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
한국영화인들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스크린쿼터감시단
 
1994년을 기점으로 영화운동과 충무로 구체제 사이에는 두 개의 전선이 형성된다. 하나는 대종상이었고, 또 하나는 스크린쿼터(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 문제였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한국영화는 영화운동과 충무로 구체제 사이의 크고 작은 연대와 갈등이 이어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1988년 영화법 개정 요구와 외국영화 직배반대시위였다. 충무로 구체제와 영화운동 진영이 함께 손잡고 연대했다. 전술과 투쟁력에서는 아무래도 1980년대 학생운동을 경험한 세대들이 월등했다. 이를 바탕으로 영화운동의 입지가 강화된다.
 
이후 전개된 스크린쿼터축소반대시위도 마찬가지였다. 1993년 10월 정부가 "올해만 스크린쿼터를 40일 줄이겠다"고 하자 영화계가 들고 일어선다. 영화운동과 충무로 구체제가 대동단결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흐름 속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스크린쿼터를 놓고 신구세대의 인식 차이가 커진 것이다. 서울과 지방의 극장들은 전국극장연합회를 중심으로 충무로 구체제 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작사보다는 상영관이 우위에 있던 시절이었다.
 
직배 문제는 어떤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한국영화를 제작하는 이들에게는 생존권에 대한 위협이었다. 직배 영화가 배급망을 장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극장은 달랐다. 한국영화보다는 외화 상영 수입이 좋았던 탓에, 직배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잘 되는 영화를 통해 수익을 얻고 안정적으로 영화를 배급받는 게 중요했다. 직배사는 이 조건에 최적이었다.
 
직배반대투쟁 과정에서 함께 투쟁하던 충무로 구체제 일부가 은근슬쩍 발을 뺀 데는 이런 요소가 작용했다. 당시 투쟁을 주도했던 이정하(전 영화평론가)는 "이를 충무로 자본들끼리의 밥그릇 싸움으로 변질된 것이었다"고 비판했다.
 
1988년 9월 직배사 UIP의 첫 배급영화 <위험한 정사>가 상영된 신촌 신영극장에서 뱀 소동은 괘씸한 극장을 향한 영화인들의 감정적 응징 성격이었다.
 
이듬해인 1989년 8월 13일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직배영화 <인디아나 존스> <레인맨> <8번가의 기적>이 상영 중인 씨네하우스, 오스카극장, 극동극장, 명보아트홀, 용산극장, 단성사 등에서 방화와 화염병 투척, 최루탄 분말 살포 등이 발생한 것이다. 직배 영화에 대한 반감으로 이해됐다.
 
당시 직배영화를 상영했던 시네하우스(대표 정진우 감독), 명보극장(대표 신영균 배우) 등은 영화인들에게 비판의 대상이었다. 직배 반대를 함께 외치던 충무로 구체제 핵심인 이들이 이중적 태도를 보이며 직배 반대 전선에 균열을 일으킨 데 대한 영화계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물론 나중에 드러난 사건의 진실은 달랐다.
 
미 제국주의 문화침략
 
 1988년 방화 사건을 겪을 당시 씨네하우스 상영작
1988년 방화 사건을 겪을 당시 씨네하우스 상영작우진필름 제공
 
직배 문제는 정치적 사안이기도 했다. 미국의 압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운동이 '미 제국주의의 문화침략'으로 규정한 그대로였다. 방화 공격을 받은 씨네하우스 대표 정진우 감독은 당시 직배 영화상영을 미국과의 관계성 문제로 설명했다.
 
"1988년 10월 14일 노태우 대통령이 방미해 당시 미국 대통령 레이건과 정상회담을 했다. 그런데 귀국 후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들어보니 레이건이 거들먹거리며 노태우에게 뱀을 풀고 스크린을 페인트로 훼손한 사진을 보여주면서 '그동안 미국이 많이 도와줬는데, 이런 식으로 하면 되겠냐'고 항의했다는 거다. 대통령이 압박을 받았다고 하는 데다 미국 측이 계속 문제 삼았다고 하니 나름 정부 입장을 배려해줘야 했다. 그래서 몇몇 작품을 상영한 것이었다."
 
이듬해인 1989년 6월 미국 대사관은 UIP 직배영화 <레인맨> 상영 도중에 또다시 뱀을 푼 사건 발생하자 한미 간 통상현안으로 규정해 한국 정부에 항의하기도 했다.
 
정진우 감독은 "해방 이전에는 직배가 이뤄졌으나 일제가 막으면서 중단됐고, 해방 이후 재개됐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다시 중단된 이후에는 주로 미군 부대에서 나온 필름이 유통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영화 역사에서 직배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영화운동은 외세 특히 미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이 컸다. 80년대 중반은 미국이 5.18 광주민중항쟁의 배후라는 인식과 통상 압박 등으로 인해 반미정서가 높아지던 때였다. 반면 충무로 구체제 내부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어떤 식으로든 이익을 챙길 방안에 집중돼 있었다.
 
앞서 1989년 3월 영화법 개정 요구가 국회에서 발목이 잡힌 것도 이런 입장의 차이였다. 3월 2일 정지영, 장선우, 박광수, 이미례 감독 등이 주축이 된 직배저지·영화진흥법쟁취·영화계민주화 영화인운동본부와 민예총 민족영화위원회 등이 국회 앞에서 시위를 열고 "영화계 내부의 악덕극장업자와 영화인협회 일부 간부들의 기득권을 보장해주는 선에서 현재 영화법을 적당히 손질하여 현행 영화정책을 존속시키려는 움직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외국영화 직배 반대에 합의한 영화제작수입업자들은 국산영화의 의무상영일수(스크린쿼터)를 늘리는 문제에 반발하고 나섰다. 기존 배급 구조가 직배로 인해 영향받는 것은 원치 않으나, 한국영화 보다는 장사가 잘되는 외국영화를 더 많이 상영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었다.
 
1989년 8월 13일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직배 영화 상영관 공격을 수사한 강남경찰서는 9월 7일 유동훈 영화인협회 이사장과 시나리오 작가였던 이일목 당시 영화인협회 산하 영화인권익옹호투쟁위원장을 범행 사주 혐의로 구속했다.
 
이들은 1990년 4월 26일 보석으로 출감했으나, 직배영화 논란으로 사이가 벌어진다. 당시 태흥영화사(이태원 대표)가 20세기폭스사의 <다이하드2>를 수입하자 영화계 인사들은 위장 직배라며 개봉 중지를 촉구한 것이다. 태흥은 국내 대행사인 노마 인터내셔널과 미니멈 개런티(최소보장제) 형식으로 14억 원을 지불했기 때문에 직배가 아니다라는 입장이었다. 직배반대 운동에 앞장서다 옥고를 치른 유동훈 영화인협회 이사장은 태흥 입장을 수용했으나, 이일목 시나리오분과 위원장은 태흥을 비판하면서 둘은 결별하게 된다.
 
태흥을 규탄하는 대자보가 돌자 곽정환 합동영화사 대표 겸 서울시극장협회장은 기다렸다는 듯 "더이상 참을 수 없다"며 자신도 12월 1일부터 미국 내 흥행 1위 <사랑과 영혼>을 서울극장에서 개봉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영화계가 들끓게 된다. 젊은 감독들이 중심이 된 '오늘의 영화감독모임'(회장 이장호)과 한국영화기획실모임이 각각 성명을 발표해 서울극장의 직배영화 상영중지. 위장직배 시비 종식 때까지 <다이하드2>의 개봉 연기 등을 촉구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상영저지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그만큼 직배 문제는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로 이어진 영화계의 뜨거운 감자였다.
 
스크린쿼터 감시에 헌법소원 낸 극장
 
 스크린쿼터감시단 시절 이정하와 양기환
스크린쿼터감시단 시절 이정하와 양기환양기환 제공
 
1993년 스크린쿼터감시단 출범은 직배 문제가 충무로 구체제의 이익과 연결되며 변질하는 양상으로 가자 영화운동이 택한 전술 변화였다. 영화인협회 유동훈 이사장-정지영 감독의 연대를 통해 영화인협회(영협) 안에 기획조사실이란 이름으로 스크린쿼터감시단 자리를 잡게 한 것은 효과가 있었다. 유동훈-정지영 두 사람이 직배 반대 투쟁 과정에서, 옥살이를 했던 경험도 연대에 작용했다.
 
