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황제> 스틸 사진.

영화 <황제> 스틸 사진. 김선욱의 피아니스트 연주 장면 ⓒ 민병훈


<벌이 날다> <터치>를 연출한 민병훈 감독이 신작 <황제>를 들고 제22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황제>는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연주를 '주인공'으로 한 음악영화다. '음악영화'라고 해서 <원스>나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처럼 음악을 매개로, 인물과 인물들이 맺고 있는 관계가 주된 동력인 작품들을 상상한다면 이 영화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황제>는 문자 그대로 음악과 김선욱의 연주가 주인공인 작품이다.

<황제>는 내러티브나 인물간의 갈등보다 영화가 그려내는 비대칭적 공간과 자연이 낳아놓은 듯한 그림 같은 이미지가 압도적인 영화다.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각자의 이유로 죽음을 택하려는 젊은이들이 음악(극중에서 김선욱이 연주하는 피아노 연주)을 듣고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황제> 민병훈 감독

<황제> 민병훈 감독 ⓒ 부산국제영화제


<황제>의 민병훈 감독을 만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 <황제>는 베토벤의 동명의 작품, '황제'에서 차용한 제목이다. 왜 베토벤의 '황제'여야만 했나.
"원래 클래식과 오페라 공연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결정적 이유는 따로 있다. <터치>를 만들고 심신이 지친 시기가 있었다. 우연히 예술의 전당에서 김선욱이 연주하는 '황제'를 봤는데 그 감정이 예사롭지 않았다. 진정한 '치유'라는 것을 느꼈다고 할까. 그런 느낌을 관객에게도 주고 싶었다. 내가 봤던 무대에서의 김선욱을 그대로 내 영화에 캐스팅하고 싶었다."

- 전작들과 이번 작품에서도 '자연'은 큰 역할을 차지하는 것 같다. 특히 나무와 하늘의 풍경들이 압도적으로 배치 되어있다고 느낄 정도다. <황제>에서 자연은 어떤 것인가.
"영화를 만들 때 공간이라는 요소가 내게는 절대적이다.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공간(센텀시티에 위치한 한 펍)도 솔직히 다 내 머리 속에 있었던 곳이다(웃음). 공간뿐 아니라 그것을 싸고 있는 시간대도 중요하다. 이 공간은 낮이 예쁜지 밤이 예쁜지 미리 다녀보고 준비해 놓는다."

- 공간도 공들여 고르신 것 같지만 그 안의 인물들, 특히 인물들이 자연이 뿜어내는 공백과 교류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런 종류의 이미지를 만들 때 프레이밍(framing)이 굉장히 중요할 듯하다.
"맞다. 자연을 많이 끌어올수록 화면 구성이 더욱 더 중요해진다. 화면 구성을 할 때 자연을 가두려고 하지 않는다. 아름다운 화면을 쫓는 것이 아니라 공기의 흐름, 밀도, 습기 같은 것들, 공간 구성, 화면 구성에 반드시 반영하려고 한다. 이제는 그런 것이 숙달이 된 것 같다."

- 음악을 먼저 접하고, 나중에 스토리를 입혔다고 들었다. 인물들의 대사는 서로를 향한 것이 아닌 내레이션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내레이션은 어떻게 구상한 것인가.
"이성적으로 각 인물의 캐릭터를 생각해서 쓴 것은 아니다. 평소에 내가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바로 바로 시나리오에 반영한다. 난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내레이션에 문어체가 많이 등장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황제> 민병훈 감독

관객과의 대화에 참여한 <황제> 민병훈 감독. ⓒ 부산국제영화제


- 영화에 작가나 피아니스트, 혹은 무언가를 창조해 내는 직업을 가진 인물들이 많이 등장한다. 평소에 '크리에이터'라는 직업에 대한 생각은 어떤 것인가.
"궁극적으로 난 모든 예술가가 다 '한 통속'이라고 본다. 무용가, 화가, 피아니스트 모두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지만 표현의 방식이 다를 뿐이다. 난 우리 모두가 같은 것을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뭔가 느껴지는 동질감 때문에 자꾸 등장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 크레디트에 이상훈 감독과 공동감독으로 올라가는데 역할 분담을 어떻게 했는가. 싸우지는 않았는가.(웃음)
"이상훈 감독은 10여 년 동안 내 조감독이었다. 우리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 딱히 분담이라고 할 것이 없었다. 절대 싸울 일 같은 건 없었다(웃음)."

- <황제> 극장 개봉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어떤 과정을 겪었나.
"지금 우리나라 극장 상황을 다 알지 않나. 이건 정상적인 상황일 수 없다. 한 영화가 2000여 개 관에서 상영되는 현실에서 <황제>같은 작품이 얼마나 설 수 있겠으며, 그런 비정상적 공간에서 얼마나 이상적인 관객 반응을 얻어낼 수 있겠는가. 차라리 극장 밖으로 나가자고 마음먹었다. 학교든, 공공장소든 더 많은 관객이 열린 마음으로 작품을 볼 수 있도록 하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황제> 민병훈 감독

<황제> 민병훈 감독 ⓒ 부산국제영화제


예술을 온전히 담아내는 영화가 많지 않다. <황제>는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온전히 음악과 '조우'하는 순수 예술적인 경험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이로서 '영화 이미지의 유연화'(토마스 엘세서의 영화 이론: 감각 참조)를 증명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인터뷰 내내 민병훈 감독의 결정을 의식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리 상업영화가 아니라도 감독 입장에서 극장 개봉을 포기하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용기 있는 행보를 절대적으로 지지한다. 아울러 영화제에서 <황제>를 보며 전율했던 그 순간들을 더 많은 관객들이 공유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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