 <우리네 아이들> 이후 <낮은 목소리>를 통해 일제 강점기 전쟁범죄인 종군 '위안부' 문제로 폭을 넓힌 것이기 때문이다.
▲<낮은 목소리> 제작비 마련을 위해 기념품을 판매하는 황윤정 프로듀서
황윤정 제공
이화여대에서 학생운동을 했던 황윤정(프로듀서, <후궁, 제왕의 첩>)이 영화운동에 합류하게 된 것도 <낮은 목소리> 제작 과정에서였다.
황윤정은 "대학 2학년이던 1992년 당시 변영주는 푸른영상에서 활동하며 아르바이트로 노래방에서 나오는 비디오나 대학가 축제(대동제)를 촬영하러 다니고 있었다"며 "이화여대 대동제도 변영주가 촬영을 와서 처음 보게 됐는데, 당시 선배들을 도와 총학생회 기획국 업무를 돕고 있을 때여서 촬영 조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당시 진보정당이었던 민중당 청년학생위원회에서 활동했던 황윤정은 이후 진보정당추진위원회와 민주노동당 활동을 하며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다. 1993년 제작된 변영주의 첫 영화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교내 상영 등을 지원하고 동두촌 기지촌 활동도 연대할 만큼 적극적이었다.
1993년 학회장을 맡은 데 이어 1994년에 총학생회 여성국장을 맡게 되면서 변영주의 작품 상영과 제작을 돕게 된다. 황윤정은 "<낮은 목소리>를 준비하고 있을 때라 제작비 모금 활동을 하고 기념품 판매, 특강 등으로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기록영화제작소 보임 합류는 변영주에게 고충을 토로하러 찾아갔던 게 계기가 됐다. 1994년 졸업을 앞둔 시점에서 인턴사원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으나, 잘 맞지 않아 고민하던 과정에서 변영주에게 함께하자는 권유를 받게 된 것이다. 1995년 4월을 전후로 한 시점이었다.
"너무나도 단조롭고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고 있다가 오랜만에 변영주 언니를 다시 만나 온갖 불평과 불만과 고민을 털어놨다. 한참을 가만히 들어주던 변영주가 갑자기 툭 던지듯이 '됐고, 그냥 때려 쳐! 뭐 그리 복잡하게 살아? 직장 생활이 뭐 별거 있어? 그냥 나한테 와! 같이 영화나 만들자!!'고 했다. 이 말에 잔잔하던 내 마음은 금세 커다란 소용돌이를 일으킨 것이다.
평소 결심을 하기 힘들었지 한 번 마음 먹으면 바로 실행하는 성격이었다. 그 즉시 회사를 때려치우고 정식으로 기록영화제작소 보임에 입사를 하면서 <낮은 목소리> 작업에 투입된 거다. 이때 <낮은 목소리> 촬영이 끝나고 후반작업 막바지에 개봉을 준비하고 있을 때였다. <낮은 목소리2>를 제작에 들어가면서 1996년까지 프로듀서를 맡게 됐다."
▲<낮은 목소리> 제작 당시 변영주 감독
기록영화제작소 보임(황윤정) 제공
<낮은 목소리>가 제작에 들어간 1993년은 다큐멘터리 투자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을 때였다. 지금처럼 영화진흥위원회의 독립영화제 제자지원 사업 자체가 없던 시절이라 모금 운동이 제작비 마련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변영주는 "당시 친구들의 신용카드를 빌리기도 하면서 제작비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또한 "스태프들이 다 모여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며 "차비가 없어 미아리 쪽에서 걸어오는 친구도 있었는데, 7명 정도가 모일 때까지 기다렸다가 식당에서 4인분을 시켜서 밥을 먹었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낮은 목소리> 제작 때는 100피트 회원을 모집했다. 당시 필름으로 영화제작을 하던 시기였기에 100피트 가격에 해당하는 비용(10만 원) 모금을 위한 방편이었다. <낮은 목소리1> 때는 주로 여성단체들을 중심으로 모집했고, <낮은 목소리2>에는 안성기 배우와 배창호 감독 등이 참여해 후원했다.
