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 부산국제영화제 <그들만의 세상> GV. 왼쪽부터 임종재 감독, 정선경 배우, 이용관 한국영화 프로그래머
부산영화제
GV가 가장 많이 열렸던 것은 해외작품보다는 감독과 배우의 참석이 당연했던 한국영화였다. 그러다 보니 GV 문화를 선도한 것은 당시 한국영화 프로그래머 이용관이었다. 이전부터 영화강좌를 많이 진행했던 경험이 있다 보니 부드럽게 감독과 관객의 대화를 이끌었다. 이용관은 "당시 정확히 뭘 해야 하는지도 몰랐는데, 박광수 부집행위원장이 시키는 대로 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부산영화제에서 시작된 GV의 표준 모델이었다.
1회 영화제 상영작인 임순례 감독 <세친구>는 GV가 시작된 첫 영화였다. 매진으로 좌석이 가득한 가운데 관객들은 영화에 공감을 표했고, 감독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임순례 감독은 "가정과 학교 군대 등 우리 사회 전체에 만연된 폭력과 경직된 가치관에 주목했다"며 "가정환경이나 사회조건이 낙오자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중고등학생들이 많이 봤으면 한다"는 바람을 나타내기도 했다.
김응수 감독의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는 GV 열기를 보여준 대표적 작품이었다. 다음 작품의 상영시간이 다가오는데도 질문이 이어지자 이용관은 관객들에게 밖으로 나가서 더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한다. 결국 남포동 야외무대 앞에서 감독과 배우를 붙들고 GV는 1시간 정도 계속된다. 영화제를 찾은 관객들의 열정을 보여준 단면이었다.
생전 김지석(작고.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은 "부산영화제의 자랑"이라며 GV에 자부심을 나타냈다. "전 세계 영화제 중 이렇게 GV가 많은 영화제는 찾기 힘들고, '영화, 영화인, 관객과의 만남'은 부산영화제의 가장 중요한 지향점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GV는 부산영화제를 찾은 한국 관객들의 수준을 확인할 수 있게 해준 시간이기도 했다. 해외 영화인들은 일반적으로 영화제에서 나오는 질문들이라는게 제작비가 얼마냐, 배우를 어떻게 캐스팅했냐는 등의 가십성 질문을 하는데, 한국영화관객들은 작품에 담긴 깊은 의미와 미장센이 어떻고 등등 전문적인 질문을 한다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질문 수준이 달랐기 때문이다.
또한 이른 아침 상영을 찾는 관객의 열정에 놀라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1997년 2회 영화제 때 상영작인 <일요일>은 상영시간이 일요일 아침이었다. 선댄스영화제 대상 수상작이라 좌석수가 가장 많은 부산극장 1관에서 상영됐으나 매진이었다.
예정된 GV는 상영 전 간단한 무대인사였다. 감독이 참석하지 못해 여성 프로듀서가 대신 나와 관객들에게 인사했는데, 좌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의 모습에 흐뭇한 표정이 역력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마친 프로듀서는 그냥 무대를 내려가기 아쉬웠던지 "감독이 오지 못해 이런 모습을 함께 못 보는 게 너무 안타깝다. 사진 한 장만 찍겠다"고 요청했다.
많은 관객이 큰 극장을 가득 채운 것을 감독에게 보여주겠다는 것이었다. 관객들은 박수로 화답했고, 프로듀서는 희색이 만연한 채 관객들의 모습을 담았다. 짧은 GV였으나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검열의 위협
파도처럼 밀려든 관객들로 인해 1회 부산영화제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내며 대성공을 거둔다. 안팎이 호평이 이어졌다. 칸영화제 아시아영화 선정위원인 피에르 르시엥은 "어떤 지역 국가든 정부와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사람 모두 할리우드 제국주의에 대항할 의무가 있고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문화는 모방하면 전망이 없다.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작품을 만들어 경쟁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미국영화 직배문제로 미 제국주의의 문화침략에 맞섰던 한국 영화운동에 주는 격려였다.
김홍준(감독)은 "아카데미영화제처럼 화려하게 차려입은 스타들이 나와 자기들이 상을 받는 게 영화제라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을 좋은 기회가 됐으면 좋겠다"며 첫 발을 뗀 국제영화제에 대한 기대를 나타냈다.
크고 작은 실수에도 불구하고, 한껏 고무될 정도의 칭찬을 받은 것이었지만 검열에 대한 우려는 가시지 않았다. <크래쉬> 삭제 소동은 우발적인 일로 넘어갔으나 위험 요소기도 했다. 당시 삭제된 부분은 영화 속 교통사고를 당한 직후 나오는 정사장면이었다. 영화 수입사가 원본필름 대신 삭제된 필름을 영화제에 제공한 실수였으나, 경직된 한국의 검열 분위기를 엿보게 해주는 사례였다.
1990년 중반 서울에서 국제영화제 논의가 한창일 때 전양준이 지적했듯 검열이 있는 나라에서 영화제를 제대로 치르기는 힘들기 때문이었다. 검열의 위협은 영화제의 가치를 언제든 땅에 떨어뜨릴 수 있었다.
부산영화제가 비슷한 시기 시작된 상하이영화제를 비롯해 중국의 영화제들을 경쟁상대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검열 문제에 있다. 이용관은 "영화제는 영화의 해방구로 모든 영화가 제한없이 상영될 수 있어야 하는데, 중국의 영화제는 검열 때문에 부산영화제를 절대 따라올 수 없다"고 말했다. 아무리 많은 예산으로 물량 공세를 퍼붓는다고 해도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검열은 영화제의 한계만을 드러낼 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