당시 스크린쿼터감시단 사무국장을 맡아 실무를 책임졌던 이정하(전 영화평론가)는 "정지영 감독과 유동훈 이사장이 영협에서 일을 해달라 제안했고, 영협 사무실에서 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자 대종상 일을 권유한 것이었다"며 "사무실을 별도로 얻고 영화계 현안을 해결하는 정책실 기획실의 몫을 해달라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사실 직배가 허용된 이후 146일의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스크린쿼터)를 지키지 않은 극장이 상당했다. 서류상의 상영과 실제 상영이 달랐다. 이를 찾아내 고발하는 것이 스크린쿼터감시단의 역할이었다.
 
1993년 2월 발족한 스크린쿼터감시단은 5월 김혜준(전 영진위 사무국장)이 가세했고, 1994년에는 여기에 양기환(<블랙머니> 제작자.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이사장)이 합류한다. 한국영화 스크린쿼터사수 전사인 양기환이 한국영화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이었다.
 
양기환은 1990년대 초반까지 서울민중연합과 민족학교 등에서 활동하던 재야 활동가였다. 1990년대 초반 건강이 안 좋아 쉬고 있을 때 서울민중연합을 통해 알고 지내던 김혜준으로부터 권유받은 게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이었다. 김혜준은 "서울민중연합 사무처장과 하부조직인 중부민주시민협의회 의장을 겸임 비슷하게 맡고 있을 때 회원이 양기환이었다"고 말했다.
 
양기환은 "허리를 수술하냐 마냐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며 "많이 걷는 게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느 날 김혜준이 찾아와 건강이 어떤지 묻고 걸어 다니기 좋은 일이라면서 함께할 것을 제안했다"고 회상했다. 김혜준은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설립에 집중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은 1주일 2~3번 극장을 방문해 상영작을 확인한 후 구청에 신고한 상영대장과 비교하는 식이었다. 한국영화를 상영한다고 신고해 놓고 실제로는 외국영화를 상영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확인해 적발하는 것이었다.
 
양기환은 "강남 고속터미널에 있던 한 극장은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스크린쿼터) 146일 중 실제 한국영화를 상영한 날은 6일 정도에 불과할 정도였다"며 "스크린쿼터감시단에 적발되면 극장들이 200만 원~300만 원 돈을 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위반 시 영업정지를 받기 때문이다. 영업정지는 위반한 기한에 따라 3일~1주일로 누적되는데 극장으로서는 큰 손해였다.
 
당시 꼼꼼한 감시 활동으로 인해 신영균 배우가 운영하는 명보극장도 예외 없이 걸려드는 상황이었다. 충무로 구체제 입장에서는 엄격한 감시 활동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극장을 갖고 있던 쪽으로서는 대놓고 반대하기는 어려웠다. 영화인협회라는 영화계 대표조직 안에서 명분을 갖고 하는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전국극장협회 강대진 대표
전국극장협회 강대진 대표 한국영상자료원 소장자료
 
하지만 자신들을 옥죄는 활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충무로 구체제는 마냥 두고 보지 않고 반격에 나선다. 극장들이 앞장서 스크린쿼터가 위헌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한 것이다.
 
1994년 6월 당시 영등포 다복예술소극장 유원근 대표, 충주 오스카소극장 이원호 대표 등 소극장 대표 2명은 '스크린쿼터가 직업에 자유롭게 종사할 수 있는 직업수행이나 직업 행사의 자유를 제한한다'며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다.
 
이는 예고된 것이었다. 앞서 동아일보(1994년 4월 22일 자)는 '4월 20일 유성 리베라호텔에서 열린 94년도 전국극장연합회 정기총회에서 강대진(대구 만경관 대표)이 39대 회장으로 재선하고, 국산영화 의무상영일수(스크린쿼터) 제도에 대해 위헌 소원을 내기로 결의했다'고 보도했다. 개인이 낸 헌법소원이었지만 전국극장연합회 총회에서 결의된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영화운동 진영은 대응에 나섰다. 영상진흥법 제정을 위한 범영화인 연구위원회와 한국영화인협회(영협), 한국영화제작가협회(제협)가 반박성명을 낸 것이다. 1994년 대종상에서 감독상 수상을 놓고 심사과정에서 대립한 이후 충무로 구체제와 또 다른 충돌이었다.
 
이들 영화단체는 '스크린쿼터제도가 시대 적합성 및 국민적 설득을 상실한 불합리한 제도'라는 소송 청구인 쪽 주장을 반박했다. "우루과이라운드 협정 체결 과정에서 프랑스와 유럽연합은 시청각 서비스 분야를 협상 대상에서 제외했을 뿐만 아니라 방송 프로그램의 편성비율 규제 등의 제한 조처를 더욱 강화했다"고 맞받아친다.
 
또한 "국내 텔레비전 방송과 종합유선방송 등의 경우에서와 같은 편성비율 규제도 스크린쿼터와 같은 목적에서 마련된 세계적인 보편성을 확보하고 있는 사항으로, 국산영화진흥을 위한 제한은 국산영화 의무 제작제 등 다각적으로 이뤄지고 있기에 이런 제도는 국산영화진흥을 위해 도움이나 방해가 되는지에 따라 존속 여부가 결정돼야 한다"고 밝혔다.
 
젊은 영화인들과 연대하고 있던 영화인협회 유동훈 이사장과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이태원 회장은 "국내영화 육성보호제도가 거의 부재한 상황에서 스크린쿼터제의 폐지를 촉구하는 이 소송은 한국영화발전에 찬물을 끼얹는 처사로, 스크린쿼터제는 가장 실효성 있는 한국영화 보호 진흥책으로 결코 헌법정신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실무적인 대응은 이론에 밝은 데다 탁월한 정책 능력을 갖춘 이정하와 김혜준이 주도했다. 이정하는 "상대편은 변호사도 짱짱했으나 김혜준과 며칠 밤을 세워 책 한 권 분량의 반대 의견서를 만들었다"며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 중 가장 보람 있던 일이었다"고 회상했다.
 
헌법재판소는 1년 뒤인 1995년 7월 21일 '스크린쿼터제 위헌 아니다'라며 전원일치 기각 판결을 내린다. "스크린쿼터제는 국산영화와 외화 상영일수의 비율 외에는 영화선택에 대한 극장주의 결정권을 침해하지 않고 있고, 이 비율은 공공복리차원에서 제정된 영화법의 입법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를 직업선택의 자유 침해라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아울러 "경제 활동의 자유를 규정한 헌법 119조는 자유방임적 시장경제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며 외화독점과 국산영화 황폐화를 막기 위한 영화법 조항은 경제질서에 반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기각 이유를 밝혔다.
 
영협에서 쫓겨난 감시단 제협으로
 
그렇다고 1995년 상황이 녹록하게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유동훈 이사장이 물러난 후 1995년 영화인협회 이사장에 김지미 배우가 단독출마해 선출된 이후 스크린쿼터감시단은 영화인협회에서 사실상 쫓겨난다.
 
이정하는 1997년 펴낸 <영화와 글쓰기>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광주의 어느 극장이 연거푸 걸리자 영협 이사가 나를 찾아와 봐달라고 했으나 거부했다. 그게 몇 차례 반복이 되자 이분이 대뜸 감시단원들이 돈 받고 다닌다고 소문을 퍼뜨리겠다고 해 언성을 높여 원색적으로 싸웠다. 감시단은 영협에서 결의하여 만든 것이기에 이사회에 문건을 만들어서 나갔고, 정지영 감독님이 말렸지만 다 말해버렸다. 그는 잘못했다고 사과했다. 희한한 것은 이사회의 태도였다. 그를 제명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러면 되나' 몇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였고, 나머지는 시큰둥했다.
 
더 희한한 것은 그러고도 그 영협 이사는 유동훈 이사장, 정지영 감독, 나에게 매달리다가 다 거부당하자 반유동훈 진영을 형성했다. 스크린쿼터감시단을 싫어하는 세력이 여기에 다 붙었다. 선거는 몇 차례 유회 끝에 김지미 배우가 이사장에 단독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당선 후 김지미 이사장이 만나자고 해서 갔더니 감시단을 다시 하자고 해서 도와주겠다고만 했다. 그러나 김지미 이사장은 결국 스크린쿼터감시단을 다시 하지 못했다."

