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앙씨에'를 운영했던 손주연 대표
손주연 제공
씨앙씨에는 크고 작은 영화제를 활발하게 진행한다. 1993년 1월 9일~31일까지는 '세계영화 베스트10' 감상회를 개최해 주목을 받았다. 당시 영화전문지 사이트 앤 사운드가 전 세계 영화평론가 및 영화감독들에게 의뢰해 10년에 한 번씩 10편의 영화를 선정한 것으로 오슨 웰스의 <시민 케인>, 장 르노아르의 <게임의 규칙>, 오즈 야스히로의 <동경이야기>, 앨프리트 히치콕의 <현기증> 세르게이 에이젠스테인의 <전함 포템킨>, 스탠리 큐브릭의 <2001년> 등을 상영했다.
1994년에는 검열영화 원작 감상회인 커트영화제 '검열과 영화'를 마련해 시선을 끌기도 했다. 1994년 3월 15일~10일까지 <칼리큘라>, <베티블루>,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도어즈>, <아이다호>, <1990> 등의 상영회를 기획했는데, 당시 검열기관이었던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과정에서 일부가 잘린 작품들이었다.
하지만 공연윤리위원회는 커트영화제가 공연법을 위반했다며 상영을 중지시키도록 종로구청에 통보했다. 6편의 비디오테이프가 압수되는데, 이 과정에서 북한영화가 발견되면서 손주연은 종로경찰서에 연행돼 조사를 받게 된다. 검열된 작품을 제대로 보려던 게 오히려 공안사건으로 비화될 위기에 처했던 것이다.
손주연은 "당시 필름이나 비디오테이프는 개인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받거나 프랑스, 독일, 일본문화원의 도움을 받기도 했는데, 북한영화는 어떤 경로로 들어왔는지 몰랐다"며 "영화공간1895에서 왔을 수도 있다고 생각돼서, 당시 복사본을 만들어 놓고 원본은 감춰 놓았는데, 복사본을 빼앗기게 된 것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경찰은 손주연에게 '인생 종 치고 싶냐'며 윽박지르면서 조사를 진행했다고 한다. 그러나 운동권 출신도 아닌 데다 관람권을 판매한 것도 아니었고,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행사라는 항변에 특별한 혐의점을 찾지 못하면서 훈방한다. 손주연은 "운 좋게 나왔다"며 "탄압에도 불구하고 커트영화제는 회원들을 대상으로 예정대로 진행했다"고 말했다.
문제가 됐던 북한영화는 손주연의 추측대로 영화공간1895에서 왔던 것이었다. 이하영은 "영화공간1895에서 일본을 통해 소련(현 러시아) 영화 등을 구입하는 과정에서 함께 구한 것이었다"며 "재일조선인총연합(조총련) 쪽을 통해 받았던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이어 "<어머니, 당신의 아들> 상영으로 연행될 때 경찰이 다른 비디오 자료를 확인한 것이 아니었기에, 훈방된 후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위험할 수 있는 자료들은 따로 보관했다"며 "아마도 이 자료가 씨앙씨에로 넘어갔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덧붙였다.
씨앙씨에는 1993년 4월 명륜동에서 인근 동숭동 대학로의 한 갤러리 지하로 이전했고 1994년에는 압구정동으로 옮겨갔다가 1995년에 마무리하게 된다. 손주연은 1994년 씨앙씨에 운영을 친구에게 부탁한 후 백두대간에 일하게 된다. 이광모 감독(백두대간 대표)이 손주연과 정태성(전 CJ 이엔엠 영화부문 대표)에게 해외 예술영화를 제대로 해보자며 상업적으로 수입하고 극장해서 상영하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손주연은 생각해 보면 "이광모 감독의 꼬임에 넘어간 것이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이어 "백두대간에서 처음으로 개봉한 <희생>이 3만8000명 관객을 동원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전 세계에서 개봉 기록으로는 최다였다고 들었다"며 이후 "백두대간에서 동숭아트센터와 공동으로 동숭시네마테크를 만들어 성공적으로 운영한 건 큰 보람이 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친구에게 운영을 넘긴 씨앙씨에 관리가 안 되면서 손주연이 직접 정리하게 된다. 1000편이 넘던 모든 자료를 한신대 영상자료실에 넘기면서, 영화공간1895를 이어 1990년대 시네마테크 운동의 초석이 됐던 씨앙씨에는 마무리된다.
