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영화연구소와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을 함께했던 이정하(전 영화평론가)와 김혜준(전 영진위 사무국장)
이수정 제공
스크린쿼터 감시 활동이 중단됐던 1995년 12월 영화법이 영화진흥법으로 개정되면서 영화운동 진영은 대응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연구단체를 만든다. 임권택 감독이 이사장을, 주진숙 교수(전 영상자료원장)가 초대 소장을 맡은 한국영화연구소였다. 정책과 이론은 영화운동이 충무로 구체제와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1996년 2월 5일 발기인 모임 때 참여를 밝힌 인원은 73명으로 김수용·정지영 감독, 이용관·이충직·주진숙·정재형·강한섭 교수, 이효인·이정하·변재란·유지나·정성일 평론가, 유인택 대표, 이광모 백두대간 대표, 조광희 변호사, 김혜준 등이었다.
창립준비위원장이기도 했던 주진숙(중앙대 교수, 전 한국영상자료원장)은 1996년 2월 발기인 모임 직후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영화진흥법 개정에서 88년부터 요구해온 내용을 제대로 반영할 수 없었다는 판단으로 새로운 현장과 이론의 접점 마련에 나섰다"고 밝혔다.
당시 문제가 된 것은 영화진흥법 시행령이었다. 영화진흥법 12조는 '영화는 상영 전에 한국공연윤리위원회(공륜)의 심의를 받아야 한다. 다만 소형 단편 영화 및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영화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영화는 그러하지 않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시행령에는 '16mm 영화를 공륜의 심의를 받지 않고 상영하면 2년 이하의 징역이나 2천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도록 했다. 이는 모법의 기본 정신 자체를 무효로 만든 것이었다.
스크린쿼터제에 따른 한국영화 의무 상영일수가 사실상 줄어든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시행령에는 문체부 장관에게 20~40일, 시장, 군수, 구청장 등에게 20일의 단축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게 했다.
이정하는 "영상진흥법이 제정됐으나 선언적 법률이었다. 대체 뭐가 바뀌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김혜준은 일반인의 소형·단편영화 제작 상영기회를 원천봉쇄하는 한편 스크린쿼터제를 축소해 달라는 미국의 요구를 문체부가 사실상 수용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국영화연구소는 1996년 5월 29일 문체부를 방문해 소형·단편영화 심의 폐지, 스크린쿼터 현재 상영일수 고수 등을 요구했다. 사전심의폐지와 영화진흥법 제정으로 단편 소형영화에 대한 검열이 사라지는 듯했으나 시행령이 영화진흥법 규정을 무효로 만든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
하지만 여기서도 신구세대가 충돌한다. 1년 이상 중단된 스크린쿼터감시단 활동이 재개되던 시점에서 충무로 구체제가 공격을 해온 것이었다. 1996년 8월 21일 석관동 공연윤리위원회(공륜)에서 열린 한국에서의 완전등급제를 주제로 한 정기포럼에는 한국영화연구소 김혜준 기획실장의 주제발표가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한국영화인협회와 전국극장연합회 회원들이 발제에 앞서 욕설을 하며 소란을 피웠다. 이들은 '완전등급제는 생각할 가치도 없는 일부 집단의 허황된 주장'이라며 토론에 제동을 걸었다. 김혜준은 "이분들이 '한국영화연구소의 정체를 밝혀라', '등급제 안 해서 한국영화 망했냐?'는 등 수차례의 '돌출' 발언과 함께 욕설을 퍼부었다"며 "그럼에도 대응하지 않고 준비한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위한 완전등급제에 대한 설명을 꿋꿋하게 이어갔다"고 회상했다.
완전등급제는 등급 외 판정을 받은 영화가 전용관에 수용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당시 서울시극장협회 곽정환 회장은 7명 감독이 연출한 옴니버스 영화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7가지 이유>의 경우를 들어 "포르노 판정을 받을 영화였는데, 공륜이 미성년자 관람 불가 판정을 내줘 극장에 걸 수 있었다"며 기존 사전심의제도를 옹호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그러나 1996년 10월 5일 영화 사전심의에 위헌결정이 내려진다.
당시 반발은 한국영화연구소가 참여하는 스크린쿼터감시단과 극장주들이 주축인 스크린쿼터지키기운동본부 간의 갈등이 표출된 것이었다. 전국극장연합회 강대진 회장 등은 스크린쿼터감시단을 겨냥해 원색적인 욕설을 퍼붓기도 했는데, 헌법소원이 기각된 이후 쌓인 감정 표출이기도 했다.
한국영화연구소는 설립 당시 영화산업 관련 조사, 영화 토론회 및 교양강좌, 정책 대안 연구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기에 다양한 영화 강의를 개설하는 대중화 작업도 병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길게 이어지지 못한 것은 내부 갈등 때문이었다. 주진숙은 "이후 정재형이 소장을 김혜준이 부소장을 맡게 되지만, 운영에 이견이 생기면서 이후 활동이 흐지부지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