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영화세상'을 만든 황규석(작가)

대전 '영화세상'을 만든 황규석(작가) ⓒ 황규석 제공

 
1980년대 서울을 중심으로 부산과 광주로 이어지던 영화운동이 지역으로 확산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였다. 시기적으로 한국영화의 중심인 충무로에서 영화운동의 전선이 확대되던 때였고, 1996년 부산영화제의 시작을 전후로 해외 예술영화에 대한 욕구가 커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지역 영화운동은 다소 늦게 시작된 셈이다. 
 
서울과 부산, 광주가 1980년대 초반 민중운동의 성장을 바탕으로 발전한 것과 비교하면, 1990년대 이후 지역에서 전개된 영화운동의 성격도 조금은 달랐다. 사회 변혁운동의 도구로서 역할보다는 새로운 영화를 탐구하는 방식이 중심이 됐고, 영화마니아를 통해 자생적으로 생겨난 것이 특징이었다.
 
대전지역 영화운동의 출발도 시네마테크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1991년 최정운(작고. 전 한국시네마테크연합 대표)이 사당동에 문화학교 서울을 만든 이후 이 영향이 전국으로 퍼졌고, 대전도 여기서 자양분을 받아 성장하게 된 것이었다.
 
대전에서는 1980년대 후반 장산곶매에서 <오 꿈의 나라>와 <파업전야>가 나왔을 때 재야단체들이 중심이 돼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상영회가 조직되기도 했다. 낭희섭(독립영화협의회 대표)을 통해 배급(당시는 보급)을 받았고, 일정한 상영 비용을 내고 영사기와 필름을 받아 단체로 관람하는 형태였다.
 
강민구(대전 아트시네마 대표)에 따르면 <파업전야> 상영을 주관했던 단체는 1992년까지 활동했던 충남문화운동연합(충문연)이었다. 양봉석 의장, 강수환, 오재진, 이시우, 이기석 등이 주축이었다.
 
하지만 재야문화단체 활동의 일환이었기에 1회 성 행사로 끝났을 뿐 영화를 중심으로 한 변혁운동이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지역 영화운동이 부산처럼 민중영화 상영 등을 통해 민족민주운동과 연대하는 방식으로 발전한 곳도 있었으나, 대전은 그렇지 않았다.
 
다만 영화운동에서 '운동'에 방점을 찍으며 민중영화를 지향했던 것은 학생운동을 했던 강민구였다. 강민구는 "1980년대 후반 대학 재학 당시 문화운동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며 "1990년 대전에서 조직사건이 터졌고, 선배들이 피신하는 과정에서 1990년 군에 입대했다"고 말했다. 이어 "1992년 제대한 이후 충문연 선배들을 알게 됐는데, 복학을 준비하며 종종 간 주점이 충문연 선배들이 모이는 아지트였기에 이들과 만나면서 예전 활동을 들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황규석이 매월 발행한 소식지 <영화세상>

황규석이 매월 발행한 소식지 <영화세상> ⓒ 황규석 제공

 
대전에서 영화운동이 본격적으로 태동한 것은 1993년이었다. 기점은 불문학을 전공했던 씨네필 황규석(작가)이었다. 영화잡지에 광고를 내고 '영화세상'이라는 영화동호회 활동을 시작한 것이 출발이었다.
 
1993년 영화잡지 <스크린> 8월호 '시네마켓' 코너에 황규석이 낸 작은 광고가 실린다. 짤막했던 내용은 "영화 포스터와 자료 수집을 함께 하고 싶고 영화정보 교환에 관심 있으신 분들... 영화세상을 만들어 봅시다"였다.
 
황규석에 따르면 대전에서는 1993년 이전 김경량이 이끌던 '열린빛영화모임'이라는 영화감상 모임이 있었다. 하지만 감상 모임으로만 머물렀는데, 영화세상은 여기서 한 발 더 나간 것이었다.
 
황규석은 일찍부터 영화에 관심을 가졌기에 별명이 '할리우드 키드'였다. "중학교 때부터 영화에 빠져들었고, 스크린으로 보는 세상이 신기했던" 황규석에게 영화는 "꿈을 실현해주시기도 했고, 세상을 바르게 보는 시선"도 키워준 도구였다.
 