황윤정은 "1996년 배창호 감독님을 찾아갔는데, 다행히 사무실에 계시던 감독님을 만날 수가 있었다"며 "좀 기다려 달라는 감독님의 말씀에 한참을 앉아서 기다리고 있다가 100피트 회원 가입을 받아서 너무 기쁘고 행복하게 사무실을 나왔는데, 나중에 감독님이 당시 상당히 어려웠던 시기였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당시 배창호 감독은 <러브스토리>(1996)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많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린 여성이 찾아와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하는데 도저히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서 돈을 빌렸고 손에 쥐어서 보낼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황윤정은 "배창호 감독님이 특강이 있을 때마다 이 이야기를 하셨다고 여러 사람들을 통해 전해 들었다"며 "아마도 감독님의 눈에는 철딱서니 없었던 나의 무모한 열정이 무척이나 예쁘게 보였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이에 대해 배창호 감독은 "당시 크게 어려웠다고 할 수는 없고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이고, 어렵게 찾아왔는데, 그냥 보낼 수 있었겠냐"며 "흔쾌한 마음으로 참여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극장 개봉 최초 다규멘터리
<낮은 목소리>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이었던 <낮은 목소리 - 아시아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하 <낮은 목소리1>)는 1995년 4월 29일 공식적으로 동숭아트센터와 피카소극장, 강남 뤼미에르 극장 등 3개 극장에서 일반개봉을 한다. 해방 이후 극장에서 개봉된 첫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점에서 특별했던 한편으로 다큐멘터리를 극장에서 개봉하겠다는 변영주의 뚝심이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황윤정은 "실질적으로는 동숭아트센터에서만 개봉한 셈이라며 전단에는 피카소극장도 찍혀 있는데, 우여곡절 끝에 끝내 상영을 하지는 못했고, 강남의 뤼미에르극장은 관객이 한 명도 없던 상영이 몇 차례 있어 딱 3일 만에 극장에서 간판을 내리게 됐다"고 말했다.
반면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는 영화 마니아를 중심으로 조금씩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뜻밖에도 1달이 넘는 장기 상영으로 이어졌고 무려 1만여 명에 달하는 관객을 모으는 쾌거를 이뤘다"고 회상했다. 이어 "국내 외 유수 영화제에서 많은 상을 받은 뒤 추가 상영까지 하게 되면서 거의 매일 동숭아트센터로 가서 관객들을 만나 대화를 하고 배지 등 기념품을 팔았다"고 덧붙였다.
지방의 경우는 극장을 단 하나도 열지 못했다. 이에 기록영화제작소 보임은 서울개봉이 끝난 이후에 직접 보따리 장사처럼 전국을 돌며 유랑극단 식으로 상영을 하게 된다. 2000년대 이후 한국 독립영화에서 활성화된 공동체 상영의 효시와도 같았다.
황윤정은 "전국 각지에 있는 대학의 총학생회와 연계해 출장 상영을 다녔는데, 차가 없어 고속버스와 기차를 이용해 영화 필름과 소형 영사기까지 직접 챙겨 들고 전국을 순회했고 변영주의 특강은 패키지였다"면서 "한 명의 관객이라도 더 만난다는 의미도 있었지만 상영료에 기념품 판매 수익까지, 부족했던 제작비 보충에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낮은 목소리> 제작현장
기록영화제작소 보임(황윤정) 제공
<낮은 목소리1>은 20여개 대학과 20개 해외영화제에서도 상영되면서 종군 '위안부' 문제를 고발했다. <낮은 목소리2>는 1997년 8월 23일, <낮은 목소리 3 : 숨결>은 2000년 3월 18일 각각 개봉했고,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으며 일본의 전쟁 범죄인 종군 '위안부' 문제를 이슈화시킨다.
특히 일본에서의 상영은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낮은 목소리1>은 1995년 가을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오가와 신스케 상'을 수상한 것을 계기로 1996년 일본에서도 개봉을 한다. 해외에서 개봉된 첫 다큐멘터리로, 전쟁범죄의 가해자인 일본 사회에 과거사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는 점에서 파장도 컸다.