손주연은 "씨앙씨에를 운영하면서 한 영화제마다 잘 됐고, 부산영화제가 시작되기 전이라 전양준(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등이 강의를 해줬다"면서 "1996년 이손기획을 차린 후 영화제가 너무 하고 싶어 1999년 당시 종로 코아아트홀에서 프랑스걸작단편영화제를 열었다"고 말했다. "당시 부산영화제 김동호 집행위원장이 내빈으로 참석해 감격했던 기억이 난다"고 덧붙였다.
▲'록키호러픽쳐쇼' 공연 당시 손주연(왼쪽) 이손기획 대표와 출연 배우들
손주연 제공
손주연은 1993년 6월 이언경, 이향, 김영 등과 4명이 최초의 여성영화제인 '페미니즘필름페스티벌'을 개최해 책으로만 보던 페미니즘 영화를 국내에 소개했다. 백두대간을 나온 이후 강남 씨네하우스 아트관 개관 작업을 맡기도 했고, <록키 호러 픽쳐 쇼> 등 영화상영과 퍼포먼스, 연극을 결합한 행사를 기획했다.
그는 이후 이병헌과 전도연이 주연한 <내 마음의 풍금>(1999)과 이정향 감독의 <집으로>(2002) 마케팅을 담당했으며, 2002년 이손필름으로 회사명을 바꾼 뒤에는 오랜 꿈인 첫 영화제작에 나서 2003년 배두나 주연의 <봄날의 곰을 좋아하세요?>를 제작했다.
<암살> <도둑들>을 만든 최동훈 감독은 2012년 9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대학 2학년 때부터 교내 영화동아리 '영화공동체'에서 활동하면서 비디오 시네마테크 '문화학교 서울' '씨앙씨에' 등을 제집처럼 드나들었다"며 "이른바 B자 비디오를 틀어주던 그곳은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을 때 안식처이자 꿈의 산실로 (비디오를) 미친 듯이 봤다"고 밝혔다.
이어 "선배들이 권하는 영화는 무조건 봤고, 그때는 몰랐는데 훗날 진가를 깨달은 <재와 다이아몬드>(감독 안제이 바이다) 등도 그때 본 작품"이었다면서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감독으로 알프레드 히치콕과 마틴 스코세이지를 꼽았다.
문화학교 서울의 태동
영화공간1895와 씨앙씨에와 함께 시네마테크 운동에서 또 다른 축을 담당했던 것은, 최동훈 감독이 대학 시절 제집처럼 드나들었던 문화학교 서울이었다.
3년 정도 운영됐던 영화공간1895와 씨앙씨에와는 달리 문화학교 서울은 긴 생명력을 유지했고 2000년 이후 한국영화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독립영화의 토대 역할을 한다. 한국 독립영화와 시네마테크 운동의 조직화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면서 선도한 점은 특별하다.
문화학교 서울의 출발은 1991년 5월이었다. 한의사인 시네필 최정운이 사당동에 있는 자신의 한의원 건물에 개설하면서 시작됐다.
▲문화학교 서울을 시작한 최정운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대표
서울아트시네마
최정운은 경희대 재학시절 아마추어 영화제작단체인 '한국영상작가협회'에서 직접 8mm 영화제작을 경험하면서 영화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고 한다. 유현목 감독이 만든 소형영화작가협회에서도 활동하면서 회원들과 카메라를 들고 촬영을 나가 시나리오도 쓰고 연출도 하고 연기도 하면서 필름을 들여다보는 일이 재밌었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것도 좋아했지만 찍는 것이 더 좋았던 최정운은 1980년대 말 시나리오를 한번 써보겠다고 시나리오 강좌를 수강하게 된다. 이때 만난 사람들과 함께 1991년 '문화학교 서울'을 설립하게 된다.