 
이정하는 "스크린쿼터감시단 일은 영화계의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얽혀 어려운 일이었고, 활동이 강화되자 적들만 늘어났다. 1994년 말 재정이 바닥났으나 영화인협회 이사장 선거를 앞두고 제작자들은 나 몰라라 했다"며 "김혜준이 없었더라면 더 빨리 백기를 들었을지도 모른다"고 회상했다.
 
김혜준은 "영협 이사장 선거가 끝난 뒤 영협 쪽에서 갑작스레 사무실 열쇠를 내놓으라고 요구해왔다"며 "자신들이 얻어준 것이니 나가라는 것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지영(감독)은 "당시 김지미 이사장이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을 계속하라고 별도의 사무실까지 마련해 주는 등 적극적이었다"며 "감시단원들은 그 사무실을 단순히 스크린쿼터 감시 활동뿐만 아니라 검열철폐 등 제반 영화운동의 공간으로 이용하고자 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어느 날 사무실에 남겨진 검열철폐 성명서 등의 문건을 발견한 김지미 이사장이, '감시단 활동하라고 마련해준 사무실을 반정부 활동하는 데 사용하려 한다'며 사무실 문을 닫아버렸던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결국 1995년 5월 이후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은 중단된다. 그러다가 다시 출발하게 된 것은 1년 뒤인 1996년 7월, 한국영화제작가협회(제협)를 통해서였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창립총회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창립총회영상자료원 소장 자료
 
한국영화제작가협회는 1994년 이후 영화운동과 충무로 구체제가 맞붙기 시작하던 시기, 영화운동 진영이 구축한 새로운 진지였다. 한국영화기획실모임을 모태로, 진보적 영화운동이 충무로 안에서 조직력을 강화한 것이었다.
 
영화운동 진영은 1987년 6월항쟁 이후 영화인협회 감독분과위원회에서 한국영화감독협회로 독립했고, 1980년대 후반 조감독협의회를 만들었으며, 민족예술인총연합회 영화위원회를 통해 문화계와 연대 전선을 펴고 있었다. 제협은 이들과 젊은 제작자들의 연대가 구체화된 것이었다. 제협 설립 실무를 담당했던 유인택(예술의전당 대표)은 "기존 충무로 구체제 조직인 한국영화제작업협동조합과 맞서는 단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제협 결성을 주도한 것은 한국영화기획실모임을 이끌고 있던 이춘연(작고. 씨네2000 대표)이었다. 실무적인 준비는 유인택과 함께 영화인협회 기획조사실에 있던 김혜준이 담당했다. 김혜준은 "1993년 말부터 제협 결성 준비작업을 진행했다"며 "유인택(제작자. 예술의 전당 대표)의 요청으로 참여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회장은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가 추대됐다. 이춘연은 "이태원 대표를 찾아뵙고 나서주길 부탁드린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혜준은 "영화제작협동조합과 비교되면서 너무 세대 간 갈등으로 외부에 비쳐지면 안 되니 이태원 대표께 요청해 보자고 해 찾아뵙고 부탁드렸다"며 "'너희들 생각에 동의한다'면서 수락하셨다"고 설명했다. 이태원 대표는 1988년 한국영화업협동조합 이사장을 강대선과 함께 공동으로 맡기도 했었다.
 
당시 한국영화제작업협동조합은 한국영화업협동조합에서 이름을 바꾼 것으로 오랜 시간 충무로에서 활동한 원로급 포함 80여 개 영화사가 가입해 있었다. 반면 제협은 한국영화 제작에 전념해 온 태흥영화사(이태원), 황기성 사단(황기성), 박광수필름(박광수), 강우석프로덕션(강우석 감독) 기획시대(유인택), 영화세상 (안동규) 등 15개 영화사 대표들이 만드는 단체였다. 대부분이 1985년 영화법 개정 이후 독립프로덕션으로 시작해 기획영화를 통해 성장한 영화운동의 본류들이었다.
 
두 단체의 차이는 제작에 더해 외화수입 여부였다. 기존 영화제작업협동조합은 한국영화의 제작과 외화수입을 겸하는 회사들이 모여 있었다. 반면 제협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외화수입이 아닌 한국영화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영화사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스크린쿼터 사수 의지가 강할 수밖에 없었다. 외화가 아닌 한국영화에 승부를 걸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1994년 2월 25일 자 기사에서 "영화제작업협동조합이 스크린쿼터 축소 논란처럼 외화와 국산영화의 이해가 부딪치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제작자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다"고 제협 출범 배경을 설명했다.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창립총회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창립총회영상자료원 소장 자료
 
1994년 2월 28일 한국영화제작가협회가 공식적으로 발족했다. 힐튼호텔에서 열린 창립총회에는 제작사 17개사와 독립프로덕션 15개사 대표에 더해 유현목·임권택 감독, 안성기·강수연·오정해 배우, 호현찬 평론가 등 150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이태원 회장을 필두로 부회장은 유인택 기획시대 대표와 정인엽 감독, 감사는 황기성사단 황기성 대표가 맡았다. 스크린쿼터 감시 활동을 측면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했으나, 이후 실질적으로 제협에서 주도하게 된다.
 
이태원 회장은 "한국영화제작업협동조합은 수입업자와 한국영화 제작업자, 극장업자들도 섞여 있어 한국영화를 살린다는 문제에 대해 같은 목소리를 내기 어려웠다"면서 "1993년 문화부가 스크린쿼터 20일 축소를 내놓을 때도 방어를 못 했다. 스크린쿼터에 대해 제작자와 극장업자 이해가 정반대로 갈리게 마련이니까 우리가 한국영화 언로구실을 해서 영화정책에 우리 입장을 적극 반영시켜보자는 생각이다"라고 포부를 밝혔다. 이어 "제협에 참여한 젊은 영화인들이 그간 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 놓은 공이 있지만, 영화계 선배들에 대해 너무 불신을 갖지 않았으면 한다"는 당부도 전했다.
 
제협은 '단기적으로 영상진흥법 제정과 스크린쿼터사수에 전력하며 온 국민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는 좋은 영화제작을 위해 관객·영화인·극장·정부·국회 등 모든 분야와 손잡고 매진하겠다'며 첫발을 딛는 각오를 밝혔다.
 
권영락은 "당시 회장은 이태원 대표가 맡았으나 대외적인 역할이었고, 실질적인 업무는 이춘연(씨네2000 대표)이 대부분 처리했다"고 말했다. 제협의 주축이었던 이춘연, 유인택, 안동규, 권영락 등은 모두 기획력을 바탕으로 대중의 호응을 얻으며 충무로의 입지를 넓히고 있던 한국영화의 기대주들이었다.
 
이들은 제협 결성 이후 1990년대 중반 한국 영화운동 진영의 야전사령부 역할을 맡기도 했다. 영화계 주요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대응책을 마련하는데, 이춘연과 유인택이 공동대표로 있던 씨네2000이 중심 역할을 한 것이다.
 
이화여대 영화동아리 '누에'와 서울지역대학영화패연합(서대영연) 연대사업국장으로 활동하다 씨네2000에 입사했던 조윤정(블루문픽쳐스 대표)은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영화제작이 하고 싶어 선배 언니의 추천으로 1996년 1월에 입사한 곳이 영화제작사 씨네2000이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제작한 유인택 대표님과 스릴러 영화 <손톱>을 제작한 이춘연 사장님이 만든 회사였다. 그때는 몰랐는데 영화계의 완전 사랑방이었고, 중요한 영화 관련 일이 있으면 바로바로 모여 의논하는 중요한 공간이었다.
 
