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부산국제영화제 기자회견
부산영화제 제공
서울을 제치고 부산영화제가 닻을 올릴 수 있었던 데는 영화제에 대한 전문성과 함께 다양한 인맥 등도 작용했다. 특히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은 영화학자로서 영화평론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김지석은 저서 <영화의 바다 속으로>에서 "이용관, 전양준은 1980년대부터 한국영화계와 평론계에서 활동하며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해 왔고, 이 네트워크 덕분에 부산영화제는 폭넓은 국내외 영화계로부터 폭넓은 지지와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용관은 "영화제는 평론가들이 중심이 돼야지 제작자들이나 감독 등은 자신들의 작품을 우선할 수 있다"라며 "도쿄영화제가 부산영화제에 뒤처진 이유도 제작자들이 영화제를 운영하면서 자신들의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애쓰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전양준은 1970년대 말부터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다니며 새로운 영화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구축했던 초기 영화운동의 중심이었다. 전찬일(영화평론가. 전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은 "대학 시절 영화 세미나에서 전양준의 지도를 받았다"고 말했다.
1980년대 <프레임 1/24> <열린영화> <영화언어>의 발행과 편집을 맡았고, 다양한 영화이론서를 펴내 주목받았다. 1985년 계간 <열린영화>에 쓴 '작은영화는 지금'에서 8mm, 16mm 영화에 대해 '작은 영화'라고 정의하며, '구호가 아닌 실천으로 연결해야 한다'는 지향점을 제시했다. 1985년 영국에 유학해 런던영화제 등에 참가하며 영화제에 대한 여러 경험과 전문성을 쌓았고 풍부한 해외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몇 안 되는 국제영화제 전문가였다.
신동기(신톡 감독)는 "1993년 전양준에게 서울국제영화제 구상을 이야기했던 것은 영화제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고, 전문가이기 때문이었다"며 "당시 왜 여건도 안 좋은 부산에서 영화제를 하려고 하냐?고 묻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오석근(전 영화진흥위원장)과 함께 부산 영화운동의 대표주자였던 김지석은 부산대 영화연구회와 부산씨네클럽 등 부산에 기반을 둔 활동을 중시했다. 대학원을 다닐 때도 서울로 통학했고, 부산을 벗어난 영화제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던 철저한 '부산주의자'였다. 부산에서 촬영한 이명세 감독 <지독한 사랑> 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오석근을 부산영화제 준비에 합류시킨 것도 김지석이었다. 오석근은 "김지석의 꼬임에 넘어간 것이었다"고 말했다.
신강호(영화평론가. 대진대 교수)는 "부산 경성대로 강의를 오면 이용관 교수가 광안리에서 회를 사줬다"며 "부산에도 프랑스문화원에서 영화를 보는 이들이 있다고 해 김지석을 소개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김지석이 부산영화제의 설계자였고, 영화제에서 진행하는 각종 프로그램의 이름 등 세세한 부분들이 김지석의 손을 거쳐 결정됐다"고 덧붙였다.
김지석은 저서 <영화의 바다 속으로>에서 "이용관이 경성대 교수였고, 전양준이 경성대로 강의하러 내려오는 날은 오석근 등 네 사람이 술자리에서 영화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였다면서 다음날 새벽에야 끝을 보는 날이 허다했는데, 술을 전혀 못 하는 나는 고역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용관은 "영화제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자 김지석이 못 먹는 술을 벌컥 들이마셨던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부산영화제 선장 김동호
영화평론가들이 중심이었던 부산영화제 기획 과정에서 행정관료였던 김동호(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를 집행위원장으로 영입한 것은 묘수였다.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 등은 영화 전문가들로 전체적인 운영을 책임지기 어려웠다. 행정적인 부분과 예산 마련을 위해서는 총괄할 사람이 필요했다. 김지석은 <영화의 바다 속으로>에서 "영화제 밑그림을 그리면서 선장을 영입하기로 했고, 후보는 자연스럽게 김동호로 압축됐다"고 회상했다.