황윤정은 "<낮은 목소리> 개봉에 일본 우익들의 방해가 엄청나게 많았다"며 "현지의 영화 배급사였던 '판도라'에 상영중단을 요구하는 협박 전화가 빗발쳤고, 심지어는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던 도쿄의 박스 히가시 나카로 극장에서는 우익 단체의 청년이 갑자기 튀어나와 소화기를 분사하기까지 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낮은 목소리>는 거의 두 달 가까이 도쿄와 후쿠오카, 오사카, 나고야 등을 순회하면서 많은 일본 관객들과 만난다. 그중에는 같이 눈물을 흘리고 할머니들의 아픔에 깊이 공감하면서 일본 정부를 대신해서 사죄를 구하기까지 했던 선량한 일본 관객들도 무척 많았다.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범죄에 대해 여성영화운동이 이뤄낸 큰 성과였다.
변영주는 "100피트 회원과 배지 판매 등으로 제작비를 모금했음에도 불구하고 빚을 지는 게 많았다"면서 "<낮은 목소리> 3부작의 전체 남은 빚은 <화차>(2012) 흥행에 따른 인센티브로 갚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후 기록영화제작소 보임은 2000년 여름 7년간의 활동을 정리한다. 변영주를 비롯해 황윤정(프로듀서) 신수연(프로듀서), 신혜은(프로듀서), 신명화(프로듀서), 장호준(조감독 겸 동시녹음), 김응택(촬영), 한종구, 김운영, 이정례, 류수진, 이우영, 김순영 등이 활동했고, 안소현(인디스페이스 사무국장)이 스크립터로 참여했다. <낮은 목소리> 3부작 외에 김소영 감독의 여성주의 다큐멘터리 영화 <거류>도 제작했다.
최초의 여성영화제
▲1999년 여성문화예술기획이 주최한 2회 서울여성영화제 기자회견. 오른쪽이 이혜경 집행위원장
서울국제여성영화제
1990년대 초반 바리터와 함께 여성영화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은 문화운동 차원에서 페미니즘을 추구했던 여성문화예술기획이었다. 여성운동에서 문화예술을 아우르던 여성문화예술기획은 1987년 만들어진 한국여성민우회 문화기획실이 바탕이 돼 1992년 독립한 것이었다.
경항신문은 1991년 2월 25일자 기사에서 '여성미술가들이 모여 여성의 현실을 주제로 전시회를 열고 페미니스트의 시각으로 문학작품을 창작하며 제작, 대본, 감독, 기획, 조명, 촬영, 편집에 이르기까지 여성만의 힘으로 영화를 제작하는 여성문화운동이 활기를 띠고 있는데, 한국여성민우회 문화기획실 작업이 바로 그 대표적인 경우'라고 소개했다. 또 '여성운동단체에 소속돼 여성운동을 홍보하고 문화행사를 기획 진행하는 일이 일차적인 기능이지만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내는 것이 궁극적 목적'이라고 전했다.
한국여성민우회에서 문화기획실을 만든 사람은 이혜경(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이사장)이었다. 이화여대 71학번으로 문리대 연극반에서 마당극 공연에 나섰던 문화운동1세대였고, 1982년~1985년까지 독일에서 유학 후 귀국해 한국여성민우회의 제안으로 문화기획실을 만들었다.
1987년 <함께 사는 땅의 사람들>, <불꽃이여 이 어둠을>, 1988년에는 <꽃다운 이 내 청춘>의 공연을 올려 문화기획실의 독자적 활동 가능성을 시험했고, 1992년 여성민우회에서 나와 여성문화예술기획을 출범시킨 것이다. 정치적 운동성격이 강했던 문화기획실보다는 문화운동에 대한 접근을 다르게 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혜경은 독자적인 활동을 둔 1990년에는 한국여성민우회가 참여했던 여성단체연합에서 문화위원회를 구성해 장르는 다르지만 뜻을 같이하는 민족미술협의회 여성분과, 바리터 등 여성들과 문화운동의 폭을 넓히는 작업에 열중했다. 1989년 바리터에 <작은 풀에도 이름이 있으니> 제작을 의뢰하기도 했다.