이춘연, 유인택 두 대표님은 영화계에서 아주 중요한 분이었다. 1996년 10월에 부산국제영화제가 처음 열렸는데, 중앙대 이용관 교수(부산영화제 이사장)님이 자주 오셔서 부산국제영화제 창립과 관련하여 의논을 많이 했다. 강우석, 정지영 감독, 신철 사장님, 안성기, 박중훈 배우님이 자주 오셨다. 명필름의 <접속>이 대박이 나고 표절 시비가 났을 때도 회사에서 이춘연 사장님과 대책을 의논했다. 이창동 감독이 <초록물고기>를 준비할 때도 함께 힘을 모으는 분위기였다. 기획실 직원이었지만 우리 영화사가 뭔가 있어 보이고, 하루하루가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한국영화연구소 설립
 
 민족영화연구소와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을 함께했던 이정하(전 영화평론가)와 김혜준(전 영진위 사무국장)
민족영화연구소와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을 함께했던 이정하(전 영화평론가)와 김혜준(전 영진위 사무국장)이수정 제공
 
스크린쿼터 감시 활동이 중단됐던 1995년 12월 영화법이 영화진흥법으로 개정되면서 영화운동 진영은 대응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연구단체를 만든다. 임권택 감독이 이사장을, 주진숙 교수(전 영상자료원장)가 초대 소장을 맡은 한국영화연구소였다. 정책과 이론은 영화운동이 충무로 구체제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1996년 2월 5일 발기인 모임 때 참여를 밝힌 인원은 73명으로 김수용·정지영 감독, 이용관·이충직·주진숙·정재형·강한섭 교수, 이효인·이정하·변재란·유지나·정성일 평론가, 유인택 대표, 이광모 백두대간 대표, 조광희 변호사, 김혜준 등이었다.
 
창립준비위원장이기도 했던 주진숙(중앙대 교수, 전 한국영상자료원장)은 1996년 2월 발기인 모임 직후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영화진흥법 개정에서 88년부터 요구해온 내용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었다는 판단으로 새로운 현장과 이론의 접점 마련에 나섰다"고 밝혔다.
 
당시 문제가 된 것은 영화진흥법 시행령이었다. 영화진흥법 12조는 '영화는 상영 전에 한국공연윤리위원회(공륜)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 다만 소형 단편 영화 및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영화는 그러하지 않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시행령에는 '16mm 영화를 공륜의 심의를 받지 않고 상영하면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도록 했다. 이는 모법의 기본 정신 자체를 무효로 만든 것이었다.
 
스크린쿼터제에 따른 한국영화 의무 상영일수가 사실상 줄어든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시행령에는 문체부 장관에게 20~40일, 시장, 군수, 구청장 등에게 20일의 단축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이정하는 "영상진흥법이 제정됐으나 선언적 법률이었다. 대체 뭐가 바뀌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김혜준은 일반인의 소형·단편영화 제작 상영기회를 원천봉쇄하는 한편 스크린쿼터제를 축소해 달라는 미국의 요구를 문체부가 사실상 수용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국영화연구소는 1996년 5월 29일 문체부를 방문해 소형·단편영화 심의 폐지, 스크린쿼터 현재 상영일수 고수 등을 요구했다. 사전심의폐지와 영화진흥법 제정으로 단편 소형영화에 대한 검열이 사라지는 듯했으나 시행령이 영화진흥법 규정을 무효로 만든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신구세대가 충돌한다. 1년 이상 중단된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이 재개되던 시점에서 충무로 구체제가 공격을 해온 것이었다. 1996년 8월 21일 석관동 공연윤리위원회(공륜)에서 열린 한국에서의 완전등급제를 주제로 한 정기포럼에는 한국영화연구소 김혜준 기획실장의 주제발표가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한국영화인협회와 전국극장연합회 회원들이 발제에 앞서 욕설을 하며 소란을 피웠다. 이들은 '완전등급제는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일부 집단의 허황된 주장'이라며 토론에 제동을 걸었다. 김혜준은 "이분들이 '한국영화연구소의 정체를 밝혀라', '등급제 안 해서 한국영화 망했냐?'는 등 수차례의 '돌출' 발언과 함께 욕설을 퍼부었다"며 "그럼에도 대응하지 않고 준비한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위한 완전등급제에 대한 설명을 꿋꿋하게 이어갔다"고 회상했다.
 
완전등급제는 등급 외 판정을 받은 영화가 전용관에 수용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당시 서울시극장협회 곽정환 회장은 7명 감독이 연출한 옴니버스 영화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7가지 이유>의 경우를 들어 "포르노 판정을 받을 영화였는데, 공륜이 미성년자 관람 불가 판정을 내줘 극장에 걸 수 있었다"며 기존 사전심의제도를 옹호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그러나 1996년 10월 5일 영화 사전심의에 위헌결정이 내려진다.
 
당시 반발은 한국영화연구소가 참여하는 스크린쿼터감시단과 극장주들이 주축인 스크린쿼터지키기운동본부 간의 갈등이 표출된 것이었다. 전국극장연합회 강대진 회장 등은 스크린쿼터감시단을 겨냥해 원색적인 욕설을 퍼붓기도 했는데, 헌법소원이 기각된 이후 쌓인 감정 표출이기도 했다.
 
한국영화연구소는 설립 당시 영화산업 관련 조사, 영화 토론회 및 교양강좌, 정책 대안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기에 다양한 영화 강의를 개설하는 대중화 작업도 병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길게 이어지지 못한 것은 내부 갈등 때문이었다. 주진숙은 "이후 정재형이 소장을 김혜준이 부소장을 맡게 되지만, 운영에 이견이 생기면서 이후 활동이 흐지부지됐다"고 말했다.
 
 한국영화연구소 소장 지낸 정재형 평론가(동국대 명예교수)
한국영화연구소 소장 지낸 정재형 평론가(동국대 명예교수)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자료
 
정재형(영화평론가. 동국대 명예교수)은 1984년 작은영화제 당시 '영화법 개정의 의의가 검열폐지'라는 것을 밝히는 글을 썼을 만큼 영화법의 검열 문제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이장호 감독 <바보선언>이 각본과 본영화 검열 때문에 곤혹을 치렀다"며 특히 국회의원을 비난하는 퍼포먼스를 하기 위해 김명곤이 국회의사당 앞에서 춤을 추는 마지막 장면을 공륜의 검열을 의식해 국회의사당을 포커스 아웃시켜 희미하게 만든 것은 비난의 대상이었고, 당시 대학로에 있던 카페 8과 2/1에서 <바보선언>과 검열철폐를 위한 영화법 개정 토론회를 열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 자리엔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던 중 잠시 귀국했던 홍상수(감독)도 있었는데, 영화법 개정을 어떤 식으로 우리가 할 수 있을까를 밤새 고민했다. 영화인답게 영화제를 통해 축제의 형식을 빌려 자연스럽게 시민들에게 영화법 개정의 의의를 호소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고, 그런 문제의식 속에 작은영화제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정재형은 "그때 김의석(감독. 전 영진위원장)과 같이 기획을 맡았는데 영화단체들을 동참시키기 위해 남영동에 있던 서울영화집단에 찾아가 단장이었던 문원립(동국대 교수)과 홍기선(감독) 등을 만나 취지를 설명하고 동참을 허락받았던 일이 생각난다"고 덧붙였다.
 
다만 스크린쿼터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의 지점이 달랐다. 스크린쿼터연대 비대위 정책국장이었던 정재형의 생각은 "고수만 목적이 되면 안 되고, 스크린쿼터가 고수되는 시간 동안 정부로부터 제작·배급·상영에 대한 지원을 많이 끌어내야 한다. 그렇게 한국영화의 자생력을 키워야 스크린쿼터가 없어져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방향이었다.
 
정재형은 한국영화연구소 내부의 갈등에 대해 "인식과 방향성에 대한 차이였다"고 밝혔다.
 
"1984년 작은영화제는 현재 충무로 영화공동체의 시작이었다. 그것이 계간지 <열린영화>, <영화언어>로 연결되고, 한국영화연구소와 이후 충무로포럼, 영화인회의, 스크린쿼터문화연대 등으로 이어져 충무로의 새로운 동력이 된 것이다. 한국영화연구소는 이제 운동성보다도 프로젝트를 통해 연구중심으로 멀리 봐야 한다는 인식이었다. 대학에 있는 내가 소장이 돼서 대학인력을 투입해 운영하는 것이 프로젝트를 받는 데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과 달랐던 듯 김혜준 사무국장이 소장 경선에 나왔고, 주진숙·이용관·유인택·강한섭,·이충직 등 다른 위원들이 둘의 대립보다 같이 일하게 하는 방식으로 결정해서 그 뜻에 따랐다. 나를 소장으로 하고 김혜준씨를 부소장으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사장인 임권택 감독 재가를 받아야 하는 일을 김혜준이 독단적으로 처리한 걸 두고 문책하면서 사이가 벌어졌다"며 "이후 한국영화연구소가 충무로포럼으로 변화되면서 자연 정리됐다"고 말했다.
 
