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32회 대종상 본심 심사위원이었던 이용관, 주진숙, 강한섭
한국영상자료원 소장자료
예심 심사위원 25인에 여성영화운동의 시초였던 카이두의 한옥희(감독. 평론가)를 비롯해 이충직(전 영진위원장), 이춘연(작고, 영화인회의 이사장), 이효인(전 영상자료원장), 김지석(작고, 전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 김영진(명지대 교수, 전 영진위원장), 정재형(동국대 교수), 조선희(전 영상자료원장) 등이 포함돼 있었다. 당시 48세였던 한옥희와 43세였던 이춘연을 제외하면 대부분 30대였고, 김영진이 30세로 가장 어렸다.
본선 심사위원에는 이용관(부산영화제 이사장), 강한섭(작고, 서울예대 교수), 주진숙(전 한국영상자료원장) 3인이 참여했다. 한국영화 개혁을 외치던 젊은 영화인들의 참여가 두드러진 것이었으나, 충무로 구체제로서는 갑작스럽게 젊은 영화인들이 대거 대종상 심사위원으로 선정된 것이 못마땅할 법도 했다.
당시 젊은 평론가들은 날카로운 시선과 깊이 있는 비평을 통해 한국영화의 문제를 지적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었다. 학계에서 활동하며 영화운동의 이론적 터전을 다졌고, <영화언어> 등 계간잡지를 발행하거나 언론에 평론을 기고하며 대중적 인지도도 높아져 갔다.
하지만 1990년대 충무로 구체제는 평론 등 학계 인사들을 따로 구분하는 태도를 보였다. 기득권자로서 똑같은 영화인으로 인정하기 싫었던 점도 있었다. 그래서 구분했던 게 '영화인'과 '영화관계자'였다. 충무로 구체제 쪽 심사위원들은 영화인으로 규정했고, 그 외 젊은 평론가와 영화 관련 기관에서 선정된 심사위원들은 영화관계자로 나눈 것이었다.
기준은 제작 현장이었다. 영화에서 현장 중심주의는 사실 지금도 우선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이를 통해 영화인의 정의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젊은 비평가들을 비주류 취급했던 것이었다.
정진우 감독은 "현장을 알아야 영화인이지 제작을 경험하지도 않으면서 무슨 영화인이라고 말할 수 있냐"며 "감독 제작자 촬영 스태프 등 현장에서 일을 해 본 사람들이 영화인이고 그 외 평론가 등은 영화관계자일 뿐이다"라고 정의를 내렸다.
당시 심사위원 구성은 영화인과 영화관계자 비율이 균등했다. 예심이 영화인 12명과 영화관계자 13명으로 구성됐다면, 본심은 영화인 6명과 영화관계자 5인이었다. 본심 심사위원 중 영화관계자는 이용관, 주진숙 강한섭 외에 양성일 공연윤리위원회 사무국장과 이덕상 영화진흥공사 진흥부장이었다. 주로 이들은 30대 후반에서 40대로 젊은 축이었다.
반면 충무로 구체제가 중심이 된 영화인은 장일호 감독(심사위원장), 윤일봉 배우, 문상훈 시나리오작가, 양영길 촬영감독, 정윤주 영화음악, 김석진 영화조명 등이었다. 이들은 당시 주로 50대 후반에서 60대~70대의 한국영화 원로 축에 속했다.
신구세대 충돌
1994년 대종상은 당시 한국영화인협회라는 영화인 대표조직 안에서 영화운동 세력과 충무로 구체제가 처음으로 머리를 맞대고 함께 수상자를 논의한 시간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신구세대가 본격 충돌하는 장이 됐다. 두 세력이 공식적으로 맞부딪힌 전선이 된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심사과정에서 작품을 평가하는 신구세대의 의견이 달라 대립 양상을 나타낸 것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충무로 헤게모니 다툼의 신호탄이었다. 신구세대의 인식 차이가 컷고, 그 과정에서 나타난 갈등이 만만치 않았다.
영화운동 진영 시각에서 충무로 구체제는 낡은 인식에 사로잡힌 개혁의 대상이었다. 반면 충무로 구체제 시각에서는 운동권 세력이었던 젊은 세대의 도전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양측의 대치 전선이 형성된 것은 본심 심사과정에서였다. 보이지 않는 외부의 손길이 개입한다고 느낀 젊은 평론가들이 충무로 구체제의 방식에 반기를 든 것이었다. 그만큼 양측의 인식 차이는 컸다. 젊은 평론가들에게 구시대적 사고와 관행대로 행동하는 충무로 구체제의 방식은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었다.
32회 대종상 시상식 당일인 1994년 4월 2일 앰배서더 호텔에서 열린 3차 회의는 신구세대의 대립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자리였다. 최종 수상작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시상식 직전까지 무려 9시간 정도 회의가 이어졌을 만큼 놓고 진통이 계속됐다. 예심과정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심각한 대립이었다.
심사과정에서 적극적으로 문제를 지적한 것은 이용관(부산영화제 이사장)이었다. 부산 경성대교수로 재직하며 부산영화운동의 기틀을 다졌던 이용관은 1994년 말 중앙대 교수로 옮겨왔는데, 충무로 구체제와 충돌과정에서 가장 전면에 선 것이다.
당시 수상작 선정을 앞두고 균열이 드러난 것은, 남녀조연상, 기획상, 녹음상, 음악상, 편집상 등을 선정한 이후 점심식사 자리에서였다. 여기서 이용관 강한섭 주진숙 3인이 심사위원 사퇴를 선언한 것이다. "지금까지 심사가 명백히 특정 영화를 둘러싸고 담합의 혐의가 짙고, 대체토론에서 의견집약과 반하는 기표결과가 나왔다"는 이유였다. 심사과정에서 참았던 불만이 폭발하며 심사과정 전반에 불신을 나타내는 방식으로 항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