1992년 여성문화예술기획 초기 사무국장을 변재란이 맡았고, 이후 김소영도 기획위원으로 참여했다. 대표를 맡은 이혜경은 연극 <자기만의 방>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등의 공연에 이어, 변재란이 기획하고 김소영, 유지나 등이 참여한 <여성의 눈으로 본 세계 영화사>같은 기획 강좌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이후 1997년 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시작하게 되는데, 영화제 초기였던 2000년에는 주진숙, 변재란, 장미희 등이 집필에 참여해 <여성영화인사전>을 펴냈다. 1960년대 이후 한국영화사를 정리하면서 기존 역사 서술에서 누락 되거나 배제됐던 여성 영화인들을 발굴한 의미있는 작업이었다. 주진숙은 "여성문화예술기획과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이 <여성영화인사전> 공동제작에 참여했다"며 "영화이론전공 대학원생들이 열심히 작업해줬고, 이순진 박사가 전 작업을 기획, 편집, 교정을 맡아 많은 고생을 했다"고 말했다.
▲1993년 열린 최초의 여성영화제 '스핑크스 수수께기-페미니즘 필름 페스티벌'
김영 제공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1990년대 여성영화운동이 이룬 성과로서 갖는 의미가 크지만, 국내에서 열린 첫 여성영화제는 1993년 6월 28일~7월 1일까지 열린 '스핑크스 수수께끼-페미니즘 필름 페스티벌'이었다. 이언경(작고, 영화공간1895 대표), 손주연(시나리오 작가) 이향(전 영화기획사 대표), 김영(프로듀서) 등 4인이 '예술기획 아이콘'이란 이름으로 개최한 것으로 여성영화제의 시발점이었다.
세계 각국의 여성영화를 소개하고 심포지엄을 통해 여성영화에 대한 시각을 정리해보기 위한 영화제였다. 영화를 전공했거나 연출을 공부한 20대 젊은 여성들이 개최한 영화제라는 것이 특별했는데, 아이콘은 네 명을 아우르는 표현으로 아이코노클라스트(iconoclasts. 우상파괴자, 인습타파주의자)의 줄인 말이라고 한다.
손주연에 따르면 <스핑크스 수수께끼-페미니즘 필름 페스티벌>은 활동 폭이 넓었던 이향의 제안으로 준비됐다. 대내외적으로 능력이 뛰어났던 이향이 당시 개최장소였던 종로5가 연강홀을 협찬받았고, '영화공간1985'를 운영했던 이언경과 '씨앙씨에' 대표를 맡고 있던 손주연, 그리고 이들의 권유를 받은 김영이 가세한 것이었다.
'바리터' 회원이었던 김영은 "선배인 이언경에게 제안을 받은 것으로 기억한다"며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나와 이언경 선배는 감독 지망생이었다"고 말했다. 김영은 1991년 한국영화아카데미 8기로 입학해 이듬해 수료한 후 방송 다큐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손주연(시나리오 작가)은 "시네마테크였던 씨앙씨에를 운영하며 영화감상, 영화제, 워크숍 등을 했었기에 자막번역과 상영 기획 등을 분담했고 프로그램도 같이 구성했다"며 "상영작 필름과 비디오 확보는 개인이 소장 필름과 프랑스나 독일, 일본문화원의 도움을 받고 이향이 해외영화제에 공문을 띄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당시 상영작들은 1989년 쿠바 아바나영화제 수상작이었던 16mm 영화 <스타의 시간>을 비롯해 베트남 트란 민하 감독의 <그녀의 이름은 베트남>, 스핑크스 신화를 토대로 이혼녀가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미국영화 <스핑크스의 수수께기>, 여성 혁명가의 삶을 그린 <로자 룩셈부르크> 등이 상영됐고 이현승 감독, 유지나 교수 등이 참석한 가운데 심포지엄도 개최했다.
페미니즘 필름 페스티벌은 1회성 행사였지만 높은 관심 속에 성황을 이룬다. 제목조차도 낯선 국내외 여성영화 20편 정도가 연속 상영된 5일 내내 500석 객석이 꽉 들어찼고 복도에서도 관람이 이뤄질 정도였다. 변재란은 "한국 여성 관객이 책에서만 만나던 페미니즘 영화의 실체와 만난 첫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한겨레는 "폭발적 관심은 관객은 볼 준비가 됐으나 영화계가 이르지 못한 여성영화의 절박한 공급 부족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독일에 유학 당시 베를린국제영화제를 보러 다녔던 이혜경(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이사장)은 "페미니즘 필름 페스티벌을 보고 여성영화제에 대한 영감을 얻게 됐다"며 "가부장제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는 작품을 보면서 영화의 힘을 느꼈다"고 말했다.