1995년 8월 18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김동호와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 3인이 마주하게 된다. 김동호는 2011년 국민일보에 연재한 '김동호의 씨네마 부산'에서 "처음에는 망설였다"며 "이유는 영화제를 만들겠다는 젊은 사람들 말만 믿고 참여했다가 망신만 당했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김동호에 따르면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륜) 위원장이던 1994년 9월 어느 대학 영화과 교수의 요청으로 '국제에버그린영화제' 조직위원을 맡게 된다. 에버그린영화제는 환경영화제로 그린스카우트, 환경관리공단, 신명기획이 중심이 된 서울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가 준비한 행사였다.
공륜위원장이 영화제에 관여하는 게 부적절해 보일 수도 있었으나 전국극장연합회 강대진 회장, 서울시극장협회 곽정환 회장, 한국영화협동조합 강대선 이사장 등에게도 조직위원 참여를 부탁했고, 가장 우려하고 있던 초청 영화에 대한 공륜 심의 면제를 약속한 상태였다.
그런데 1994년 10월 29일 개막을 예정했던 국제에버그린영화제는 직전에 취소된다. 동아일보는 1994년 10월 24일 자 기사에서 "영화제 집행위 측이 '공륜 심의와 관련 해외 출품 관계자들이 이미 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작품들에 대해 사전 심의를 하겠다는 것은 모독이라며 반발한 데다 영화제 개막 후 출품자가 작품을 직접 가지고 오는 상황에서 심의를 위한 해외 작품 일괄 제출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밝혔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김동호는 "앉은 자리에서 벼락 맞듯 황당하기 짝이 없었고, 해명할 여유도 없었다"며 "취소의 주된 이유는 스폰서를 구하지 못한 채 졸속으로 추진했기 때문으로 국제적 망신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1년 만에 또다시 젊은 교수들에게 비슷한 제의를 받다 보니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 사람의 집요한 설득에 승복하게 되다. 김동호는 "그들의 말에서 뜨거운 열정을, 표정에서 굳은 의지를 읽었다"며 "5억 원을 지원받는다면 거기에 조금만 보탤 경우 국제영화제를 개최할 수 있겠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1974년 정부를 대표해 북한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김동호 당시 문공부 보도국장(왼쪽)
국가기록원(문공부)
문화공보부(문공부. 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최장수 기획관리실장을 지냈고 영화진흥공사 사장, 문공부 차관,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김동호는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독재가 이어지던 시절 문화공보부에서 촉망받던 유능한 관료였다.
매일경제는 1973년 12월 10일 자 기사에서 "보도국장에 임명된 김동호는 문공 행정의 엘리트"라고 소개했다. 이어 "61년 문공부에 발을 디딘 후 공을 쌓아왔고, 문예 중흥 5개년 계획의 성안은 빛나는 업적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1972년 근정포장 홍조근정훈장을 받을 만큼 문공행정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고 호평했다.
군사독재 대변했던 문공부 엘리트
하지만 그만큼 명암도 엇갈린다. 문공부 엘리트 공무원으로서 당시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사독재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했기 때문이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에 이어 유신체제를 구축한 박정희 군사독재의 중앙정보부는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관련자 180여 명이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한다. 유신독재에 항거한 민주화운동 탄압이었고, 윤보선 전 대통령,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김동길 교수, 김찬국 교수 등이 유죄 판결을 받고, 이철(전 코레일 사장), 유인태(전 국회의원) 등은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이를 북한이 비난하자 1974년 7월 19일 당시 문공부 대변인으로 정부 대변인 역할을 맡았던 김동호 보도국장은 "북한공산집단은 그들이 통일전선전략의 일환으로 배후조정했던 민청학련 사건의 공판이 열리자 노동신문, 평양방송, 통혁당 방송과 각종군중대회 등을 총동원하고 심지어는 모스크바, 북경방송까지 이용 우리 정부에 대한 비방 중상에 광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반독재 투쟁을 북한의 사주로 규정한 것이었다.
