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패 꽃다림에서 활동한 최진호(감독)
최진호 제공
영상패 꽃다림은 1992년 이후 회원들이 하나둘 다른 진로를 찾기 시작했고, 1995년까지 유지된다.
최진호(감독, <집행자>)는 "1992년에 영상패 꽃다림에서 나온 후 노동자문예창작단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했고 거기에서 꽃다림 활동을 같이했던 양진일을 만났다"면서 "함께 노동자문예창작단의 영상분과 활동을 하며 현대지동차, 현대중공업, 현대정공 등 울산, 마창 중심의 노동현장을 촬영하고 이를 바탕으로 공연에 결합해 전국 순회를 다녔다"고 말했다.
이어 1993년 여름에 노동자문예창작단을 탈퇴하고 충무로 영화계로 들어간 것"이라고 회상했다. 노동자문예창작단은 당시 '가자 노동해방' '철의 노동자' 등 노래를 발표하며 민중운동 진영에서 큰 관심을 받았다.
안태영은 "1989년 시작부터 1992년 6월까지 대표를 맡은 후 SBS 피디로 입사하게 됐다"며 "총무 심정숙과 민경수를 비롯해 2기 회원으로 들어온 이수빈, 최진호, 구현모, 황윤식, 왕성국 등이 꽃다림을 7년간 유지시킬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부산지역의 거의 모든 시위와 행사를 촬영했고, 운영비 조달을 위하여 주말마다 결혼식 비디오를 촬영했어야 했는데 그들의 헌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고 덧붙였다.
심정숙은 1990년에 영화공부를 하기 위해서 서울로 향한다. 1990년 12월 출판사 한길사가 설립한 한길예술연구원에서 영화감독 양성코스인 '영화예술반'(일명 한길영화아카데미)을 개설할 때 입학했던 것이다.
당시 강사는 민족영화연구소장 이효인(경희대 교수, 전 영상자료원장), 강한섭(서울예대교수), 주진숙(영상자료원장) 이장호(감독), 유현목(감독), 임권택(감독), 장선우(감독), 안성기(배우) 등이었고, 영화개론, 영화사, 촬영론, 기술론 등을 가르쳤다,
심정숙은 "한길예술연구원 수료 후 1991년 SBS 피디로 있는 안태영 선배의 추천으로 스크립터로 입사했다"며 "서울에서도 계속 안태영, 민경수, 이수빈 등과 함께 골방에서 시나리오를 쓰며 영화 제작을 시도했으나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해 포기했다"고 말했다.
또한 "이후 안태영, 이수빈 등과 다시 부산으로 내려와 1994년 공연기획사 '한빛기획'을 설립해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뮤지컬 부산공연을 기획하고 번 수익금으로 베타(Beta) 카메라(당시 4천만 원)를 구입하는 등 계속 영화제작을 모색했다"면서 "그러나 1997년 IMF 사태로 인한 불황으로 '한빛기획'을 접고 각자의 길로 가게 된 것이다"라고 회상했다.
1995넌 영상패 꽃다림 활동을 마무리한 황의완은 "대학에서 활동하는 분들도 있으니 정리해도 될 시점이었고, 결혼한 상태에서 수입 없는 일을 하기 어려웠다"면서 "보유하고 있던 비디오는 분량이 많아서 전교조로 넘겼다"고 말했다.
이어 "꽃다림이 7년 정도 활동하면서 각 대학 영화동아리에 자극제 역할을 했다"며 "부산대 안에 영화운동 동아리 '새벽벌'이 만들어졌고, 부산공업대 등 부산지역 대학의 영화동아리 결성을 지원했다"고 덧붙였다. 부산대 '새벽벌'은 1990년 북한영화를 상영하는 과정에서 일부 회원이 구속되고 기자재를 압수당하는 등 탄압을 받기도 했다.