김혜준은 한국영화연구소 활동에 대해 "영화진흥법 개정, 심의제도 개선, 적극적인 영화진흥책, 방송과 영화의 연계 방안 등을 다룬 <한국영화 환경,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바꿀까>라는 연구 자료집을 발간했다"며, "영진위 설립과 활동의 방향성을 제시했고, 막 창간된 '씨네21'과 함께 추진한 대대적인 검열철폐 운동을 통해 그해 영화 사전심의는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끌어내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시민단체와 손잡은 스크린쿼터 감시
 
 프랑스에서 스크린쿼터 문제를 알리고 있는 양기환(왼쪽 두번째)과 옆에서 통역을 맡은 이수원(전남대교수. 전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
프랑스에서 스크린쿼터 문제를 알리고 있는 양기환(왼쪽 두번째)과 옆에서 통역을 맡은 이수원(전남대교수. 전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 양기환 제공
 
제협을 통해 1996년 재개된 스크린쿼터감시단은 시민단체와 연대를 통해 활동을 강화해 나갔다. 정지영 감독과 이춘연 대표가 공동위원장을 맡고 시민단체 경제정의실천연합(경실련)이 가세했다. 한국영화 시장을 지키려는 자구행위에서 불법행위와 부정부패 추방하겠다며 기조를 바꾼 것이다. 양기환은 "1995년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이 중단된 후 1년간 쉬고 있었는데, 다시 나를 찾더라"며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게 됐다"고 말했다.
 
스크린쿼터감시단 운영은 제협의 입지 강화에도 중요하게 작용했다. 외화수입을 하지 않고 한국영화에 집중하고 있던 제협 소속사들에게 스크린쿼터 감시는 유용한 보호 장벽이면서 충무로 구체제를 견제하고 영화운동의 전선을 넓히는 도구였다. 양기환은 스크린쿼터감시단이 한국영화에 기여한 부분을 이렇게 설명했다.
 
"가장 큰 것은 사문화된 146일 한국영화 의무상영일수를 부활해 정착시킨 것이었다. 극장에서 한국영화를 상영하지 않으면 제작사의 수익성이 낮아지고 제작비 회수가 안 되면 경쟁력이 약해지게 된다. 그런데 스크린쿼터가 제대로 유지되면서 한국영화 선순환구조가 시작된다. 한국영화 제작사로 영화배급 요청이 들어오고 경쟁력 있는 한국영화는 바로 제작비 회수가 가능해진 것이다."
 
'영화마당우리'와 '영화공간1895'에서 에서 활동하다 신씨네(신철 대표)에 입사해 제작과 배급을 담당했던 이하영(프로듀서)은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지금 같은 배급사가 없고 제작사가 영화배급까지도 담당하던 시절이었기에 이론서에 나온 대로 흥행 책임을 전적으로 제작자(PD)가 져야 했다. 당시 한국영화를 위해 스크린을 자진해서 열어주는 극장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직배사가 가져온 할리우드영화만이 최고였던 시기라 한국영화를 배급하려면 모든 극장에 찾아가 머리 숙여 '한 번만 봐주세요' 읍소해야 했다.
 
영화를 만들고 배급하려면 이미 터를 잡고 있었던 할리우드 직배사들의 배급라인을 빌려야만 했다. 많이 만들어도 2년에 한 편 정도 만드는 제작사가 1년에 약 10편 정도의 라인업을 갖춘 할리우드 직배사의 배급을 따라 할 수는 없으니 그들의 배급라인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양기환도 비슷한 경험을 전했다. "1997년 11월 개봉한 이정국 감독 <편지>가 흥행하고 있었는데, 극장들이 스크린쿼터를 채운 후 바로 내리고 외국영화 <자캴>을 상영했다"면서 "할리우드 직배사가 안정적인 영화공급이 가능하다 보니 스크린쿼터만 채운 후 잘 되는 한국영화라도 상영 작품에서 제외했다"고 말했다.
 
그래도 이 시기 스크린쿼터는 한국영화의 버팀목이었다. 이하영에 따르면 스크린쿼터로 인해 한국영화 최고의 시즌은 11월이었다.
 
"1년 중 146일 동안은 한국영화를 의무적으로 상영해야만 했다. 감면제도를 적용해도 최소 126일이었다. 이 때문에 11월쯤 되면 극장들이 다급해진다. 외화만 집중해 상영한 탓에 한국영화 일수가 부족하다는 것이 실감 날 때다. 스크린쿼터를 못 채우면 그만큼 일수의 영업을 할 수 없으니, 부랴부랴 한국영화들을 개봉하는 것이다. 1998년 김유진 감독 <약속> 같은 경우 11월에 개봉돼 대박을 냈다. 스크린쿼터도 채우고 돈도 버니 극장들은 웃음이 만연했다."
 
양기환은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이 강화되면서 1999년 강제규 감독 <쉬리>가 582만 관객(한국영화공식연감 기준)을 기록했고, 2000년대 이후 천만 영화가 나온 것이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스크린쿼터 감시 활동이 한국영화 르네상스에 기여한 것이었다.
 
양기환은 또한 "스크린쿼터사수는 1994년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가 맺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서 멕시코가 미국의 요구에 굴복해 영화산업이 파탄난 사례가 경각심을 일깨웠고, 신자유주의 반대 투쟁으로 확장됐다"고 설명했다.
 
이정하의 절필
 
 이정하 (전 영화평론가)
이정하 (전 영화평론가)KBS화면
 
1996년 스크린쿼터감시단이 재출범하면서 생겨난 변화는 그간 활동을 주도했던 이정하가 빠지고 양기환이 책임을 맡게 된다는 점이다. 긴 시간 영화운동 이론과 정책작업을 주도했던 이정하가 영화계와의 결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1996년 2월의 이른바 '이정하 절필선언'은 영화운동에서는 충격이기도 했다. 발단은 평론이었다. 이정하는 1985년 계간지 <열린영화> 편집을 돕다가 연세대 영화서클 영화패-서울영화집단-민족영화연구소 등을 거쳐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을 했지만, 한국영화의 파수꾼 역할을 하며 영화평론도 꾸준히 기고하고 있었다.
 
논란이 발생한 것은 1996년 1월 개봉한 김성수 감독 신작 <런어웨이>에 대해 영화전문지 '씨네21'에 기고한 영화평이었다. 이정하가 <런어웨이> 영화평 끄트머리에 "그런데 왜 영화감독은 자살하지 않는 것일까. 저렇게 가객들이 죽어가고 있는데"라는 문구를 덧붙인 것이었다.
 
'씨네21'에 따르면 이를 본 이현승 감독은 무척 화가 났다. 비록 당사자는 아니었지만, 아끼는 동료 감독이자 후배 감독을 향해 자살 운운한 대목을 참기 힘들었던 것이다. 그는 '씨네21' 표지에 사과 문구를 넣거나 평자를 교체하라고 요구하다가, 반론을 통해 뜻을 전하기로 했다.
 
이어 기고한 글에서 "이것이 영화평론인가, 아니면 자신이 잘 아는 이웃을 처치해야 하는 고뇌에 찬 보안관을 다룬 시나리오인가"라며 "영화평에서 주체인 영화가 사라졌다"는 요지로 비판했다.
 
그리고 나온 이정하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영화평론을 그만두겠다는 것이었다. '씨네21'에 따르면 이정하는 "이현승 감독의 공격은 동업자(평론가) 일반이 아니라, 특정 평론가, 즉 자신을 겨냥해야 했다"면서, "문제가 된 글과 표현에 대해선 변명도 해명도 하고 싶지 않다. 이해도 오해도 바라지 않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그러잖아도 영화평론을 그만둘 계획이었는데, 이 일로 "껍데기를 벗었다"는 인사를 끝으로 영화계를 떠나게 됐다고 전했다.
 
