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의 이름에서 따온 아담 셔틀러가 영국의 상징인 성조지 십자가를 로센 십자로 바꾼 연단에서 ‘하나 된 국민, 하나 된 조국’에 대해 연설하고 있다.
워너 브러더스사
문제는 셔틀러가 언론을 장악하고 소통의 통로를 철저히 차단시키며 여론을 조작을 하는 것이 영화로 끝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일찍이 이명박 정부는 인터넷 실명제 등으로 인터넷 바다에 말뚝을 박고, 방송법을 개악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출연 금지시켰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보수언론들 역시 얼마 전까지 월가의 시위를 외면하거나 취사선택해 보도했습니다. 마치 셔틀러가 언론조작을 통해 지배 이데올로기와 기득권에 저항하는 움직임을 원천봉쇄하듯이, 한국과 미국의 보수언론들은 1%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대중들의 의식을 조작해 온 것입니다.
이런 셔틀러에 대항하기 위한 V의 타격수단 역시 방송입니다. 셔틀러의 메시지를 생중계하고 있는 방송국에 침입해 방송을 중단시키고 자신의 메시지를 국민에게 중계합니다. 틈만 나면 국가위기를 들먹이고 혼란을 부추기며 실제로는 권력다지기에 혈안이 된 1%에 맞서 "국민의 힘으로 정부를 바꾸자"고 제안합니다. 또한 V는 이비에게 가상체험을 통해 무감각했던 분노를 일깨워주고, 그 와중에 이비는 삭발을 당하지만 희망의 씨앗을 싹틔워 갑니다.
이비의 삭발 대목은 단순히 여전사의 탄생을 뜻하지 않습니다. 억압과 통제에 길들여진 무기력한 대중들이 깨어 있는 시민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두려움 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1대 99의 사회를 뒤집어엎는 과정을 상징합니다. 그런 이비를 매개로 V는 개인적인 투쟁에서 시민들과의 연대로 저항을 확장하면서 V와 셔틀러의 치열한 공방전은 불꽃을 튀깁니다.
분노한 대중들이 행동에 나서는 장면으로 카메라가 이동하면서 영화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습니다. 인기 프로그램의 진행자 고든이 셔틀러를 패러디하는 쇼를 만들었다 살해당하고, 언론조작은 더욱 노골적으로 횡행하고, 그에 비례해 셔틀러를 향한 V의 공세가 가열되면서 사람들은 침묵과 굴종을 털어내기 시작합니다. 이윽고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쓴 사람들이 하나, 둘 거리로 나서고 거대한 가면의 물결이 광장을 점령해 버립니다. 이비의 말처럼 그들은 "나이고 우리 모두"였던 것입니다.
영화의 이 장면은 월가를 '점령'한 다양한 인종과 계층과 연령의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내용이 풍부한 하나로 연대해 나가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10인 10색이었던 그들이 기획팀, 미디어팀, 음식팀, 의료팀 등으로 조직을 정비하고, 미국 전역에서 후원해 온 물과 피자 등을 사이좋게 나눠 먹으며 '탐욕에 찌든 월가를 점령하여 세상을 바꿔나가자'고 구호를 외치는 것이나 폭력과 공포, 세뇌와 회유에 짓눌렸던 영화 속 사람들이 '가이 포크스' 가면을 쓰고 광장에서 해방을 맞는 것이나 별반 다를 게 없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현실의 '가이 포크스'들이 펼쳐 놓는 저항은 영화 속 '가이 포크스'를 능가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처럼 뉴욕증권거래소 인근 주코티 공원에서 누구나 참여하고 발언할 수 있는 총회를 매일 열고 시위를 결정하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다양한 가치를 지닌 다양한 사람들의 시위답게 이들이 '점령'해 가는 활약상은 트위터, 페이스북, 유투브 등 다양한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중계되고 결집됩니다. 어디서 본 것 같다고요? 2008년 한국사회를 점령했던 '촛불시위'가 바다 건너 미국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들불처럼 되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월가의 점령 서울의 점령으로 이어지다"400여 년 전에 한 위대한 시민이 11월 5일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게끔 했습니다. 그가 희망한 건 공정과 정의, 그리고 자유의 심오한 의미를 세상에 일깨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건 세상을 올바로 바라보는 시각입니다."V가 방송국에서 행한 이 연설은 두 가지를 함의합니다. 셔틀러의 억압과 통제를 가져온 책임은 시민들에게도 있다는 것. 침묵과 굴종의 사슬을 끊어내기 위해서는 '참여'해야 한다는 것. V는 시민들의 참여를 격려하기 위해 수많은 '가이 포크스' 가면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월가의 저항이 일자리를 잃은 청년실업자 30여 명의 '참여'에서 촉발된 것처럼 가면을 쓴 런던 시민들이 한 명, 두 명 참여하면서 군인들의 총칼을 밀어내고 광장으로 집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