최정운에 따르면 초기 멤버는 현재 곽용수, 전창수, 정민택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시네마테크를 해보겠다는 명확한 지향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1991년과 1992년에는 주로 영화 스터디 모임을 진행했고, 93년 첸카이거, 장이모 등 중국 제5세대 감독들의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시네마테크로서의 정체성을 강화한다.
최정운은 "문화학교 서울이 시작할 때는 추억영화모임이 있었고, 나이 든 분들도 모였으며, 유현목 감독님 영향을 받은 것도 있다"며 "당시 보유하고 있던 비디오테이프 등이 200~300편 정도였는데. 자막을 넣어서 정리했다"고 말했다.
또 "운영과 기획은 실무자들에게 맡겼다"면서 "운영위원은 곽용수(제작자, 인디스토리 대표) 이주훈(전 미디액트 부소장) 조영각(프로듀서, 인디그라운드 센터장) 김형석(영화평론가, 평창국제평화영화제 프로그래머) 등이었다"고 말했다.
2003년 10월 발간된 계간 <독립영화> 18호에 실린 곽용수, 조영각, 이주훈, 김형석 4인의 대담에 따르면 사무국장으로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곽용수는 1992년 단편영화 제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문화학교 서울에 참여했다.
곽용수(인디스토리 대표)는 "1992년에 전창수, 정민택 선배 등을 알게 됐고 단편영화를 찍기 위해 영화 스터디를 집과 학교에서 했는데, 이들 중 한 명이 문화학교 서울 최정운 대표님을 소개해줘서 알게 됐다"며 "영화를 찍으러 갔다가 단편영화 작업이 지지부진해졌고 공간이 있으니까 공간을 활용하자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왔다"고 말헸다.
이어 "1992년 처음 영화제를 시작했고, 1993년 중국 5세대영화제를 했는데 정말 드문 영화제였다"며 "번역이 안 돼 있어서 도성희(북경연예전수학원 교수)와 김의성(영화배우)이 성우를 하면서 영화를 상영했다"고 덧붙였다. 도성희는 여성영상집단 바리터의 회원으로 활동했었다.
최정운은 "영화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여러 어려움이 있었으나 좌석이 모두 차서 서서 보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반응이 좋았다"며 "영화에 대한 욕구와 관심은 큰데, 이를 해소할 공간이 없다는 현실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주로 비디오를 보던 공간으로 비디오테크로 인식되던 문화학교 서울은 시네마테크로서 역할을 강화하게 된다.
공권력 영향 받지 않아
▲'문화학교 서울' 사무국장을 맡았던 곽용수(인디스토리 대표), 운영위원이었던 이주훈(전 미디액트 부소장), 조영각(인디드라운드 센터장), 김형석(평창국제평화영화제 프로그래머)
인디스페이스,평창영화제,오마이뉴스
1993년 10월 동구권영화제 즈음에 이주훈(전 미디액트 부소장)이 합류했고, 이후 11월에 조영각(프로듀서, 인디그라운드 센터장)이 뒤를 따르면서 운영위원도 늘어난다.
조영각은 "1993년 3월에 제3세계 영화제를 보러 갔었고 정재형 선생(영화평론가, 동국대 교수) 강의도 듣고 후에 회원 가입하러 갔다가 운영위원을 모집한다고 해서 들어갔다"며 "곽용수가 혼자 있었다"고 기억했다.
이어 "문화학교 서울 초기인 1991년~1992년에는 제작집단을 지향하며 영화제작을 꿈꾼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면서 "1993년부터 시네마테크로서 기능을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운영위원은 한때 10인 이상이었다가 1995년 즈음 이후 6인 체제였다"면서 "이효선(출판인), 우명희(디자이너) 등이 함께했다"고 덧붙였다.