그는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르게 보게 됐고, 문제의식도 생겼으며 잘못된 사회를 고발하고 아파하면서 다양한 예술영화를 접하는 활동이 좋았다"며 "<슈퍼맨>은 어릴 때 영향을 끼쳤고, 고1 때 본 <킬링필드>는 영화적 충격을 안겨 줬다"고 말했다.
 
그래서 만든 게 '영화세상'이었다. 같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대전에서 활동을 시작한 것이었다. 황규석에 따르면 당시 <스크린> 광고를 보고 전국에서 14명이 연락해 오면서 영화세상이 만들어지게 됐다.

창립 회원은 김영애(대구), 한성수(서울), 이상우(서울), 강유정(부산), 최종원(부산), 김명선(부산), 조재형(평택), 이경림(울산), 정종향(대전), 박병우(대전), 손영애(대전) 등이었다.
 
영화잡지 광고로 모여 소식지로 교류
 
영화동호회로 출발한 '영화세상'의 활동 중 두드러졌던 것은 소식지 발간이었다. 1993년 9월 1호 소식지 영화세상 15부를 발행한 데 이어, 3호부터 컴퓨터를 구입해 소식지 편집을 시작했다. 온라인 네트워크가 활성화되기 이전, 대전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회원 망이 구축된 것은 당시 황규석이 매월 우편으로 꼬박꼬박 보낸 소식지 덕분이었다.
 
 영화세상 회원으로 참여했던 이상우(감독), 1989년 개봉한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반을 찾습니다> 출연 중 문성근(배우)와 함께.

영화세상 회원으로 참여했던 이상우(감독), 1989년 개봉한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반을 찾습니다> 출연 중 문성근(배우)와 함께. ⓒ 이상우 제공

 
이상우(감독)가 창립 회원이었다는 것도 특별한 부분이다. 당시 서울에서 영화세상 소식지를 구독했던 이상우(감독)는 "<스크린> 광고를 보고 참여했고, 대전에 가지는 않았으나 소식지에 글을 보냈다"며 "이후 서울에서 황규석 대표를 만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상우(감독)는 "고등학생 시절인 1987년 이장호 감독의 < Y의 체험 > 개봉 전 일일 포장마차가 있었는데, 거기에서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웠다"면서 "당시 전영록 가수가 나왔고 나도 노래를 부르겠다고 나갔는데, 그때 이장호 감독님이 꿈이 뭐냐고 물어서 영화감독이라고 했다"고 회상했다. "그 일로 바로 충무로 명보극장(현 명보아트홀) 지하에 있던 영화사로 찾아가 무작정 청소를 했던 것이 영화에 뛰어든 계기였다"고 덧붙였다. 
 
이상우는 1989년 서울영화집단 출신 황규덕 감독의 데뷔작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반을 찾습니다>에는 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1989년 8월 삼영필름이 동해안 연곡해수욕장에서 개최한 여름해변영화학교에 참여해 청소년 시절부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웠다. 당시 강사가 전양준(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이충직(전 중앙대 교수), 양윤모(영화평론가) 등이었다고 한다.
 
이상우는 미국 유학 후 감독으로 데뷔하는데, <아버지는 개다>(2010), <엄마는 창녀다>(2011),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께>(2014), <나는 쓰레기다>(2015) <비상구> <스타박'스 다방 >등의 독립영화 연출해 국내외 영화제에서 주목받았다.
 
영화세상은 1994년 소식지 12호를 발행하면서 9월 10일 대전에서 1주년 기념 모임을 하게 된다. 첫 오프라인 모임으로 전국에서 소식지로만 소통하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 것이다. 강민구가 '영화세상' 활동에 결합하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강민구는 "1994년 휴학을 하고 목원대에서 야간경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때, 조립식 건물 매점 한쪽에 '레오 까락스의 <나쁜피> 상영이라는 전단이 붙어 있어서 상영하는 날 찾아갔고, 거기서 만난 사람이 황규석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강민구는 영화비평을 공부하며 테리 이클턴의 <문학이론입문>부터 여러 리얼리즘 관련 서적·계간지 <문학과 과학>, <리뷰> <창작과 비평>, <문학과 사회>, 월간지 <키노> 등을 닥치는 대로 읽고 필기하며 지식을 쌓던 시절이었다.
 