영상패 꽃다림에서 활동했던 회원들은 황의완(부산콘텐츠마켓 집행위원장), 안태영(한국홀덤 이사), 민경수(애니메이션 회사 이사), 허현숙(전 교사, 교육센터 마음의 씨앗), 심정숙(부산시 교육청), 이수빈(서대문50+ 센터장), 김재준(전 부산영화영상산업협회 사무국장), 황윤식(부산영화협동조합), 왕성국(변호사), 최진호(감독), 양진일(광고대행사 대표), 허수경, 강주완(노무현재단) 등이다.
기록영화집단 하늬영상
▲1994년 설립된 하늬영상 회원들과 대표를 맡은 조성봉 감독(뒷줄 가운데)
조성봉 제공
1995년 이후 부산 영화운동에서 주목받은 것은 1994년 4월 19일 만들어진 조성봉(감독)의 '기록영화집단 하늬영상'이었다. 부산대학교 81학번이었던 조성봉은 1982년 제적된 뒤 노동운동을 위해 공장으로 들어가 1990년까지 10년 정도 활동한다. 이후 군 복무와 결혼 등으로 노동운동을 정리하고 1993년 영화로 뛰어들었다.
조성봉은 노동운동 당시 공단 쪽에 있던 도서원에서 노동자들에게 노래를 가르치기도 했다. 도서원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부산에서 생겨난, 책을 매개로 한 지역 주민들의 자발적인 문화 공간이었다. 함께 민중가요를 부르던 노동자들에게 영상운동을 제안했고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결합하면서 하늬영상은 시작됐다. 조성봉은 "영화에 대해 몰랐던 사람들이 각자 시나리오, 음악, 그래픽 등을 공부하면서 영화를 만든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조성봉은 주로 씨네마테크 1/24과 협력했으나 제작했던 작품 주제는 1950년대 남한 빨치산과 제주 4.3항쟁, 5.18 광주항쟁 등이었다. 2회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첫 다큐멘터리 <레드헌트>(1997)는 한국영화 최초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받았다.
당시 경찰은 "조성봉이 적어도 사회주의자이고 그래서 북에서 주장하는 똑같은 논리로 4.3항쟁을 미군정과 이승만의 분단정책에 반대해서 봉기한 정당한 항쟁으로 표현했다"며 영화를 이적표현물로 규정한다. 구속영장이 신청됐고 영장 발부는 당연 수순으로 보였으나, 영장실질심사가 도입된 초기였던 탓에 반전이 일어난다.
조성봉에 따르면 당시 영장담당판사가 4.3사건이 정당한 항쟁이었다고 생각하느냐고 묻길래, 그렇다고 했고, 학살의 책임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게 있냐고 묻는 것에도 그렇다고 답했다. 결국 이렇게 대답한 게 기소장에 적힌 혐의 사실을 인정한 것이 됐고, 경찰이 영화를 갖고 있는 상태에서 증거를 인멸할 우려가 없는 데다, 딱히 다른 데 갈 곳이 없어 도주의 우려도 사라지면서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불구속이 된다.
다만 이후 영화를 상영했던 인권영화제 서준식 대표가 구속되는 사태로 인해 파장이 컸다. 1986년 홍기선과 이효인이 구속된 '파랑새 사건' 이후 영화로 인해 공안당국의 탄압을 받은 두 번째 사례였다.
씨네마테크 1/24 대표를 지낸 우정태는 부산독립영화협회가 펴낸 <부산독립영화론-독립영화 계보 그리기, 첫줄>(2004년 발간)에서 "부산씨네클럽과 씨네마테크 1/24가 사회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대안적인 미학에 대한 강박적인 충동으로 시작돼, 사회적인 맥락으로 1980년대 촉발된 한국독립영화와 차이가 있었으나, 조성봉이 운동으로서의 영화에 중점을 두며 이 같은 문제점을 메워나갔다"고 평가했다.
<레드헌트> 제작에는 기획을 맡았던 류위훈과 촬영을 담당한 정기평 외에 부산씨네마테크 1/24 대표를 지낸 양정화(프로듀서, 해밀픽쳐스 대표), 성균관대 영상촌에서 활동했던 임유철(감독)이 참여했다. 후속편인 <레드헌트2>(1999)에는 박미경(콘텐츠큐레이터)이 조감독으로 참여했다. 조성봉과 하늬영상에서 함께했던 이들은 1999년 노동영상집단 공장으로 분화한다.