계간 <독립영화> 18호 대담에서 곽용수(제작자, 인디스토리 대표)는 "시네마테크라는 활동의 운동성을 부여하면서 1993년 8월부터 정기적으로 상영회를 하기 시작했다"며 "그때까지도 제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영화제 쪽으로 비중이 많이 실리면서 영화제에 대한 고민과 한국의 상황에서 시네마테크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고민했다"고 말했다. "당시는 자료도 거의 없었고 다른 단체와 부딪히며 한정된 자료를 가지고 영화제를 해야 했던 상황이었다"고 기억했다.
이주훈은 계간 <독립영화> 대담에서 "1993년에 문화학교 서울에 들어왔을 때는 정리가 잘 안 돼 있었다"며 "제작단체냐 아니냐로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영화제도 비정기적이었고 그러다 사람들을 모으면서 정기적인 영화제 체제로 전환이 됐다고 말했다. 또한 "자료정리와 체계적인 해설, 영화에 대해 정리를 하면서 맥락을 잡고 시네마테크 개념을 가져 나갔던 것 같다"면서 이렇게 회상했다.
"생각해 보면 영화를 봐도 그렇고 세계사적으로도 1992년과 1993년이 굉장히 미묘한 시기였다. 시네마테크 운동으로써 자리매김된 것은 1994년으로, 토론 프로그램도 진행했었다. 영화를 소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생산적인 뭔가를 만들어보자고 동의를 한 게 1993년 말이었다. 그 배경에는 영화 매체가 폭발적인 전파력을 가지고 있고 엄청난 무기라는 생각을 갖고 오게 것이다.
1980년 말에 대다수 학생운동권들이 영화판에 들어온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그 판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지만 이 판이 어떤 새로운 영토가 될 수 있음에 대한 기본적인 마인드 공유가 있었다. 서로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다 백그라운드를 확인하면서 그렇게 나갈 수 있었건 것 같고, 그러던 게 1994년 들어 시네마테크론으로 정립된 것 같다. 좀더 발전해서 제작, 배급, 시네마테크 이론 이렇게 분화된 건 1994년 말~1995년 초였던 것 같다."
이주훈은 "'영화를 읽자'가 문화학교 서울의 모토였다"면서 "'새로운 영화 읽기의 제안'이라고 1993년 말에 우리가 미약하게나마 가지고 있던 영화 읽기라고 하는 맥락이 1994년도에 정기적으로 영화제를 진행하고 토론 프로그램을 하면서 영화를 읽어야 한다, 그냥 본다가 아니라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졌다"고 밝혔다. 이어 "그게 당시로서는 중요한 개념이었고, 지금까지도 시네마테크를 지탱해 온 힘이었던 것 같다"고 강조했다.
문화학교 서울은 시네마테크의 역할을 강화하면서 1994년 <씨네필>을 발간한 데 이어, 영화 100주년을 맞았던 1995년에는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를 출간했다. 1996년에는 한국영화 연구모임 비상구 회원들의 평론을 모은 책 <한국영화 비상구>를 펴내기도 했다.
조영각은 "<씨네필>은 격주간지 형태로 4호까지 발간했다가 <씨네21>이 창간되면서 좌초했고,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는 1994년부터 기획을 시작해 8명 정도의 필자가 참여해 1년 정도를 준비했다"며 "당시 김홍준 감독이 쓴 <영화에 대해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을 밀어내고 베스트셀러 1위에 몇 번 정도 오르기도 했다"고 말했다.
▲문화학겨 서울에서 펴낸 책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
문화학교 서울
곽용수는 "다른 단체들과 나름대로 차별성을 갖는다면, 좋은 프로젝트로 상영하고, 프로그램을 짜는데도 일정 정도 도덕적인 게 있었던 것 같다"며 "목적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좀 더 안정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이고, 최정운 대표님의 안정적인 지원이 컸다"고 밝혔다.
또한 "다른 단체들이 공권력의 희생을 당했는데, 우리는 신기하게도 공권력의 영향을 받지 않았었다"고 덧붙였다.
최정운은 2010년 3월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경찰들이 수시로 찾아왔다. 뭐 처단하겠다기보다 정보 취합 차원에서 동태 파악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항상 하는 말은 '좋은 일 하시네요'였다"며 "당시 불법 복사 테이프를 틀 수밖에 없어 저작권법에도 걸리고 상영공간 허락도 제대로 받지 못해 항상 걱정이었다"고 밝혔다.