영화이론을 탐구하던 강민구는 황규석과 만남을 계기로 영화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강민구는 "황규석이 제작해 우편으로 발송했던 소식지의 내용은 <키노> 등의 영화잡지에 나온 영화 소개 글과 회원 소식 등이 많았고, 간혹 회원들이 쓴 글이 실리기도 했다"며 "황규석은 여타의 상영회 조직보다는 소식지에 제작 및 배포에 애착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황규석에 따르면 소식지는 52개월 동안 52권이 발행됐다.

소식지를 바탕으로 시작된 교류는 차츰 직접 회원들과 접촉면을 넓히면서 별도의 영화 세미나와 촬영 활동을 하는 형식으로 발전한다. 강민구는 "대화동 외국인 노동자들을 촬영하기도 했고, 1996년 인디포럼 행사를 할 때 서울에서 조영각(전 영진위 부위원장), 안해룡(감독) 등과 이야기 나누면서 영상을 찍은 후 '영화세상' 회원들에게 한국영화의 어떤 흐름에 대해 이야기를 해 준적이 있다"고 말했다.
 
 1994년 4월 소식지 <영화세상> 8호 발간 직후 강민구, 황규석, 정희주, 박병우

1994년 4월 소식지 <영화세상> 8호 발간 직후 강민구, 황규석, 정희주, 박병우 ⓒ 황규석 제공

 
 영화세상 활동에 참여했던 설경숙(왼쪽. 전 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서울환경영화제프로그래머). 영화세상 회원이 재개봉관(국일극장)을 인수해 개관한 날 찍은 사진.

영화세상 활동에 참여했던 설경숙(왼쪽. 전 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서울환경영화제프로그래머). 영화세상 회원이 재개봉관(국일극장)을 인수해 개관한 날 찍은 사진. ⓒ 황규석 제공

 
당시 대학생이었던 설경숙(감독. 전 서울환경영화제·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프로그래머)도 1994년부터 유학 가기 전인 1996년까지 2년 정도 영화세상을 오갔다.

설경숙은 "적극적인 활동이 아닌 참여한 정도였고 당시 한국에서 보기 어려웠던 영화들을 보거나, 한참 일본영화 수입개방에 대한 찬반논란이 있을 때라 소식지 영화세상에 글을 썼던 것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당시 영화 글을 쓰며 활동했던 회원 중 박병우는 이후 온라인 매체 영화기자가 됐다.
 
'영화세상'에서 '컬트'로
 
1995년에는 12월에는 사무실을 마련하게 된다. 황규석, 강민구, 최정호, 김진욱을 중심으로 관객집단 '영화세상' 첫 사무실이 대전 서구 갈마동 지하에 문을 연 것이다. 여기서 매주 수요일 '필름 EXIT' 이름으로 20인치 TV 모니터를 활용해 회원들의 영화감상 모임이 진행됐다.
 
강민구는 "황규석이 대표였고 교육팀 운영은 내가 담당했으며, 김진욱은 당시 지하상가에서 영화 포스터로 만든 브로마이드나 앨범을 판매하던 친구였는데, 포스터나 앨범제작 판매로 얻은 수익금 일부를 후원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열정을 갖고 시작했다고 해도 운영이 잘 된 것은 아니었다. 최진욱과 황규석은 당시 하이텔 등의 영화정보 사업에 대해 고민했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영화감상보다는 운동으로서 영화의 역할에 고민이 많았던 강민구는 '영화세상'보다는 대화동 외국인 노동자 모임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촬영 활동에 집중하게 된다.
 
1996년 8월 황규석은 사무실을 중구 선화동 교보문고 옆 지하로 옮겨 빔프로젝터가 있는 작은 상설 상영장을 마련한다. 그리고 1996년 9월 이름을 '영화세상'에서 '대전 영화공방 씨네마떼끄 컬트'로 바꾸게 된다. 줄여서 '컬트'로 불렀는데, '영화세상'을 통해 알게 된 이후 도움을 준 분이 운영하던 카페의 상호기도 했다. 운영진은 민병훈(대전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 최종원(시나리오 작가), 김요석(감독), 정용진 등 4인이었다,
 
'컬트'는 1996년 12월~1997년까지 작은 규모의 상영관을 만들어 매달 영화제를 기획했다. 당시 PC통신 나우누리 센티스의 장소 협찬을 받아 '시민을 위한 열린영화제'를 무료로 개최했는데 <해피 투게더>가 열띤 호응을 얻었다. 대전의 영상문화 전반의 실태를 진단하는 설문조사도 진행했다. 4쪽 분량의 영화제 소식지 < Cult >를 창간해 5호까지 발행한다.
 