한국영화로서는 커다란 아쉬움이자 손실이었다. 이정하의 부인인 이수정(감독)은 "이정하가 쓴 '왜 영화감독은 자살하지 않는가'는 김성수 감독을 지칭하는 게 아닌 영화감독 일반을 말했다고 본다"며 "당시 패션처럼 흘러가는 영화 그 자체에 대한 환멸과 함께 자신이 꿈꿨던 영화가 이제 너무 시시하게 흘러가는 세태에 대해 실망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어 "김성수 감독의 훌륭했던 단편에 반해 실망스러운 <런어웨이> 평을 쓰며 개탄했던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이정하는 저서 <영화와 글쓰기>에서 절필선언 이후인 "1996년 여름 스크린쿼터감시단이 다시 만들어지면서 맡아달라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사양했다"며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그렇게 중요한 일이라면 자기들이 할 것이지 누군 감시단을 위해 태어났나. 세상은 사심없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무슨 봉으로 안다. 앞에서는 침이 마르고 뒤에서는 빈정거린다"면서 김혜준의 한국영화연구소 활동을 예로 들었다. 헌신적인 활동을 가볍게 생각하는 데 대한 서운함이었다.
 
"김혜준은 1996년 봄에 한국영화연구소가 만들어지면서 안살림 바깥 살림에 머리와 팔다리를 다 맡았다. 연구소를 찾는 사람들은 자료 하나라도 얻어가려 하지 보태주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럴 때는 내 일처럼 화가 난다. 그러면서도 '그가 없으면 연구소가 안 된다'고 했으나, 그게 될성부른 일이었다면 '내가 아니면 안 된다'로 바뀌었을 것이다"

곽정환의 구속
 
 한국영화 대부였던 서울극장 합동영화사 곽정한 대표
한국영화 대부였던 서울극장 합동영화사 곽정한 대표영상자료원 소장 자료
 
영화운동 쪽에서 이정하 절필선언이 충격을 줬다면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이 재개한 이후 충무로 구체제 내부에서는 주요 인사들이 구속되는 일이 발생한다. 1996년 10월 서울극장 곽정환 대표의 구속은 파장이었다. 그런데 구속 이유가 1989년 발생한 직배영화 상영 극장 방화사건이었다. U[P 직배영화관 방화사건을 주도하고 배후조정한 것이 한국영화 최고 실력자란 사실이 7년 만에 드러난 것은 충격이었다.
 
당시 방화로 피해를 봤던 씨네하우스 대표 정진우 감독이 진실을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정진우 감독에 따르면 1996년 가을 미국 LA에 갔다가 귀국 전날 지인 등과 한국식당인지 일본식당인지에 들어갔는데, 우연히 당시 방화사건의 주역이었던 이일목(시나리오 작가)을 마주쳤다고 한다.
 
"예전 일 때문에 무시하고 식사 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데 갑자기 이일목이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와서는 무릎을 꿇었다. 그러면서 진실을 말하고 싶다며 묵고 있는 호텔을 알려달라고 했다. 머뭇거리는데, 같이 있던 일행들이 또 불 지르겠냐며 알려주라고 하더라.
 
이일목이 다음 날 아침 8시에 호텔로 찾아왔다. 거기서 곽정환이 핵심이었다고 말하는 거다. 글로 정리한 내용을 가지고 왔더라. 내용을 보니 1989년에 마포 가든호텔에서 곽정환과 김승(극동스크린 대표) 등이 모여서 '정진우 감독이 UIP랑 돈을 긁어모으고 있다. 그냥 놔두면 다 망한다. 뱀을 풀고 불을 질러야 한다'고 논의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출국을 하루 연기하고, 글로 정리한 문서를 대사관에 가서 공증받아오라고 했다.
 
그래서 귀국 후 검찰에 고소한 거다. 곽정환이 연행된 날은 당시 광화문에 있던 문화부에서 영화인들의 간담회가 예정돼 있던 날이었다. 검찰 수사관들이 문화부 앞에서 기다리다가 들어오던 곽정환을 바로 연행한 것이다."

 
정진우 감독은 이일목이 증언한 이유에 대해 "곽정환이 공소시효 계산을 잘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일반 방화사건은 5년이 공소시효인데, 사람이 주거하는 현주건조물 방화는 공소시효가 10년이었다. 곽정환이 5년 동안 지원해 주다가 끊으니까 이일목이 불만이 생겨 털어놓은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당시 검찰은 10월 17일 곽정환 대표를 구속하면서 김호선 감독과 김승 등이 방화를 모의한 사실을 확인했으나 범행 가담 정도가 가볍다고 보고 불구속 입건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한 달 뒤인 11월 17일에는 이태원 회장도 구속된다. 당시 2~3개 영화업체가 수입액을 축소 신고하는 방식으로 세금을 적게 냈다며 탈세 혐의를 적용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정진우 감독은 "아마도 곽정환이 조사받는 도중 이태원의 목소리가 들리니 자기 면회를 온 줄 알았나 보더라. 그런데 자기는 안 만나고 검사에게 다른 이야기를 하니 홧김에 다 불었던 것으로 들었다"고 말했다. 충무로 구체제 인사들의 감정싸움이 두 거물의 구속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정진우 감독은 이후 곽정환에 대해 탄원서를 써줬다고 한다. "곽정환이 장모상을 당해 수감 중에 형 집행 정지로 잠시 나왔다가 나를 찾아와서는 '뼈가 다 부서지는 것 같다'며 사정했다. 한겨울에 난방도 안 되는 곳에서 지내기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탄원서를 썼다"고 말했다. 곽정환 대표는 구속 5개월 만인 1997년 3월 보석으로 풀려난다. 보석금이 1억은 당시 역대 최고액으로 장안의 화제였다.
 
정진우 감독은 "곽정환과 많이 싸웠지만 그래도 말년에 자주 만났고,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본 사람도 나였다"면서 "한국영화의 큰 인물이었다"고 애틋한 감정을 나타냈다.
 
신구세력의 첫 정면대결
 
 영화인협회 이사장 선거에서 맞붙었을 당시의 김지미 배우, 정지영 감독
영화인협회 이사장 선거에서 맞붙었을 당시의 김지미 배우, 정지영 감독MBC 화면
 
충무로 구체제는 내부 갈등에도 불구하고 기득권 유지를 위해서는 똘똘 뭉치는 모습을 보였다. 1998년 영화인협회 선거는 한국영화의 공식적인 조직을 차지하기 위해 영화운동 진영이 충무로 구체제에 도전장을 낸 것으로, 신구세력의 첫 정면 대결이었다.

1995년 영협 이사장이 된 김지미 배우는 재선을 원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출마한 게 정지영 감독이었다. 김지미 이사장을 지원하는 보수적인 충무로 구체제와 정지영 감독을 지원하는 진보적 영화운동의 진영대결이었다. 충무로 구체제는 영화인협회를 넘겨주면 기반이 흔들리는 것이었고, 영화운동은 선거를 통해 개혁의 기회를 살려야 했다.
 
유인택은 "당시 정지영 감독 선거본부가 명동 퍼시픽호텔에 차려졌다"면서 "당시 '오늘의 영화감독모임' 대표 이장호 감독 등이 선거를 지원했다"고 회상했다.
 
1998년 4월 3일 열린 선거는 김지미 영화인협회 이사장 재선으로 결정난다. 하지만 곳곳에서 문제가 드러난다. 김지미 배우는 86표 중 81표를 획득했는데, 145명 중 88명만이 참석한 것으로 정족수 3분의 2 미달이었다.
 
당시 선관위는 '시나리오작가협회가 96년과 97년 회비를 미납해 대의원 자격이 없다'며 정족수를 130명으로 해석했으나, 정지영 감독이 회비 납부 사본을 제출했음에도 투표를 강행한 것은 무리한 판단이었다.
 
특히 선거인 명부를 당일 오전까지 공개하지 않자 정지영 감독은 "선거운동기회 자체를 봉쇄한 것은 불공정 선거 관리"라고 항의하며 총회 불참을 선언했고, 정지영 감독을 지지했던 시나리오작가협회와 배우협회 대의원도 불참했다.
 
곳곳에서 문제가 드러나자 4월 6일 선거관리위원회는 총회 결과를 원천무효로 선언하고 23일 재선거를 치른다. 하지만 결과는 145표 중 김지미 99표, 정지영 44표였다. 기득권 수호를 위해 뭉친 충무로 구체제의 벽을 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후 영화운동 진영은 충무로 구체제와의 결별을 준비한다. 1998년 발족한 충무로포럼은 준비단계였다. 1990년대 후반은 충무로 구체제가 영화계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부산영화제의 성공으로 인해 영화운동 진영의 입지가 강화된 시기였다. 선배세대들의 기득권 유지에 맞설 힘과 조직이 하나둘 갖춰지고 있던 때였고, 충무로포럼은 그 연장선이었다.
 