▲1회 서울여성영화제 여성영화인의 밤 행사 모습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여성문화예술기획은 이후 4년 뒤인 1997년 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의 막을 올리게 된다. 바리터에서 활동했던 영화인들이 힘을 더했다.
김소영은 "여성문화예술기획에서 영화 강좌 등을 열었고, 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개최할 때, 프로그램 디렉터를 맡아 프로그램 구성과 프로그래머 등을 섭외했다"고 말했다. 이어 "권은선이 프로그래머였고, 변영주, 김영이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고 덧붙였다. 김소연(프로듀서)은 "1회 때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를 담당했고 2002년 4회 여성영화제부터 사무국장을 맡았다"고 말했다.
이혜경은 "여성영화제를 처음 시작할 당시 변재란(교수)과 유지나(교수)는 박사과정에 들어가 여유가 없었는데, 김소영이 손을 맞잡아줘 많이 고마웠다"고 회상했다.
충무로의 여성 영화인들
1980년대 여성 영화인의 활동에서 여성영화운동과 또 다른 흐름을 구성한 것은 '한국영화 기획실 모임'이었다. 충무로의 극장과 영화사에서 기획업무를 담당하던 진보적인 젊은 영화인들이 친목 도모와 영화 공부 등을 위해 만든 것으로 채윤희, 심재명, 김미희, 지미향 등 여성 영화인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 기획과 홍보를 맡는 여성 영화인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의 역할과 비중이 조금씩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대학에서 영화운동을 했던 안동규(제작자, 영화세상 대표)와, <오! 꿈의 나라>를 상영하다 고발당한 이후 영화 쪽으로 넘어온 예술극장 한마당 대표를 지낸 유인택, 이화여대 영화패 누에 출신 김수진(제작자, 영화사비단길 대표) 등이 회원이었고, 단순한 친목을 넘어 영화계 주요 현안에는 영화단체들과 함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물론 한국영화기획실모임에 있던 여성 영화인들이 처음부터 여성영화운동의 목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각자의 분야에서 충실하게 한국영화 발전을 지원했던 여성 영화인들은 능력을 인정받고 이후 들어오는 후배들을 챙기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여성영화운동의 성격을 띠게 됐다.
대표적인 인물이 채윤희(올댓시네마 대표)다. 1980년대 초 출판사에서 활동하던 채윤희는 1986년 양전흥업 기획실장으로 영화계에 들어온 후 1990년대 다수의 기획영화를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했다.
기존 충무로에서 감독의 의도와 개성에 따라 만들어지는 영화가 아닌 제작자와 기획자가 아이디어를 만들어 제작하는 기획영화가 늘어나던 시기였다. 영화운동 출신들이 충무로라는 제도권 틀 안에서 기획영화 제작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기획과 홍보마케팅이 중요성이 커지던 시점에서 여성 영화인들은 이들의 영화의 흥행을 뒷받침했다.
채윤희는 1994년 올댓시네마를 설립해 마케팅이 도입되던 시기, 한국영화의 중흥에 기여한다. 1999년~2000년대 초반 스크린쿼터반대 투쟁 당시에는 영화인들의 삭발 투쟁 동참을 결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행 직전 당일 행사 진행자가 '여자 분들은 나오지 말라'고 해 미수에 그쳤다"며 "원래 일만 했지 앞에 나서는 일을 하지 않았으나 2000년 이후 여성영화모임 대표를 맡은 이후는 성명서 낭독 등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1991년 <나의 사랑 나의 신부>의 36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수상 축하행사. 왼쪽부터 김동호 조명감독, 채윤희 대표, 박효성 삼호필름 대표. 박중훈 배우, 이명세 감독, 유영길 촬영감독 등
채윤희 제공
▲1992년 후쿠오카 영화제 참석한 김의석 감독, 심재명 대표, 임권택 감독, 정일성 촬영감독, 박종원 감독 등
명필름 제공
심재명 역시 채윤희와 함께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 1990년대 충무로에서 빼어난 능력을 선보이며 여성영화운동의 바탕을 다졌다.