 소식지 <CULT>

소식지 ⓒ 황규석 제공

 
대전에서 펼쳐지는 시네마테크 활동에 언론도 주목했다. 경향신문(1996년 3월 2일 자)은 '대한민국 문화적 역량의 70%가 서울 한 곳에 몰려있는 현실에서 이 같은 문화적 소외를 극복하고 지역의 독자적 문화권을 형성하려는 젊은이들의 움직임이 늘고 있다"며 영화세상을 소개했다. '100여 명 회원이 참여하고 있는 대전 영화세상이 시사회, 영화토론회, 회지발간 등 자체 행사를 비롯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매달 설문조사도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기사에서 황규석은 "컴퓨터 통신과 인터넷을 활용하기 때문에 정보수집만큼은 서울에 뒤떨어지지 않는다"며 "더 많은 젊은이들을 규합해 실질적인 문화공간 확보를 위해 힘쓸 것이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충남대학교 학보인 충대신문(1996년 9월 16일 자)은 당시 '컬트의 모습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대전 영화공방인 컬트는 조그맣게 시작됐다. 현재 컬트에서 총무를 맡고 있는 황규석씨가 93년 9월 컬트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세상이라는 작은 영화모임을 결성했다. 거기서 현 컬트 사장인 이석호씨를 만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컬트를 조직하게 되었다.
 
올해 6월 '우리들이 숭배하는 마지막 컬트'라는 제목으로 창립영화제를 갖은 후 7월 '가까운 나라, 먼 나라', 8월 '컬트는 호러영화 파티중', 9월 '컬트와 떠나는 영화여행'이라는 제목으로 매달 1번씩 영화제를 열었다. 뿐만 아니라 회원들과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영화에 관한 논의와 토론을 하고 있다.
 
또한 대학 써클에 각종 영화 장비를 대여해주고 있으며, 강연회 개최 및 무크지 발행 그리고 황규석씨가 직접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한 16mm 영화도 준비 중에 있다. 한 감독을 정해놓고 집중적으로 탐색하고 토론하는 작가 영화제가 월말에 진행될 예정이다.
 
지금까지 거쳐 간 회원은 1백여 명, 이번 달은 25명이 신청했다. 1만 원의 회비를 내면 한달간 회원이 될 수 있고, 회원이 된 기간 동안 마음껏 찾아가서 매일 상영하는 영화를 관람할 수 있다.
 
그러나 황규석 씨는 "한 달에 보통 30여 명이 회원으로 가입하는데 회비 30만 원으로는 컬트를 운영하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사장님이 운영하는 커피숍 '컬트'의 재정수익을 컬트에 보태고 있다.
 
당시 컬트가 지향점을 밝히며 내건 '컬트 선언'은 다음과 같았다.
 
I. 컬트는 적극적으로 의미를 찾는 모든 영화감상자를 위해 존재한다.
I. 컬트에 모든 영화는 없다. 그러나 좋은 영화, 진실한 영화는 반드시 있다.
I. 컬트는 영화예술의 진보를 위해 영화 관객과 함께 생산적인 담론생산과 창작 활동에 이바지한다.
 
영화 영상에서 소외됐던 대전
 
'컬트'의 특징은 동호회 성격이었던 '영화세상'보다는 시네마테크 기능이 강화된 것이었다. 1996년 창립영화제를 시작으로 1997년 10월까지 1년 이상 매달 영화제를 개최하면서 특색있는 프로그램을 통해 관객과 소통을 이어나간 것은 대표적이었다. 
 
1996년 1회 부산영화제가 시작되고 전국의 시네마테크가 연대를 논의할 때 컬트는 대전의 대표주자였다. 광주 영화로 세상보기를 이끌었던 박상백(슈아프로덕츠 대표)은 "대전은 황규석이 시네마테크 운동을 주도했다"고 말했다.
 
1996년 11월 2일 전국 씨네마떼끄 연합 준비회의가 광주에서 열려 세계영화사팀, 시나리오팀, 씨네21팀 등 소모임 활동이 활성화된다. 이후 1997년 2월 2일 전국 씨네마떼끄 연합 준비위 사무국 회의가 대전 컬트에서 개최됐다. 여기에는 문화학교 서울, 광주 영화로 세상보기, 전주 온고을 영화터, 부산씨네마떼끄 1/24, 대구 7예술 등이 참여했다.
 