배우 문성근이 대표를 맡고, 유인택이 기획, 배우 명계남과 김혜준이 홍보와 연구를 맡은 충무로포럼은 4인이 주도적으로 나서기는 했으나, 영화인협회 선거 패배 이후 영화운동 진영이 새로운 방향을 설정한 것이었다.
 
유인택은 "제협이나 충무로포럼 등 대부분의 영화계 현안은 나와 이춘연, 문성근, 김혜준이 함께 논의해서 한 것이었다"며 "실행단계에서 역할 분담을 했고, 누군가가 특별히 제안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기억했다.
 
 <초록물고기>에 출연한 문성근 배우
<초록물고기>에 출연한 문성근 배우시네마서비스
 
충무로포럼은 표면적으로는 정부의 영화정책을 주제로 토론하는 자리였다. 영화계 현안과 영화정책에 대한 이견을 조율하고 정부와 교류하는 토론마당 성격이었다. 하지만 영화인협회에 대응할 새로운 조직 건설의 전 단계였다는 것이 유인택의 설명이다.
 
"우리는 선배들과 같이 가려고 노력했었다. 한국영화가 어려웠던 때였기에 통합과 포용을 위해 애썼는데, 안 됐다. 협회로 만들 수는 없고 첫 단계로 충무로포럼이란 이름을 써서 조직이 아닌 토론 모임으로 출발했다. 첫 번째 토론이 스크린쿼터를 주제였는데, 포럼으로서 첫발을 떼기 알맞은 주제였다. 물론 별도 연대 조직으로서 발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준비하면서 후배된 입장으로 영화인협회 김지미 이사장을 찾아가서 이런 모임을 만든다고 사전에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그런 걸 왜 만드냐?'며 매우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더라."
 
당시 배우보다 영화운동가가 어울린다는 평가를 받던 문성근(평창국제평화영화제 이사장)은 동아일보(1999년 4월 2일 자) 인터뷰에서 당시 한국영화 현안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 계기를 이렇게 말했다.
 
"DNA에 무슨 그림자가 비쳤는지 삶에 대한 혐오와 자기학대가 심했고, 위선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해 늘 자신이 없는데, 97년 가을 생각이 달라졌다. 순간순간 위선이라고 느껴질지언정 큰 흐름이 옳다면 뛰어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지금도 나를 믿지 못하지만 위선적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생각을 바꾸게 된 데는 <초록물고기> 흥행 실패 영향도 컸다. 이런 영화도 안 되는데, 무슨 영화를 하겠다고 '에이 안 할래' 하고 주저앉았다가 문득 구더기처럼 꼼지락거리지만 말고 환경을 바꿔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영화사에 없을 만큼 장엄

충무로포럼은 첫 모임부터 스크린쿼터 문제가 중요하게 부각된다. 한겨레신문(1998년 11월 26일 자)에 따르면 '11월 24일 저녁 서초동 서울영상벤처센터 2층에서 열린 충무로포럼 첫 모임은 미국의 스크린쿼터제 철폐 추진 문제가 삽시간에 스크린쿼터 수호 대책회의장으로 변할 만큼 뜨거웠다.
 
이날 포럼은 영화계 현안인 영화 관계법 개정 추진 현황과 정부의 영화진흥정책 등에 관해 자유롭게 묻고 답하는 자리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양기환이 스크린쿼터 관련 질문을 던지면서 사태는 급변했다. "스크린쿼터가 아예 없어지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정부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면서 11월 15일~20일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투자협정 3차 실무협상에 참석하고 온 문광부 영화진흥과 박영대 서기관에게 답변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박 서기관이 "미국 쪽이 이번 기회에 폐지를 밀어붙이려 하고 있다"고 답변하는 순간, 여름 반대 투쟁 이후 현상 유지 쪽으로 결론 난 것으로 알고 있던 영화인들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문화부 입장은 확고하지만, 협상은 외교부가 주도해 미국이 상당한 강도로 스크린쿼터 폐지를 요구하고 있고, 한국이 이를 수용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 확인되면서 영화계는 비상상황에 돌입한다.
 
 노래로 태양을 쏘다 한 장면. 스크린쿼터대책위 공동대표 임권택, 김지미 이태원
노래로 태양을 쏘다 한 장면. 스크린쿼터대책위 공동대표 임권택, 김지미 이태원스크린쿼터감시단
  
 스크린쿼터감시단에 기부했던 차인표 배우
스크린쿼터감시단에 기부했던 차인표 배우양기환 제공
 
앞서 1998년 7월 27일 영화계는 김지미 영협 이사장과 임권택 감독, 이태원 태흥영화사 사장을 공동대표로 '스크린쿼터사수 범영화인비상대책위'를 발족했고, 한미투자협정 영화분야 제외, 스크린쿼터 제외 발언을 한 한덕수 통상교섭본부장 교체 등을 요구했다. 당시 차인표 배우는 500만 원을 스크린쿼터감시단에 후원했고, 안성기와 심은하 배우도 출연료 일부를 기금으로 내는 등 한국영화의 스크린쿼터사수 의지는 강했다.
 
스크린쿼터 폐지 우려가 커지면서 12월 1일부터 명동성당과 남산 감독협회에서 영화인들의 밤샘 농성이 시작됐다. 12월 2일에는 광화문에서 한국영화 죽이기 음모 규탄대회가 열렸고, 1998년 12월 7일에는 뤽 베송, 코스타 가브라스, 롤랑 조페, 장 뤽 고다르 감독 등 프랑스 감독 배우 170명이 지지성명을 발표하며 국제연대를 나타냈다.
 
당시 '스크린쿼터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 공동 집행위원장을 맡고 있던 정지영 감독은 "스크린쿼터를 늘려달라고 요청할 생각이었는데, 난데없이 축소 이야기가 나오니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이 분위기는 1999년으로 넘어가 6월 24일에는 영화인 1200명이 광화문 네거리에서 스크린쿼터 축소 저지결의대회를 열고 감독과 제작자 등이 집단 삭발을 감행할 만큼 강력한 투쟁 의지표출로 이어졌다. 임권택·강제규·임순례 감독, 이용관 교수, 이은 대표 등이 삭발로 항의했고, 서강대 영화공동체 출신 조재홍(감독)은 이날부터 스크린쿼터 투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노래로 태양을 쏘다> 촬영에 돌입했다. 1999년 4회 부산영화제에서는 영화인들이 스크린쿼터사수를 위해 관객들과 함께하는 행사가 개최하는 등 연대가 계속됐다.
 
앙기환은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은 1998년부터 2006년까지 비상대책위 가동 등으로 이어졌다"며 "정확히는 2008년까지 10년간 투쟁했다"고 말했다. 이어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은 한국 영화인들을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신자유주의 맞선 한국 영화인들의 투쟁은 세계영화사에 없을 만큼 장엄한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스크린쿼터감시단은 2000년 이후 스크린쿼터문화연대라는 이름으로 확대해 방송 쿼터제 감시와 국제연대 활동 등 사업을 전개했다.
   
 스크린쿼터에 반대하면 삭발하는 임순례 감독
스크린쿼터에 반대하면 삭발하는 임순례 감독양기환 제공
 
 1999년 부산영화제 당시 스크린쿼터 사수 의지를 밝히고 있는 영화인들
왼쪽부터 권영락, 강제규, 성명불상, 정지영, 박중훈, 방은진, 양기환, 강수연, 안성기
1999년 부산영화제 당시 스크린쿼터 사수 의지를 밝히고 있는 영화인들 왼쪽부터 권영락, 강제규, 성명불상, 정지영, 박중훈, 방은진, 양기환, 강수연, 안성기 부산영화제 제공
 
스크린쿼터 반대 투쟁은 한국영화의 중요한 현안이었기에 충무로 구체제도 동참하면서 신구갈등이 잠시 덮이는 분위기가 된다. 그러나 영화운동 진영이 전반적인 투쟁을 주도하면서 충무로 주도권을 쥐게 되자, 충무로 구체제가 위기감을 느끼면서 영화운동 진영과 또 충돌하게 된다.
 