1982년 대학해 1984년 프랑스문화원 씨네클럽 회원으로 가입한 후 영화를 보러 다니면서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웠던 심재명은 월간 <스크린> 대학생 기자단에 참여하기도 했다. 1984년은 한국영화운동이 '작은 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8mm/16mm 발표회' 이후 탄력을 받던 시기였다.
심재명은 "'영화마당우리'나 '영화공간1895'에 직접 참여는 안 했고, 외대 영화동아리 울림에서 활동하던 친구가 있어 학내에서 개최하던 영화제를 보러 다니며 부러워했었다"고 말했다. 심재명의 대학 시절 활동만 보면 민중적 영화보다는 새로운 영화를 추구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1995년 장산곶매 출신 이은과 함께 명필름을 설립하면서 여성을 비롯해 노동과 통일 등 정치 사회적 주제들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 흥행시키며 상업영화에서 운동성을 구현한다.
1990년대 이들의 활발한 활동은 충무로 밖의 영화운동과는 또 다른 형태로써, 한국사회 변혁을 추구한 영화운동에 기여한다. 영화운동의 전선이 충무로로 확대되는 시점에서 기획과 홍보마케팅 분야에 포진해, 새로 영화계에 진출하는 여성들을 보듬으며 교두보 역할을 한 것이었다.
1997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시작됐을 때 채윤희와 심재명은 수상자들에게 지급하는 상금을 지원하기 위해 모금 활동을 펴기도 했다.
특히 1999년 부산영화제에서 열린 여성영화인 간담회 이후 주진숙과 채윤희가 공동 준비위원장을 맡아 2000년에 만들어진 여성영화인모임은 여성 영화인들의 권익을 한 단계 끌어올린 여성영화운동의 귀중한 결실이었다.
채윤희는 "여성영화인모임은 권익옹호나 남성 중심의 주류에서 당하는 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부정의 개념으로 생겨났다기 보다는 여성영화인들의 자체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모임"이라고 설명했다. 여성영화인모임은 한국영화의 유리천장을 깨는 데 앞장서면서 2000년대 이후 충무로의 변화를 이끈다.
박사 논문 준비하며 충무로 체험
▲주진숙 한국영상자료원장
영진위
채윤희와 함께 여성영화인모임을 주도한 주진숙(영화평론가. 한국영상자료원장)도 여성영화운동에서 빠져서 안 될 만큼 중요하다. 충무로 현장과 평단을 오간 여성영화운동의 든든한 후원자였기 때문이다. 주로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매진했던 주진숙은 유학에서 돌아온 후 1987년 장선우 감독의 <성공시대> 연출부로 들어가 스크립터를 맡은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학자로서 현장 경험을 쌓은 것이었다.
주진숙은 "당시 박사 과정에 들어가며 자료 확보 등을 목적으로 김동원(감독, 푸른영상)의 소개를 받아 스크립터로 참여했다"며 "당시 퍼스트가 임종재(감독,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 세컨이 정병각(감독, 충남영상위원장)이었고, 이때 충무로 사람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주진숙은 1990년 한길예술연구원에서 영화학교로 만든 영화감독 양성코스 '영화예술반'이 개설했을 때는 지도교수로 참여했다. 이때 수강생이 오승욱(감독), 최하동하(감독), 김선아(전 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 등이었다. 1991년 출판사 한길사가 계간지 <한길영화>를 창간할 때 편집위원을 맡았고, 1996년에는 한국영화연구소 초대 소장과 1997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시작됐을 때는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김영(프로듀서)은 "1991년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 몇 개월 간 한길예술연구원에 다녔는데, 당시 담임이 주진숙 교수였다"고 말했다.