1997년 4월 11일~13일 전국 씨네마떼끄 연합 전체 모임이 계룡산에서 개최됐고, 5월 30일(금) 서울 연세대 동문회관, 전국 씨네마떼끄 연합을 발족한다. 지역에서 시네마테크 중심의 영화운동을 전개해 온 단체들이 전국적인 연대를 활성화하며 맺은 결실이었다.

참여단체는 제주 영화만세, 부산 1/24, 강릉 씨네마떼끄, 전주 온고을 영화터, 광주 영화로 세상보기, 대구 제7예술, 대구 씨네하우스, 성남 시선, 대전 컬트, 평택 씨네마 드리밍, 부천 영화열망, 문화학교 서울 등이었다.  
 
 전국씨네마테크연합 구성단체 회원들. 당시 문화학교 서울 곽용수(아랫줄 가운데), 대전 컬트 황규석(아랫줄 우측에서 두번째)

전국씨네마테크연합 구성단체 회원들. 당시 문화학교 서울 곽용수(아랫줄 가운데), 대전 컬트 황규석(아랫줄 우측에서 두번째) ⓒ 황규석 제공

   
 대전 씨네마테크 컬트 상영회 몰려든 관객들

대전 씨네마테크 컬트 상영회 몰려든 관객들 ⓒ 황규석 제공

 
전국적인 조직이 결성된 이후 소식지 명칭과 모임 이름에서 '영화공방'을 떼어내고 '대전 씨네마떼끄 컬트'로 바꾸게 된다. 당시 운영진은 황규석을 중심으로 최종원(전 시나리오 작가), 김요석(감독), 정용진 등 4인이었다.
 
최종원에 따르면 운영진 중 장비·촬영·조명 담당이었던 김요석은 문근영·김래원 주연 영화 <어린 신부> 시나리오를 썼고, 정용진은 영화과 출신답게 영화이론의 귀재로 학과 교수님보다 더 영화이론에 해박해 영화 평론, 칼럼, 원고를 담당했다. 리더였던 황규석은 운영과 각종 자료를 책임졌다.
 
최종원은 "어떤 영화감독이 내가 쓴 상업영화 시나리오를 읽고는 제작하겠다고 서울로 불러들이기 이전까지 '컬트'에서 1년 정도 활동했었다"며 당시 '컬트' 활동의 배경이 됐던 대전의 문화적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 시절 대전은 당시의 부산과 마찬가지로 문화, 특히 영화와 영상 분야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문화의 불모지였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문화적 혜택은 서울 수도권에서만 집중적으로 제공되고 소비되는 형국이었다.

이를테면 흥행성 있는 상업영화 이외의 비상업적 영화들은 대전과 부산 같은 지방의 극장에 걸릴 기회가 거의 없었고, 극장에 걸리지 않으니 아예 시민들은 다양하고 좋은 영화들을 접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문화적 욕구가 강했던 이들은 서울로 원정 가서 보고 오곤 했는데, 그게 대전 시민들과 부산 시민들이 참 많이 닮은 모습이었다."

 
최종원은 또한 "문화적 혜택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두 도시의 사람들은 오히려 그것을 누리고 싶은 욕구가 더 강했던 거 같았고, 그 욕구를 각 도시에서 어느 정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역할을 각 지역의 시네마테크들이 해줬다고 생각한다"면서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대표되는 게 '불법복제'와 '불법 상영'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도저히 서울을 제외한 지방 극장에서는 관람할 수 없는 비상업적 영화들과 예술영화, 제3세계 영화, 또는 작품성은 높으나 상업적 흥행과는 거리가 있는 영화들을 집중적으로 복제해 그것을 볼 기회를 열망하는 시민들에게 허락되지 않는 비상업적 방법으로, 그러니까 불법 상영으로 끊임없이 제공해왔던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당시 이런 영화들을 주로 선보였던 상영회는 관객들로 가득했다. 최종원은 "상영회마다 발 디딜 틈이 없었다"며 "부산보다 대전 사람들의 참여도가 더 높았던 건 그런 억눌린 문화적 욕구가 더 강한 반증이었다"고 말했다.