1999년 4월 20일 YMCA 대강당에서 열린 충무로포럼 4번째 토론마당은 충돌의 빌미가 됐다. 영화진흥공사를 대체할 영화진흥위원회 출범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기에 이날 토론에서는 바람직한 영화진흥위원장 후보로 당시 김동호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정지영 감독, 문성근 배우가 거명됐다.

또한 영화진흥위원으로 문성근, 정지영, 김혜준, 김동호, 안성기, 유인택, 이용관, 이충직, 유지나, 강한섭, 임권택, 박광수, 강우석, 심광현(한예종 영상원 교수)가 거론됐다. 한국독립영화협회는 여기서 더 나아가 "영진위 구성에 구시대 인물과 검열의 칼을 휘둘렀던 공연예술진흥협의회 관련 인물들 배제해야 한다"며 충무로 구체제를 겨냥했다.
 
그러자 반격이 들어온다. 충무로 구체제가 민감하게 반응했다. 한국영화인협회 김지미 이사장이 부당집회를 중단하라고 경고한 것이다. 김 이사장은 "영협 회원들이 별도의 모임을 구성해 무분별한 결의 등을 발표하는 것은 그 취지가 아무리 좋아도 영화계 반목을 야기시키고 적법 단체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이어 "협회 회원은 소속단체를 통해 청원 진정 제안 등의 민주적 토론절차를 지켜주기 바라며 이를 위반해 물의를 일으키면 영협 정관에 의거 조치하겠다"고 강경한 방침을 밝혔다.
 
영화운동 진영도 지지 않았다. "영협 관계자들은 대종상의 권위를 떨어뜨린 장본인이고, 스크린쿼터 투쟁도 영협을 중심으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영협은 오히려 스크린쿼터감시단을 협회 사무실에서 쫓아내기까지 했다"며 묵은 감정을 드러냈다. "영화계 10년 숙원인 영화진흥법 개정에 반대해 놓고 이제 와 신임 위원장에 연연한다"며 반발했다.
 
당시 동아일보(1999년 4월 22일 자)는 "1998년 문성근, 명계남, 김혜준 등 소장파가 주축이 돼 발족한 충무로포럼은 스크린쿼터 축소 위기를 처음으로 제기하는 등 영화계 여론을 주도하는 역할을 해 왔다"며 "영진위 주도권을 놓고 신구세대의 힘겨루기이고, 젊은 세대가 제작현장을 주도한 데 이어 원로들의 영역이었던 영화기구 구성에도 목소리를 내자 원로그룹이 위기의식을 느껴 반격을 가한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1999년 5월 9일 새 영화진흥법이 발효되면서 영화진흥공사를 대체한 영화진흥위원회가 출범했으다. 정부가 발표한 영진위원 10인 중 신세길 위원장(전 삼성물산 유럽본부장)에 이어 충무로포럼 대표였던 문성근 배우가 부위원장으로 선임되자 김지미 영협 이사장과 직전 영화진흥공사 사장이었던 윤일봉 배우가 반발했다. "정족수 미달에 따른 위원 수로 발족했다고 인정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편 것이었으나, "부모뻘인 선배들을 매도했다"는 감정도 섞여 있었다. 신구세대의 갈등은 영진위 주도권을 놓고 이후로 더 깊어진다.
 
충무로포럼은 6월 8일 성명을 내고 한국독립영화협회가 배포한 성명서에 한국영화계 원로 몇 분의 실명이 거론된 점에 대해 유감의 뜻을 나타내고 사과를 표했으나, 한편으로 스크린쿼터사수 투쟁을 동력으로 새로운 조직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새로운 조직과 영화운동을 모색한 영화인회의 출범
 
 영화인회의 준비위원회 자료
영화인회의 준비위원회 자료성하훈
 
1998년 8월 18일 오후 5시 안국동 느티나무 카페에서 열린 한국영화인회의 발기인 대회는 새로운 영화 조직 출발을 선언하는 자리였다. 강제규·이광모·홍상수 감독, 이춘연·유인택·권영락·차승재·신철·이은 제작자 등 231명의 발기인은 "한국영화계에 21세기가 초래할 급격한 환경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조직이 없다"며 "현실을 직시해 새로운 조직과 영화운동을 모색하고자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공동 준비위원장으로 박광수 감독, 명계남 이스트필름 대표, 주진숙 중앙대 교수 3명이 선임됐다.
 
영화운동 진영의 새로운 조직 건설 움직임에 영화인협회는 8월 17일 이사회를 열어 "회원 가운데 영화인회의에 참가하는 사람은 제명할 것을 결의"하면서 양쪽은 힘겨루기에 들어갔다. 그렇지만 한 달 뒤인 1999년 9월 17일 서울 스카라극장에서 영화인회의가 닻을 올린다.
 
공동의장은 김동원 독립영화협의회 이사장, 유인택 영화제작가협회 회장, 장선우 감독, 이용관 교수, 유지나 교수 등 5인이었고, 사무총장은 명계남 배우였다. 이외 정책위원장 심광현, 기획위원장 이은, 편집위원장 양윤모, 권익복지특별위원장 권영락 제협 부회장. 통합시청각득별위원장 원용진 동국대 교수로 구성됐다.
 
신씨네, 기획시대, 우노필름, 명필름 등 제작사 대거 참여한 데다 평론과 학계, 영화제 등 기존 충무로 구체제가 '영화인' 대신 '영화관계자'로 분류했던 인사들까지 모두 포괄한 조직이었다. 1979년 홍기선 김동빈 문원립 등 서울대생 3명이 '얄라셩영화연구회'로 모이며 출발한 진보적 한국 영화운동이 20년 만에 영화인협회에 맞설 단일 조직을 세운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영화인협회가 주도했던 충무로 질서의 재편이기도 했다.
 
영화인회의 초대 이사장은 정지영 감독이었으나 2000년 12월 정기총회에서 영화사 씨네2000의 이춘연 대표를 이사장으로 선출한다. 유인택은 "이춘연이 영화인회의 간판 역할을 맡게 된 것이었다"고 말했다. 정지영은 "새 조직에 대한 영화인들의 기대에 부담을 느껴 1년 만에 그 자리를 넘겨주게 된 것이다"라고 기억했다.
 
명계남(배우)은 "한국영화 격동기에 충무로포럼을 통해 영화계 현안 점검과 개혁, 대안모색을 주도해오다 새로운 현장중심의 영화인 구심체 필요성이 대두되지 영화인회의 창립 공동 준비위원장을 맡아 산파역을 맡았던 것이다"라며 "출범시 영화인의 중지를 모아 정지영 감독을 초대 이사장으로 모시고 그 밑에서 사무총장을 맡아 2000년 5월 기관지 'KAFAI'를 발간하는 등 안정기까지 일했다"고 회상했다.

격월간 영화전문지였던 'KAFAI'는 영화인회의 영문명인 Korean Association of Film Art & Industry의 이니셜을 따 붙인 것으로 창간호에는 공식출범한 여성영화인모임, 디지털영화를 집중 조명한 디지털 혁명과 영화에 관한 특집물을 비롯해 한국영화미리보기, 한국영화비평, 영화인 동정 등으로 구성됐다.

정재형(동국대 교수)은 "새로 탄생한 충무로포럼엔 크게 참여하지 않았으나, 이춘연 이사장이 끌고 가면서 현장 중심의 영화인연대로 이어져 갔다"고 말했다. 다만 "이때부터 내내 같이 움직여왔던 학계와 현장 공동체의 틈이 벌어진 느낌이 든다"고 덧붙였다.
 
신구갈등이 깊어지면서 충무로 구체제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던 영화운동 진영을 빨갱이 좌파로 매도한다. 신구갈등은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며 보혁대결로 양상이 바뀌지만 2000년대 이후 충무로 중심축이 진보적 영화운동 진영으로 넘어온 것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유인택은 보혁대결로 치닫던 당시의 분위기에 대해 "부산영화제 초기 개막식이 끝나면, 다음날 문체부 장관 등과 영화인들이 모여 조찬을 같이했다. 한번은 배우협회 신우철 회장이 식사 자리에서 나를 향해 빨갱이 좌파라고 심하게 비난을 했다"고 말했다.
 
분위기가 경색되려는 순간 배우 강수연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니고 양파."
영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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