주진숙은 "이언경의 '영화공간1895'에서는 < Film Art >라는 책으로 한번 강의했고 이후 이용관(부산영화제 이사장)과 함께 번역해 <영화예술>로 출간했다"며, "<한길영화>에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이효인(영화평론가, 전 한국영상자료원장)을 알게 됐고, 이용관, 이충직(전 전주영화제 집행위원장)을 통해 만난 전양준(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등과 교류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채윤희 심재명 등과는 시사회를 다니면서 간간이 보다가 1999년 여성영화인모임을 만들면서 적극적으로 협력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변재란은 "주진숙, 채윤희, 심재명 등에 의한 2000년 여성영화인모임의 창립은 현장 중심 여성영화인들이 주도한 새로운 운동의 시작이었다"며 "2001년 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이후 함께 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아녜스 바르다 감독이 초청됐던 2001년 3회 서울여성영화제에서 대담을 진행한 주유신(오른쪽)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서울영상집단이나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노문연) 등에서 활동하던 남인영, 주유신 등도 2000년 이후 여성영화제에 참여하면서 1980년~1990년의 여성영화운동이 2000년 시작과 함께 새롭게 결집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학생운동을 거쳐 영화운동으로 영역을 넓힌 주유신(영화평론가, 영산대 교수)은 1999년 2회 여성영화제부터 참여하기 시작해 2001년 3회 여성영화제 당시 아녜스 바르다 감독이 초청됐을 때는 대담을 진행하기도 했다.
주유신에 따르면 "대학 졸업 후 비제도권인 문학예술연구회(문예연)에서 활동하다가 1989년 민중문화운동연합(민문연)과 문예연이 통합해 노동자문화운동연합(노문연)으로 전환되던 때 영화분과였던 '11월 13일'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노문연 연극분과에 배우 정진영이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주유신은 "이언경의 영화공간1895에서 몇몇이 모여 소박하지만 진지하게 영화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할 때 그들 중 한 명이었다"며 "미학을 계속하기 위해 대학원에 들어가려다 교수와의 관계 때문이었는지 뜻대로 되지 않아 영화 쪽으로 전환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1990년에 장산곶매의 <파업전야>가 노태우 군사독재의 탄압에 맞설 당시 영화운동 단체들이 '<파업전야> 공동투쟁위원회'를 구성했을 때는 '노동자문화운동연합'의 영화분과 회원으로 '<파업전야> 공투위' 산하 '연구위원회'에서 활동한다. "당시 연구위원회에 변재란, 남인영(영화평론가, 동서대 교수), 이순진(영화사 연구자), 김영덕(부천영화제 프로그래머) 등이 함께 했었다"며 "러시아 몽타쥬 영화, 이태리 네오리얼리즘 영화, 제3세계 영화론 등을 공부했다"고 회상했다.
주유신은 영화 입문에 대해 "아카데믹한 동기와 운동적 실천이라는 서로 다른 경로를 통해서였지만, 조금은 드라마틱한 20대 삶의 후반부를 장식했고 1990년대 후반 이후 30대 중반부터는 '시네페미니스트'라는 정체성과 책임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재야 독립영화와 충무로 상업영화의 조화
▲2001년 3회 서울여성영화제 여성영화인의 밤 행사 모습. 우측부터 변재란, 심재명, 이혜경, 한명숙 당시 여성부 장관서울국제여성영화제
여성 영화인들이 결집했던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2000년 이후 여성영화운동의 역량이 강화되면서 2008년부터 여성문화예술기획에서 독립했고, 여성영화창작의 중요함 플랫폼으로서 본격적인 여성영화 중심 영화제로 거듭난다.
여성영화운동은 기존의 영화운동과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는데, 가장 핵심적인 것은 독립영화와 충무로의 상업영화가 조화를 이뤘다는 점이다. 영화운동이 초기 제도권인 충무로 영화를 비판하며 대치 전선을 형성했던 것과는 다른 흐름이었다.
바리터, 한국영화아카데미,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여성영화인모임 등에서 폭넓게 활동하고 있는 김영(프로듀서, 미루픽쳐스)은 "영화운동에서 여성영화운동은 충무로 제도권과 충무로 밖 비제도권을 모두 아울렀고, 새로운 영화에 대한 지향과 운동으로서의 영화도 모두 포괄한 특징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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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끼리 모였으니...', 그 말에 분노했고 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