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반 코아아트홀 전경
배을선
시네마테크 활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 중의 하나가 서울 종로 관철동의 예술영화관 코아아트홀이었다. 시네마테크에서 비디오 영화를 봤다면, 코아아트홀은 해외 예술영화를 스크린에서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었다. 국내 예술영화 관객들의 저변을 넓히는 데 톡톡한 역할을 감당했고, 대학 영화운동 출신들과 예술영화에 호기심을 갖고 있던 관객들에게 아지트로 자리했다.
1989년 7월 개관한 코아아트홀은 <집시의 시간>, <패왕별희>, <나쁜 피> 등의 작품성 있는 영화들을 발굴했고, 양조위가 주연한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은 10만 관객을 동원하며 예술영화 붐을 조성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은 난해한 예술영화로 평가받았음에도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객 수를 기록했다. 그만큼 예술영화 확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코아아트홀은 국내 최초의 예술영화관이었다. 대한극장, 피카디리, 서울극장, 단성사 등 상업영화관만 있던 시기 등장한 특별한 극장이었다. 당시 한국 극장가는 할리우드로 상징되는 미국영화와 홍콩 무협영화가 중심이었다. 비디오가 활성화되면서 시장 여건이 좋은 곳은 아니었으나 그 좁은 틈새를 비집고 비상업적 영화의 입지를 마련했다. 2004년 폐관할 때까지 예술영화의 등불 역할을 맡았다.
당시 운영을 책임졌던 황인옥(프리비젼엔터테인먼트 대표)은 머니투데이 스타뉴스(2004년 11월 18일) 인터뷰에서 "천편일률적인 오락 영화에서 관객의 시야를 넓히고 상상력을 키워주는 공간으로 자리해왔고, 관객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며 "다양한 영화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고 자부심을 나타냈다.
이어 "믿는 것은 수준 높은 영화를 갈구하는 잠재 관객이 반드시 있으리라는 막연한 확신뿐이었다"면서 "일본의 손꼽히는 예술영화 전용관 이와나미 홀을 모델로 삼아 2년 정도 준비한 끝에 코아아트홀이 문을 열었고, 모회사인 (주)코아토탈시스템사옥을 개조한 90석 규모 소극장이 그 초석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예술영화전용관을 시작하면서 고민했던 문제는 관객과의 교감이었다고 한다. 서울 중심가의 극장이나 미국과 홍콩영화에 대한 관객의 신뢰가 큰 상황에서 대대적인 광고 공세를 펼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이때 등장한 전략이 열성적인 마니아 회원을 양성하고 좋은 영화를 관객의 입소문을 통해 광고하자는 전략이었다.
영화상영 모임인 '시네마 라이브러리'는 그렇게 시작됐다. 마니아를 위해 연회비를 내는 회원을 대상으로 극장의 공간을 할애해 주는 형태로 운영됐다. 마니아들이 편안하게 그들이 원하는 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는 것이 취지였다.
당시 운영자였던 정미(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연회비를 내고 할인과 시사회 초대, 시네마 라이브러리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며 "시네마테크처럼 비디오 영화도 볼 수 있었고, 매달 주제를 평균 주 2회 상영회를 개최했다"고 말했다.
코아아트홀 시네마 라이브러리는 다수의 영화인들이 거쳐 갔다. 1991년 이은주(화천공사)가 1대 운영자를 맡았고, 2대(1993년 4월 ~ 1996년 3월) 운영자가 정미, 3대(1996년 4월~1997년 10월) 운영자가 김수정(베리어프리 영화위원회 대표)였다.
정미에 따르면 이후 영화계에서 활동한 회원으로는 강성률(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 곽정환(프로듀서, 롯데컬처웍스 드라마사업부문장), 문화학교 서울도 참여했던 김양희 (감독. <시인의 사랑>), 김영일 (작가. 하이브미디어코프 제작사,) 민동현(감독. <눈부신 하루>, <지우개 따먹기>), 사공영익(방송 프로듀서), 서창민(감독), 양재호(감독. <인생게임>), 윤영복(시나리오 작가. XR 영상 콘텐츠 기획자), 인진미(감독. <부귀영화>), 최선희(한국영상자료원 사무국장), 최원균(영화 칼럼니스트), 한승희(전 CGV무비콜라쥬 팀장), 함진(스튜디오앤뉴 영화사업부 이사) 등이었다. 활동은 안 했으나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래머), 김현숙(작가. 영화사회학 박사), 이영미(감독. <사물의 비밀>), 최영택(촬영감독) 등도 회원이었다.
상계동과 김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