1975년 자유언론수호에 나선 동아일보가 박정희 독재의 광고 탄압을 받을 때는 문공부 실무자이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1975년 2월 26일 자 기사에서 "2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동아일보 광고탄압사태에 대해 문공부 대변인을 맡고 있던 김동호 보도국장은 '나로서는 아는 바 없으며 알 수도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문공부는 영화사와 극장 측에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지 말도록 종용했고, 유신체제 홍보를 위해 41개 주요국가에 파견된 해외 공보관들은 동아 사태와 관련 주재국 홍보활동상의 고충을 피력해 오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또한 동아일보 1975년 3월 7일 기사에 따르면 기자협회에서 발행하던 기자협회보가 조선일보 기자 해임 소식을 호외로 발행한 직후로 폐간될 때, 사전에 전화로 폐간을 경고한 것도 김동호 보도국장이었다.
1976년 3.1 명동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정부를 대신해 민주화 요구에 대해 비난 입장을 발표했다. 3.1 명동사건은 3월 1일 오후 6시 7백여 명의 신자들이 참례한 가운데 20여 명의 사제가 공동 집전으로 미사를 봉헌한 후 개신교 목사 재야인사들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문을 낭독한 민주화투쟁이었다. 함세웅, 김승훈 신부 등 7명의 관련 사제가 전원 구속된 초유의 사건으로 독재체제를 공고히 하던 박정희 유신독재는 성직자 구속이라는 무리수로 지탄을 받는다.
그러나 3.1 명동사건에 대해 당시 김동호 보도국장은 박정희 독재정권을 대신해 "종교의식에 편승 악용하여 정부 정복을 선동한 사건이 발생한 것에 유감이고, 반정부 정치세력들이 총화와 안정을 바라는 국민적 여망과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헌법 16조의 기본정신을 무시하고 헌법 질서를 유린하는 불법행위를 자행했다"고 비판했다.
한겨레신문 1988년 11월 8일 기사에 따르면 1980년 군사쿠데타와 광주학살로 등장한 전두환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입법회의에서 언론기본법을 마련할 때 실무작업을 한 5인은 김동호 기획관리실장을 비롯해 허문도 전 청와대비서관, 이수정 전 청와대비서관, 허만일문공부 공보국장, 박용상 판사 등이었다. 언론기본법은 전두환 군사독재의 대표적인 언론통제법이었다.
문화공보부 퇴직 후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재직할 때는 1989년 한국영화아카데미 6기 재학생들의 졸업 작품을 사전 검열해 반발을 사기도 했다. 전대협 대표로 방북했던 임수경 가족 등을 소재로 영화 등 3편의 졸업 작품 제작을 막은 것이었다. 당시 장기철(감독. 한국영화아카데미 6기)은 1990년 졸업식 때 상복을 입고 나와 항의문을 낭독하고 김동호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1991년에는 홍기선(감독)의 첫 작품이었던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를 영화진흥공사 창작지원작으로 선정했다가 며칠 만에 번복하면서 정치적 탄압 논란을 일으켰다.
▲1990년 한국영화아카데미 6기 졸업식에서 모인 학생과 지인들. 당시 영화진흥공사의 검열에 항의한 장기철 등 학생들이 강의실에 창작자유를 써 놓은 칠판 앞에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장기철 제공
하지만 문공부를 나와 1988년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사장으로 임명된 이후, 문공부에서 언론 담당으로 있으며 맡았던 '악역'에서는 벗어난다. 물론 한국영화아카데미 검열과 홍기선 감독 탄압은 오점이었으나, 공직 경험을 바탕으로 능력을 발휘해 영화계에 큰 도움을 주는 캐릭터로 바뀐 것이다.
1988년 임권택 감독 <아다다>가 몬트리올영화제 수상 후보에 오르자 현지에서 한국의 밤 행사를 주관했고, 교민들에게 시사회 참석을 요청하며 여우주연상 수상을 측면지원했다. 1989년 모스크바영화제에 임권택 감독 <아제아제 바라아제>가 초청될 수 있었던 것도 김동호가 당시 소련 측 인사와 친분을 갖고 있었던 게 작용한 것이었다.