'킹덤' 상영의 기적
 
 라스 폰 트리에 감독 <킹덤2>

라스 폰 트리에 감독 <킹덤2> ⓒ 라스 폰 트리에

 
이런 열망이 표출된 게 1998년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의 덴마크 공포영화 <킹덤2>(1997) 상영이었다. 대전 시네마테크 컬트가 나서 성공을 이뤄낸 특별한 사례기도 했다. <킹덤2>는 제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소개돼 큰 관심을 끌어모은 화제작이었다. 하지만 흥행성이 취약한 비상업적 영화라는 명목으로 대전의 극장가에서는 그 어떤 곳도 상영 계획이 없었고 관심도 주지 않았다.
 
이때 나선 것이 씨네마테크 컬트였다. 황규석이 상영 프로젝트를 기획한 것이다. 당시 영화 수입사는 KJ엔터테인먼트(이강오 대표)로 유명 희곡작가였던 이강백 작가의 친동생이 대표였다. 씨네마테크 컬트는 수입사와 직접 접촉해 만났고, 대전의 대표적인 극장들에서 상영될 수 있게 각 극장 실무진들과 접촉을 했다. 처음엔 모두에게 회의적이었던 일들이었으나 설득하고 협상하고 발로 뛰고 홍보하는 과정에서 하나둘씩 진척되고 구체화 됐다.
 
최종원은 "당시 대전 아카데미극장에서 일주일, 그다음 동보극장에서 일주일을 릴레이 상영하기로 합의가 됐다"며 "씨네마떼크 컬트 입장에서는 '반드시 비상업적인 영화도 좋은 작품이라면 대전 시민들이 극장에서 볼 기회를 원천 차단당하지 않고 볼 수 있는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래야 다음 기회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동시에 흥행을 어느 정도 성공시켜야 한다는 것이 난제였다. 극장들이 자선사업을 하지 않는 이상, 처음부터 극장들이 이 프로젝트에 동참한다는 것 자체가 당시의 현실로는 말이 안 되는 도박이었다. 당시 수입사는 일반적인 상영 대신 영화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감안해 자정부터 시작하는 심야 상영을 시도하고 있었다. 4시간 46분이라는 상영 시간을 고려한 것이었다. 씨네마테크 컬트도 밤 12시 상영 시작이라는 불리하지만 유일한 협상 카드를 내밀었다. 그런데 극장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작은 기적이었다.
 
상영이 결정되면서 이벤트도 기획했다. 헌혈 후 헌혈증을 받아 오거나 기존 소지하고 있던 이들이 가져오면 <킹덤>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게끔 극장 측과 합의한 것이다. 최종원은 "황규석의 아이디어였다"며 "좀 웃긴 이야기지만 당시 황규석이 대전지역 헌혈자 순위 1위인가 2위였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상영 기간 400여 명이 헌혈증을 가져와 기부할 정도로 호응이 대단했다.
 
상영 첫째 날 극장 안으로 관객이 가득 찼다.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길어지며 조기 입장을 시켜야 할 정도였다. 최종원은 "상영에 앞서 무대에 올라 객석을 빈자리 없이 가득 채운 관객들에게 <킹덤>의 이번 대전 극장 상영에 대한 의미와 취지를 짧게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며 "그 때 관객석 맨 끝 귀퉁이에 서서 수줍게 지켜보고 있던 KJ엔터테인먼트 이강오 사장님이 보여, 관객들에게 그가 중요한 역할을 해줬다고 손으로 가리키자 모두의 시선이 향했고 여기저기 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상영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새벽 술집에서 조촐히 술 한 잔 나누면서 이강오 대표는 최종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물론 영화를 수입한 업자로서 돈을 벌어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왜 그런 영화를 수입하고 상영하려고 노력했는지를 관객들 앞에서 소개받고 박수받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 그간의 노력을 보상받은 것 같아 감정이 북받쳤다. 진심으로 고맙다."
 
최종원은 "<킹덤>은 그 자체로 보면 분명 당시에는 영화계 안팎의 비상업적 큰 화제작이긴 했지만, 일반 대중의 시점으로는 다분히 지루하고 고루한 흥행성 없는 영화이기도 한 게 사실이었다"며 "하지만 당시의 문화적 불모지에 가깝던 대전, 그리고 몇 안 되는 극장가에서 이런 영화들이 상영될 방법을 시도하고, 또 영화를 사랑하는 대전 시민들에게 그러한 기회를 찾아줬다는 데 큰 의미가 있었다"고 평가했다.
 
