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씨네마테크 1/24 홍보물
김희진 제공
씨네마테크 1/24은 '부산씨네클럽 안에서만 활동하지 말고 일반 시민들과 함께할 시간을 만들어 보자'는 취지로 마련됐다. 김희진은 "예술영화의 대중화를 위해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한국어자막을 넣고 상영회를 시도했다"고 말했다.
비용은 당시 대학생이던 세 사람이 휴학한 사실을 숨긴 채 집에서 대학 등록금을 받아온 것으로 준비했다. 김희진에 따르면 군에서 제대한 후 1992년 연말에 장소 계약을 했고 1993년 3월에 남천동에서 개관했다. 씨네마테크 1/24은 회원제로 운영됐는데, 비디오 2000편 정도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주호가 제일 먼저 대표를 했고 1994년까지 2년 정도를 고영수 김희진 순으로 대표를 맡았다. 표면적으로는 대표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3인 공동운영 체제였다.
씨네마테크 1/24는 비디오를 통해 해외의 예술영화를 상영하고 영화강좌를 개설하는 식으로 운영됐다. 부산지역 최초의 민간 시네마테크였다. 1991년 이언경(작고), 이하영(프로듀서)이 중심이 된 서울의 '영화공간 1895'가 민간 시네마테크의 길을 연 것처럼 부산에서도 같은 성격의 공간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1994년 8월에 운영위원으로 활동에 참여했고, 김희진에 이어 대표를 맡은 양정화(프로듀서, 영화사 해밀 대표)는 "대표로서 상영영화 기획, 시간표 작성, 재정, 회의 참석, 회원관리 등을 맡았다"며 "보고 싶은 영화를 보여주는 것이 주된 활동이다 보니, 당시 필요한 비디오는 해외에서 구입하거나, 아니면 저작권 개념 없던 때라 복사를 했고, 내용은 자체적으로 번역해 자막을 입혔다"고 말했다.
또한 "영화비평강좌를 개설했는데, 강사는 이용관, 이효인, 오석근, 김지석, 전수일 등이었고, 전수일(감독은) 씨네마테크 1/24 운영에 사비를 지원해 주기도 했다"고 기억했다. 이어 "단편영화 제작시도도 있기는 했으나, 주로 전수일 감독의 제작사 동녘필름에 스태프로 참여해 제작 경험을 쌓았다"고 덧붙였다.
김희진은 "씨네마테크 1/24를 함께 시작한 고영수가 복학할 때 이용관이 등록금을 빌려주기도 했다"면서 "민규동 감독이 부산에서 카추사로 군 복무를 할 때 시네마테크 1/24에서 비디오를 빌려가기도 했고, 강소원(영화평론가.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 박상훈(촬영감독), 이승진(영화의전당 시네마테크 팀장) 등이 중심을 이뤘다"고 말했다. 운영은 지역 여러 대학 출신들이 골고루 섞여 운영을 담당했고, 직장인이나 일반인 회원들도 있었다.
양정화 이후 우정태(감독, 전 부산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가 대표를 맡았는데, 이때는 청소년 비디오 워크숍을 진행했고, 여기에 하니영상 조성봉(감독, <레드헌트> 연출)이 합류한다. 당시 조성봉 감독 작업실 장비가 좋은 데다, 편집이 가능해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조성봉은 1997년 제주 4.3 항쟁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레드헌트>를 제작했는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돼 구속될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었다.
우정태는 부산독립영화협회가 펴낸 <부산독립영화작가론-독립영화 계보그리기, 첫줄>(2004년 발간)에서 '씨네마테크 1/24은 크고 작은 대내외영화제를 통해 서구 예술영화의 대중적 보급을 활동의 중심에 두고, 학교와 연계한 영화 강좌와 디지털로 만들어진 단편들을 상영하는 언더그라운드 캠코더 영화제 등을 병행했다"고 밝혔다.
가장 오랜 기간 활동한 강소원(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은 "학부 때는 영화를 전공한 게 아니어서 대학원에 진학에 영화를 공부하던 때였다"며 "영화를 보러 가거나 비평강좌를 맡기도 했고, 영화를 소개하는 팸플릿 자료와 영문으로 된 책 번역 작접도 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비디오로 작은영화제도 진행했다. 당시 부산에서 연극영화과가 경성대밖에 없다 보니 경성대 영화과 학생들이 주를 이뤘다"고 말했다.
씨네마테크 1/24은 1996년까지 남천동에 있다가 이후 부산대로 옮겨갔고, 2003년까지 운영된다. 강소원은 "어떤 책임을 맡아서 한 것은 아니다 보니 2000년 이후까지 긴 시간 활동을 했었다"며 "활동이 마무리될 무렵 비디오테이프를 정리하는 작업을 맡았고, 공간을 빌려 테이프를 보관했는데, DVD가 나오던 시점이라서 비디오테이프를 찾아볼 필요성이 점차 약해졌다"고 기억했다.
이에 대해 김희진은 "해체 이후 부산독립영화협회 공간 등에서 보관하던 비디오테이프는 또따또가센터 활동을 시작하며 만든 '영화공간 보디드문'으로 옮겨와 보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시네마테크에서 활동했던 김희진(감독), 양정화(프로듀서)또따또가센터,권경원
양정화는 "씨네마테크 1/24이 1996년 부산영화제가 시작됐을 때 함께 동참했다"며 "영화보기 운동으로 예술영화 관객 측의 저변 확대에 경험과 네트워크가 있었던 게 장점으로 생각돼 씨네마테크 1/24이 1회 부산영화제 자원봉사팀을 맡았다"고 밝혔다.
씨네마테크 1/24은 이후 부산독립영화협회(부독협) 결성에 바탕이 됐다고 한다. 김희진은 "문화학교서울이 한국독립영화협회 결성에 바탕이 됐듯 '씨네마테크 1/24'도 1999년 부산독립영화협회가 만들어 지는 데 역할을 했다"면서 조성봉, 이성철 감독이 초대 공동대표를 맡을 때 내가 사무국장을 맡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강소원은 "씨네마테크 1/24이 부독협으로 이어졌다기보다는 이후 부독협과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등으로 부산의 영화문화를 전반적으로 확장 시키는 역할을 했다"면서 "부독협은 동녘필름에서 활동하던 박지원, 김희진, 김휘, 김백준, 박성남, 전인룡 감독 등이 독립영화협회 설립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해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밝혔다.
부산씨네클럽과 씨네마테크 1/24로 이어진 활동들은 운동으로서의 영화가 아닌 새로운 영화에 초점을 맞췄다는 것이 특징이다.
오석근은 "부산씨네클럽은 순수하게 영화에 집중했다"고 말했고, 양정화는 "나는 학생운동을 했으나, 씨네마테크 1/24에 민중운동적 성향은 없었다"고 밝혔다. 방추성은 "사실 이용관 김지석 등은 보수적인 분들인데, 다만 심성이 바르고 정의로운 분들이다보니 항상 불의에 당당하게 맞서 나갔기 때문에 진보적으로 보인 면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렇다고 부산에서 사회변혁운동으로서의 영화를 지향했던 활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부산영화운동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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