조영각은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이나 한국영화계하고 어떻게 교류를 맺을까 이런 걸 고민하면서 초청강좌도 열었다"며 "<유리>(1992) 만들었던 양윤호 감독이나, 박종원 감독, 이정국 감독 등 우리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 모셔다가 강연회를 열고, 인디포럼 이전에 독립영화 작가와의 대화라고 류승완, 장기석, 오점균, 김태일 감독 영화도 상영하고 그런 관심을 갖고 인디포럼도 하게 된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한국영화에 영향 미치는 관객 집단
경향신문은 1997년 3월 7일 자 기사에서 "하루 수십 명의 영화 애호가들이 들고나는 진귀한 영화창고로 국내 최대 규모의 사설 시네마테크'라며 '보유하고 있는 필름과 비디오의 양이 가장 많고 회원도 1000명이 넘는다"고 문화학교 서울을 소개했다.
특히 "국내에서 구하기 힘든 희귀작품들이 많아 감독 평론가 방송관계자들이 단골로 찾고 있고, 할리우드 영화에 길들여진 대중의 눈과 귀를 새롭게 일깨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다채로운 영화제로 로드무비영화제, 범죄영화제, 지루한 영화제 등을 열어 이색적인 주제로 일반인의 예술영화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영화상영 외에 비평세력과 영화인력을 키우는 것도 또 다른 목표로서 5개의 연구제작팀을 두고 영화이론연구, 단편영화제작 등 시네마테크로서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며 "관객 출신의 비영화전공자들이 이끌어 가고 있고, 운영위원 4명이 모두 영화를 보기 위해 문화학교 서울을 드나들던 회원들로 창립 5년 만에 한국영화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관객집단으로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당시 이주훈 제작소장은 "충무로의 영화감독 영화평론가들이 빠지기 쉬운 매너리즘을 아마추어 관객의 솔직한 시각으로 견제해 나가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1997년 경향신문 나온 '문화학교 서울' 기사. 경향신문
문화학교 서울은 영화계의 다양한 인재를 키운 터전이 된다. 인디포럼을 개최했고, 1998년 한국독립영화협회가 결성됐을 때는 조영각이 초대 사무국장을 맡았다.
문화학교 서울 이후 월간 <스크린> 편집장을 역임한 김형석(영화평론가, 평창국제평화영화제 프로그래머)은 계간 <독립영화> 18호 대담에서 "영화현장에 취재 가면 문화학교 서울에 영화 1~2편씩은 보러 왔었고 연인원을 따져보면 상당히 많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주훈은 "직접 계산해 봤다"면서 "어떤 해는 1년에 1만 1천 명이 찾았다"고 밝혔다.
곽용수는 "굉장히 폭발적인 시기에 모였던 사람들이 같은 목적의식을 갖고 만났다"면서 "젊은 시기에 그런 문제 의식을 갖고 있는 인자들을 배출하는 터가 됐다는 게 문화학교 서울 큰 의미"라고 강조했다.
이어 "다만 아쉬운 것은 큰 그림 속에 연구소와 제작소가 갖춰지고 시스템이 갖춰져 이런 큰 틀에서 원활하게 돌아가는 체계를 꿈꿨었는데 안 됐다"면서 "준비하고 엎어지면서 따로 활동 영역이 넓혀지면서 빠져 나간 거라고 생각을 하는데 이상적인 그림의 어떤 단체가 못 됐다는 게 아쉽다"고 말했다.
씨앙씨에 손주연은 "문화학교 서울과는 라이벌이기도 했으나 지향점이 다르다 보니 친하게 교류하며 지냈다"고 회상했다.
문화학교 서울은 2002년 1월 25일 전국의 시네마테크가 모여 결성한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결성에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 초대 회장은 최정운 문화학교서울 대표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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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장 없는 필름 강탈에 항의하자 연행...시네마테크의 수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