영화인들의 인심을 얻은 대표적인 공적은 1991년 숙원사업이었던 남양주종합촬영소 착공이었다. 정진우 감독은 "역대 영화진흥공사(영화진흥위원회) 사장 중 김동호의 능력이 가장 뛰어났다"며 남양주종합촬영소 건립의 공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90년 남양주종합촬영소를 건립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당시 국고지원이 필요했으나 쉽지 않은 상태였다. 유명배우들까지 동원해서 정부 쪽에 요청했지만 불가능하다는 입장만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영화진흥공사 사장이었던 김동호가 정부 요직에 있던 관료들에게 일일이 연락해 도움을 요청했다. 예전에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던 인사들이었다.
김동호의 부탁에 당시 정부 예산 담당자가 수백억 예산을 편성하라고 지시하면서 남양주종합촬영소 문제가 풀린 것이었다. 이후 영화진흥공사 사장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으로 여러 사람이 거쳐 갔으나, 김동호만큼 예산확보 능력을 갖춘 사람은 없었다."
정진우 감독은 "1992년 이수정 당시 문화부 장관이 '문화부 차관으로 어떤 사람이 좋을지 떠오르는 인물이 있냐'고 물어와서, 김동호가 관료 출신이라 조직 관리도 능숙하고 일도 잘하지 않냐고 했었는데, 여러 곳에서 좋은 이야기가 있었는지 실제 차관으로 임명됐다"고 말했다.
검열 완화한 공륜위원장
김동호(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를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모시자고 한 것은 김지석이었다. 이용관은 "당시 정지영 감독 등은 임권택 감독을 추천했는데, 김지석이 김동호 위원장을 추천했다"고 기억했다. 이어 "전양준이 찬성하자 오석근, 박광수도 찬성했다"며 "오석근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재학시절 김동호 위원장이 영화진흥공사 사장이었던 인연 때문에 찬성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모두가 찬성하면서 이용관은 김동호 위원장과 연락해 프라자호텔 약속을 잡게 된다. .
당시 김지석이 김동호를 집행위원장으로 적극 추천한 이유는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공륜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보인 소신 있는 행동'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이용관은 "김지석에게 추천한 이유를 물었더니 공륜 이야기를 꺼냈다"고 기억했다.
검열기관으로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던 공연운리위원회(공륜)는 영화계 안팎에서 온갖 비난을 받던 적폐 기관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요구가 커지던 시기에도 검열의 칼을 휘두르던 구시대의 잔재로 한국영화 발전의 걸림돌이었다.
김동호 공륜위원장 재임 시절에도 검열 문제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제기됐다. 그러나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면서 개선을 위한 노력이 엿보였다. 김동호는 "영화진흥공사에 있다가 영화를 심의하는 공륜으로 옮겨오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면서 "하지만 심의 역시 영화를 진흥하기 위해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가능하면 문제가 되는 장면들도 그대로 상영될 수 있도록 결정을 내리곤 했다"고 회상했다.
▲영화진흥공사 사장 시절 김동호.
성하훈
대표적인 것이 1993년 <크라잉 게임>의 검열 최소화, 1994년 수입 금지였던 <데미지>의 개봉 허용, 1995년 <올리버 스톤의 킬러>의 수입 허가 등이었다. <크라잉 게임>은 성기 노출 장면이 잘리지 않았는데, 성기 노출을 금지하고 있었던 당시 규정에서 이례적이었다.
김동호는 "영화를 구성하는 정말 중요한 장면이었기 때문에 살려야만 했고,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할 정도로 의미 있는 영화였다"고 설명했다. 비록 수초 분량이 1초 미만으로 짧게 순식간에 스치는 식으로 심의를 통과했으나, 삭제가 안 된 것 자체가 예전 공륜과는 다른 것이었다.
심의위원으로 당시 20대였던 김영(제작자. 미루픽쳐스 대표)을 발탁한 것은 파격이었다. 원래는 바리터 출신으로 유학을 다녀온 김소영(영화평론가. 한예종 교수)을 영입하려다 한예종 교수를 맡게 되면서 김영을 선임한 것이었다.
