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한국영화기획실모임 야유회. 윗줄 왼쪽 첫번째 안동규 대표, 네번째 이춘연 대표, 여섯번째 김미희 대표, 일곱번째 권영락 대표. 아랫줄 오른쪽 끝 심재명 대표 등등
명필름 제공
1991년 <어머니 당신의 아들> 이후, 장편 극영화를 제작하던 재야 영화운동의 역량은 점차 충무로로 옮겨온다. 민중영화 제작 경험이 새로운 영화를 추구하던 충무로의 흐름과 맞닿으며 한데 섞인 것이었다.
물론 여전히 충무로 밖에서 재야 영화운동의 가치를 중시하는 움직임도 진행됐다. 그러나 큰 틀에서 영화운동의 주력은 충무로라는 제도권을 중심으로 확장된다.
1990년대의 변화는 1985년 영화법 개정으로 영화운동의 입지를 넓히는 발판으로 작용했던 독립프로덕션을 확대한 것이었다. 1992년부터 영화운동 출신들이 설립한 영화사는 1년에 한 편만 제작할 수 있는 독립프로덕션의 한계를 벗어나 본격적인 충무로의 세대교체를 이끌었고, 1995년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 기운을 불어넣는 데 일조한다.
이 바탕에 있었던 게 기획영화의 성공이었다. 이춘연(제작자. 작고)이 이끌던 한국영화기획실모임은 뒷받침이 됐다.
1980년대 후반 한국영화 뉴웨이브의 출발은 기존 충무로영화와는 다른 형태의 작품을 선보여 주목받은 것이었다. 이를 확장한 기획영화의 성공은 소재의 다양성을 추구하며 한국영화에 힘을 불어넣었다. 대학에서 영화운동을 펼쳤던 이들에게 충무로는 새로운 '기회의 땅'이 됐다.
1980년대 중반부터 영화기획자로 활약했던 이춘연은 넓은 포용력을 발휘하며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 후배들을 아울렀다. 1991년 공식 단체로 출범 전까지 삼삼오오 친목형태로 모이던 한국기획실모임은 영화운동의 충무로 전진기지였다.
1990년대로 들어서면서 영화사 기획실에 있던 이들이 독립해 나와 하나둘 영화사를 설립한 것은 주로 연출 쪽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영화운동의 변화였다. 좋은 작품이 나오는 데 프로듀서의 역량이 중요해지면서, 충무로에서 계속 영역을 넓혀 나가던 영화운동 전선이 제작 분야로 확장된 것이었다.
1993년 1월 유인택(예술의 전당 대표)이 설립한 '기획시대'는 1988년 신씨네에 이어 영화운동 출신이 만든 1990년대 첫 영화사였다. 신촌의 예술극장 한마당 대표 시절 <오! 꿈의 나라> 상영이 계기가 돼 영화로 옮겨온 유인택은 모가드코리아, 판시네마, 신씨네를 거치며 경험을 쌓은 뒤 독립을 선택한다. '신씨네'에서 신철과 함께한 <결혼이야기>, 강우석 감독과 함께 기획한 <미스터 맘마> 등을 성공시키는 수완을 발휘한 것이 영화사를 만든 바탕이 됐다.
유인택의 뒤를 이어 1993년 4월에는 경희대 '그림자놀이'를 만들어 대학 영화운동을 이끌었던 안동규(제작자)가 '영화세상'을 설립해 두 영화사가 한 건물에 자리 잡게 된다. 두 사람 모두 이춘연과 함께 한국영화기획실모임을 이끌던 충무로의 젊은 기획자로, 기획 역량을 쌓은 뒤 제작에 뛰어든 것이었다. 이들 영화사는 기존독립프로덕션이 아닌 5천만 원의 자본금으로 설립한 주식회사였기에 연중 제작 편수 제한을 받지 않았다.
프로듀서 시스템의 등장
199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의 토대가 된 프로듀서 시스템은 영화운동과 기획영화가 결합하면서 생겨난 것이었다. 제작자들이 제작비를 끌어와 영화제작의 전반적인 것을 총괄하던 구조에서 프로듀서 영역이 차츰 구체화 된 것이다.
한겨레신문은 1992년 6월 6일 자 기사에서 "<그대 안의 블루>의 심재명·안동규, <결혼이야기> 신철 등이 작품구상에서 시나리오 완성, 제작 진행에서 영화홍보까지를 맡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 "할리우드식으로 부르자면 프로듀서(제작자)가 되겠지만 당시 자본과 제작 기획 등이 분리되지 않은 영화계에서 제작자는 영화의 자본을 대는 사람을 가리킨다며 사소한 오해를 부를 수 있는 직함이다"라고 덧붙였다.
한겨레신문은 또한 "이들 젊은 전문기획자의 출현은 영화시장 개방과 영상매체의 다변화라는 시대적 변화 속에서도, 도약하려면 한국영화는 기획능력을 보강해야 한다는 현실적 필요성과 맞물린 것이다"라고 평가했다.
처음 프로듀서 영역을 개척한 것은 1970년대 독일문화원 동서영화연구회에서 활동했던 '신씨네'의 신철(제작자. 부천영화제 집행위원장)이었다. 1988년 설립한 영화사 '신씨네'는 장산곶매의 <오! 꿈의 나라> 제작비를 지원했고,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 영화운동 출신들을 품어내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언경과 함께 영화공간1895에서 활동했던 이하영(프로듀서. 전 시네마서비스 배급이사)이 처음 들어간 영화사도 '신씨네'였다.
1992년 7월 개봉한 신씨네가 제작한 <결혼 이야기>는 프로듀서란 이름을 엔딩크레딧에 처음 올린 영화였다. 당시 신철의 부인 오정완(제작자)이 프로듀서였다. 프로듀서 시스템이 구체화 되던 시기는 신철이 기획해 1989년 김유진(감독)이 연출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였다. 이때 신철은 투자자를 끌어오고 영화의 전 과정을 이끌게 된다. 이전까지만 해도 제작자는 감독에게 제작비를 주는 영화사 사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