<레드헌트> 상영에 들이닥친 경찰
 
 <레드헌트>의 한 장면

<레드헌트>의 한 장면 ⓒ 하늬영상

 
씨네마테크 컬트는 다양한 영화를 상영하며 다양성의 저변을 넓혀 나갔으나, 영화로 인해 경찰의 감시를 받는 일도 생겨났다. 제주 4.3 항쟁에 대한 다큐멘터리로 세상을 달구었던 <레드헌트> 상영 때문이었다. 부산의 조성봉 감독이 만든 <레드헌트>는 1997년 서울다큐멘터리영화제 상영 배제와 인권영화제, 부산영화제 등에서 상영되면서 공안 당국의 주시를 받고 있었다. 영화 내용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한 것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을 비롯한 광주 등에서의 상영도 경찰이 이적성을 이유로 가로막았을 만큼 탄압이 심했다.
 
1998년 황규석도 문화학교 서울에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 상영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때 대전 중부서 보안과 형사 2명이 들이닥쳤다. 황규석은 "경찰이 '<레드헌트> 아시죠. 어디 있어요. 그걸 상영하신다고요?'라고 압박했다"면서 "갑자기 들이닥친 공안 형사의 무뚝뚝한 말투와 행동은 그런 경험이 없던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비디오를 받아왔으나 확인하지는 못한 상태였다는 황규석은 "'아직 틀지는 않았고, 계획만....'이라고 답하자 형사가 훈계조로 '사람이 딴생각 안 하고 잘 살아야 된다'고 말했다"고 기억했다.
 
강민구는 "같은 해 12월 '시네마테크 1895'라는 이름으로 별도의 활동을 하면서 <레드헌트> 상영을 진행했으나, 경찰의 압박은 없고 대신 감시를 받은 느낌이었다"며 "당시 상영을 진행하던 시간 내내 차량이 계속 사무실 앞에 대기하고 있었기에 경찰의 감시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당시 일부 대전지역 언론은 '<레드헌트>가 당국의 검열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디오와 자료가 압수당했고, 영화가 상영되지 못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민구는 "사실과 다른 보도였다"며 "자료를 압수당한 사실도 없고, 상영에도 문제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레드헌트> 상영 당시 강민구가 활동했던 '시네마테크 1895'는 1997년 만들어진 새로운 단체였다. 강민구는 "영화광 적인 성향보다는 운동성을 지닌 조직을 원했기에 1996년 영화세상을 떠나 대전 외국인 노동자들을 촬영하면서 민주노총 대전지역본부의 총파업 투쟁 속보 촬영 등의 별도 활동을 하고 있었다"며 "대신 민병훈(대전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이란 친구를 황규석에게 소개해 주고 '컬트' 활동에는 회원으로만 참여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1997년 황규석과 민병훈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서 몇몇 회원이 따로 사무실을 마련해 분화한 것이 '시네마테크 1895'였다. 강민구는 "민병훈의 제안을 받고 함께했던 것이고, 대전 중구문화원 및 휴관한 극장을 대관해 종종 상영회를 열었다"고 회상했다. 영화세상에서 씨네마테크 컬트로 이어지던 흐름에서 파생된 변화였다.
 
'시네마테크 1895'는 1998년 10월 24일~12월 6일까지 목원대학교를 시작으로 여러 공연장에서 제1회 대전영상문화축제를 개최하기도 했다. 40일이 넘는 대장정 속에 <시계태엽장치 오렌지>와 같은 마니아들이 즐겨 찾는 수작부터, 만화영화의 교과서 <에반게리온>, 단편영화 <변방에서 중심으로>, 일본영화 < 7인의 사무라이 > 등을 상영했다.
 
하지만 성과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당시 중도일보는 '지역에서 처음으로 상영된 영화들이었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냉담했고, 영화 한 편당 평균 관객 5명. 관객 한 명 없이 필름만 돌아간 적도 많았다'며 '서울을 중심으로 독립영화제, 단편영화제가 활성화되고 관객들이 줄을 잇고, 부산영화제는 독립영화들이 연일 만원사례를 기록했다는데. 그것은 (대전)지역과는 무관한 먼 나라의 얘기였다'고 평가했다.
 
이에 대해 강민구는 당시 기사에 실린 인터뷰에서 지역의 독립영화 활동에 대한 소신을 이렇게 강조했다.
 