바리터에서 여성영화운동을 했고, 1993년 여성영화제 주최와, 충무로 조연출 등을 거친 김영의 등장은 낡은 기관이었던 공륜의 변화를 위해 애쓴 김동호 위원장의 노력을 상징했다, 김영은 공륜이 민감한 결정할 때 김동호 위원장을 적극 도왔는데, "당시 한국영화를 심의할 때는 거의 전운이 감돌았다"고 회상했다.
공륜을 바꾸기 위해 애썼던 김동호는 수입을 허가한 <쇼군 마에다>가 논란이 되자 1995년 3월 2일 공륜위원장에서 물러났다. 미국영화지만 일본영화와 다름없다는 언론의 비판 보도가 원인이었다.
당시 일본영화 수입이 막혀 있던 때, 공륜이 사실상의 일본영화 수입을 허가했다는 비판이었는데, 영화제작사, 각본, 감독이 모두 미국인이었고, 주 무대가 스페인이었다. 일본 막부시대가 배경이라는 이유로 이중국적 일본영화라는 주장은 무리가 있었으나, 미련 없이 사표를 낸 것이다.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수락한 김동호는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작품 선정 등 전문성 있는 작업은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 등에게 일임하고, 영화제 운영에 필요한 예산확보에 전력을 기울였다. 영화진흥공사 사장 시절부터 보여준 탁월한 예산확보 능력은 초기 부산영화제가 안착하는 데 큰 힘이었다.
폭넓은 인화력과 다양한 인맥을 동원해 예산 마련을 위한 후원 행사를 열어 서울극장 곽정환 대표와 김지미 배우 등 당시 충무로 주류가 선뜻 거액의 후원금을 내놓도록 유도한다. 부산영화제가 국고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김동호의 능력이 발휘된 덕분이었다.
공직 사회 구조를 잘 알고 있었기에 당시 문정수 부산시장과 정기적으로 만나 영화제 준비 작업에 대한 결재가 빠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했다. 담당 공무원들이 일을 더디게 처리해 영화제 준비에 지장을 받는 상황을 최소화한 것이다.
영화운동의 결집
부산영화제는 1996년 6월 4일 조직위원회를 출범시키며 본격 준비에 들어간다. 김동호 집행위원장을 필두로 부집행위원장은 영화제 준비 과정에 함께했던 박광수(감독)가 맡게 된다.
이용관은 "박광수(감독)가 부산 경성대로 특강을 몇 번 오면서 영화제를 만드는 데 함께하기로 했다"며 "해외영화제 초청을 받고 수상을 하면서 영화제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고, "준비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전양준이 월드시네마 프로그래머를 담당했고, 김지석은 아시아영화 프로그래머를 맡으며 역할 분담이 이뤄졌다. 사무국장은 오석근이었다. 당시 한국영화프로그래머를 맡았던 이용관은 "나는 뭐하면 되냐고 물었더니 박광수가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를 맡으라고 했다면서, 처음에는 그게 무슨 역할인지도 정확히 몰랐다"고 말했다.
▲김지석, 전양준, 박광수부산영화제 제공
영화제 실무를 담당할 스태프는 중앙대, 경성대 등의 영화전공 학생들을 비롯해 독립영화 쪽에서도 충원했다. 서울영상집단 대표였던 홍효숙(전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은 와이드앵글을 담당했고, 얄라셩 대표와 대학영화연합을 거쳐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정미(부산영화제 커뮤니티비프 프로그래머)는 월드시네마 코디네이터 역할이었다. 예술영화 관객 확대에 경험이 있었던 부산 씨네마테크 1/24 대표 양정화(프로듀서. 영화사 해밀 대표)는 자원봉사팀을 이끌었다.
1980년 이후 오랜 시간 대학과 충무로, 재야 독립영화, 부산 등에서 구축된 영화운동 역량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모두 결합한 것이었다. 그리고 1996년 9월 13일, 마침내 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막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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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시절 악역→한국영화 주연, 부산영화제 수장이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