▲극단 자갈치에서 배우로 활동했던 양종곤(전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대표)
극단 자갈치 제공
영상패 꽃다림은 아니었으나 양종곤(프로듀서, 전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대표)도 1990년대 부산민족문화운동협의회 산하에 있던 극단 자갈치에서 활동하면서 부산의 문화운동 흐름에 동참했다.
1990년 부산대 문화패 연합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당시 울산 현대중공업 파업투쟁이 전개되던 현장에 동아리 회원 3명과 누비며 취재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1994년 군에서 제대한 후 1995년에는 부산대 총학생회 문화국장을 맡게 된다.
양종곤은 "1996년 극단 자갈치에 들어가 3년 동안 배우로 활동했고, 1999년 영상패 꽃다림에서 활동했던 최진호(감독, <집행자>) 소개로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 박헌수 감독이 연출한 <주노명 베이커리> 제작부에 들어와 영화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처음에 영화로 왔을 때는 모든 것이 생소해 '씬'이나 '컷'도 잘 몰랐다"고 회상했다.
영상은 민중미술 표현 위한 제 2의 도구
김상화(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 집행위원장)는 황의완처럼 미술운동에서 영화로 전환한 경우였다.
1987년 6월항쟁 이전 '시월의 소리'라는 미술운동 단체에서 활동했고 '그림패 낙동강'에 창립 회원으로 참여해 1992년까지 몸담았으며, 부산민족문화운동협의회 활동에도 적극 연대했다. 1994년에는 애니메이션을 통한 사회번혁 운동을 지향했던 '단편 실험 애니메이션 디지아트'를 만들어 30여 편의 작품을 제작했다.
김상화 연출 <꿈꾸는 날>(1996), <처용암>(1997) 허병찬 감독의 <도시인>(1997)과 <바람소리>(2000), 최민규 감독의 <잃어버린 것들>, 이태구 감독의 <유죄>(1999) 등이 만들어졌고, 이들 작품들은 해외 애니메이션 영화제에 초청됐다.
1996년 부산예술대학교 교수가 된 김상화는 1999년 설립된 부산독립영화협회 2대 대표를 맡은데 이어, 2005년부터 부산어린이청소년영화제를 출범시키게 된다.
▲부산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 초기 해외게스트를 맞이하고 있는 김상화 집행위원장비키 제공
김상화는 2012년 부산대학교 학보 '부대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민중미술을 표현하기 위한 제 2의 도구로써 영상을 택했고, 민중미술을 굳이 회화로 규정짓지 않는다"며 "소통 도구는 회화에서 영상으로 변화했다. 영상이라는 매개로 신세대들과도 교류할 수 있는 장이 열리고 예술을 향유하는 계층이 더 넓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부산의 영화운동은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힘을 받아 1999년 부산독립영화협회 창설 등으로 이어진다. 새로운 엉화에 대한 갈증으로 예술영화의 대중화를 추구했던 부산씨네클럽과 씨네마테크 1/24은 부산독립영화를 이끌어가는 새로운 인력의 배출구로써 역할을 하게 된다. 영상패 꽃다림 회원 중 영화를 선택한 사람들은 부산보다는 주로 충무로로 진출했다.
그렇지만 새로운 영화를 추구했던 '영화'운동과 민족영화, 민중영화를 추구했던 영화'운동'은 부산독립영화협회라는 울타리 안에서 발전해 간다. 부산독립영화협회 초대 회장을 이성철(감독)과 함께 조성봉(감독)이 공동으로 맡았고, 2대 회장을 김상화가 이은 것은, 1984년 이후 전개된 다양한 부산 영화운동의 흐름을 잘 흡수해 융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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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촬영 중 경찰에 연행... 강제징집에 고문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