"지역에서 독립영화를 하기 위해선 두 가지와 싸워야 한다. 하나는 비합법단체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실. 그리고 또 하나는 모든 문화가 서울 중심으로 활성화되고 있는 현실. 지역의 독립영화 활동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언더'가 아니라 '독립'이다. 독립영화는 이제 언더그라운드 문화가 아니다. 우리나라, 그리고 지역의 현실이 독립영화를 '언더'로 남게 강요할 뿐이다.
 
그리고 지금 그 강요의 힘은 권력보다 자본이 더 강한 세상이다. 독립영화를 어두운 골방에서 밝은 광장으로 불러내기 위한 활동은 지역에서도 시작됐다. 그것이 소수의 마니아를 위한 것이냐, 지역 영상문화의 폭을 넓히고 수준을 높이기 위한 것이냐는 앞으로의 과제다. 그리고 그 과제는 관객의 몫이기도 하다."

 
시네마테크 기반으로 독립예술극장 개관
 
 시네마테크 활동 시절 강민구(대전 아트시네마 대표)

시네마테크 활동 시절 강민구(대전 아트시네마 대표) ⓒ 강민구 제공

 
1998년에 접어들면서 강민구의 활동 보폭도 넓어지게 된다. '전국씨네마떼끄연합'이 '전국씨네마떼끄협의회'로 바뀌었고, 강민구가 3기 의장을 맡게 된 것이다.

1998년에는 한국독립영화협회(한독협)가 결성되는데, 강민구는 한독협 중앙위원으로도 활동하게 된다. 당시 한독협 당시 사무국장은 조영각(전 영진위 부위원장)이었고, 사무차장은 홍수영(독립영화인)이었다.
 
하지만 강민구는 대중적인 활동을 하기 위해 1999년 한독협을 정리하고 대전의 활동에 집중하게 된다. 독립영화의 활동은 전위에 있었고 시네마테크 운동은 대중운동에 가깝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전위적인 활동보다는 대중적인 활동으로 무게 중심을 옮긴 것이다.
 
여기에는 '시네마테크 1895'의 내부 사정도 작용했다. 운영을 민병훈(대전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이 맡았으나 회원들과 마찰이 생기면서 물러난 것이다. 강민구는 다시 '시네마테크 1895'를 이끌게 되면서 이름을 '시네마테크 대전'으로 바꾸게 된다.
 
1999년은 대전 영상운동의 저변이 넓어지던 시기였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전지부 산하에 있던 '참교육영상집단' 주도로 대전독립영화제의 전신인 '1회 대전청소년영화제'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2000년에 접어들며 1990년대 대전 시네마테크 운동을 주도했던 황규석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대전의 활동을 정리하고 독립영화협의회(대표 낭희섭)의 독립영화워크숍 27기로 참여하기 위해 서울로 옮겨간 것이다. 강민구는 "황규석이 서울로 가면서 함께 활동했던 이들을 소개해 줬고, 이들과 함께 시네마테크 활동을 했다"고 말했다.
 
1993년 시작된 시네마테크 중심의 대전 영화운동은 2001년 6월 16일 대전독립영화협회 결성으로 이어진다. 서울, 부산, 대구에 이은 국내 4번째 독립영화 단체였다. 시네마테크 대전 회원 중에 제작에 관심이 있던 양인화, 송덕호, 구자흥, 강원석, 박종석, 강민구 등이 주축이 됐다. 초대 대표는 양인화가, 사무국장은 송덕호가 맡았다,
 
이후 전교조 대전지부에서 대전청소년영화제의 운영을 맡고 있던 이찬현이 대전독립영화협회의 대표를 맡으면서 대전청소년영화제는 대전독립영화제로 개편됐다.
 
대전 영화운동의 중심인 시네마테크 대전은 40명 정도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2000년대 이후로도 꾸준한 활동을 펴왔다. 문화학교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시네마테크 단체들과 교류하며 작은 시사실이나 문화공간 혹은 극장을 대관한 상영회를 진행했다.
 
이를 동력으로 강민구는 사비를 들여 2006년 4월 21일 대전 최초의 독립예술영화관인 대전 아트시네마를 개관하게 된다. 2007년 개관한 서울의 인디스페이스보다 앞서 생겨난 독립예술영화전용관이었다. 시네마테크 운동이 극장을 만들어 낸 첫 사례로서 대전 영화운동의 결실이었다.
 
 대전아트시네마 강민구 대표

대전아트시네마 강민구 대표 ⓒ 박상백 제공

 
영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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