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당신의 아들>
이상인 제공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시장통에서 장사하는 어머니와 학생운동을 하던 아들의 이야기로 대학가 통일운동의 내면을 그려낸 작품이었다. 1988년 5월 명동성당에서 투신한 고 조성만 통일열사와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희생된 여러 민주열사의 이야기가 혼합됐다.
실제 학생운동을 하고 있던 한양대 공대생 최로사를 배우로 캐스팅했고, <오! 꿈의 나라> 주연이었던 홍정욱 배우와 <파업전야>에 출연했던 엄경환 배우 등이 배역을 맡았다. 어머니역은 고 김지영 배우가 맡았는데, 영화 상영 이후 경찰서에 불려 다니는 등 고초를 겪었다. 음악은 윤민석(민중가요 작곡가)이 담당했다. 당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에서 활동하던 김조광수(감독)는 총학생회 간부 역할로 깜짝 등장했다. 대학영화운동 초기 학내에서 영화제를 개최하며 기획력이 좋았던 외국어대 '울림' 출신 장기철(감독. 한국영화아카데미 6기)의 도움도 적지 않았다.
제작과정에서는 1980년 중반 이후 구축된 영화운동의 역량을 잘 활용했다. 여성영화집단 바리터에서 활동하고 있던 변영주(감독)에게 촬영 카메라를 빌렸고, 카메라 이외의 촬영 기자재는 낭희섭의 독립영화협의회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우여곡절이 있었던 편집 등의 후반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은 프리 프로덕션 단계부터 공안기관의 주시를 받고 있었다. 제작비 마련을 위해 시나리오를 일부 대학 총학생회에 돌렸는데, 이게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 현 국가정보원)에도 들어간 것이었다.
이상인은 "당시 경찰에게 연락이 와서 만났다"며 "형사가 '너는 운동권도 아니고 성적 장학금도 받고 하는데, 왜 그런 걸 만들려고 하냐. 하지 말라고 설득했다"고 기억했다. 또 "경찰은 이미 아버지가 군무원인 것 등 가족들에 대해서도 다 파악해 놓은 상태였다"면서 "결국, 촬영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수배 생활이 시작됐다"고 덧붙였다.
영화제작소 청년은 구성원이 대부분 대학 1~2학년으로 구성돼 현장 경험이 많이 부족했다. 이상인은 "촬영감독은 처음에는 이시명(감독, <2009 로스트메모리즈>)을 고려했으나 학생운동을 다룬 내용에 부담을 느껴 김용균(감독)이 담당했고, 16mm 제작 경험이 부족했던 제작진은 카메라의 초점이 맞지 않아 1주일 촬영 분량을 다시 찍는 등의 소동도 겪어야 했다"고 말했다.
촬영은 1990년 10월~12월까지 60회차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상인은 계속 수배자였고, 경찰이 여러 차례 가택수색을 당하고, 친형이 연행되는 등 압박을 받으면서 남은 사람은 남궁균(기획/배급)과 이선미(편집)뿐이었다. 편집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이때 도움을 준 것이 김대현(감독)의 '영화제작소 현실'과 '장산곶매'였다.
김대현(감독)은 "1988년 여름 낭희섭이 조교를 맡았던 작은영화워크숍을 수료했는데, 이때 강사가 전양준과 이상인 등이었다"며 "1990년 3월 우리마당 영화분과에서 활동하다 민병진, 이장서(조감독. 작고) 등과 '영화제작소 현실'을 만들었고, 이 장소를 '영화제작소 청년'이 이용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김대현에 따르면 '영화제작소 현실'은 당시 5명 정도가 모여서 활동했고 사무실은 홍대 입구 쪽에 있었다. 의문사 대학생에 대한 단편 극영화 <서울길> 등을 제작했으나 외부로 알려진 공간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머니 당신의 아들> 편집이 끝난 이후에 안기부(현 국정원)에 노출되면서 1주일 이상 사무실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한다.
이상인은 "영화제작소 현실이 공간 전체를 쓰게 해 줬다"면서 "공간이 노출된 이후 수배 과정에서 장산곶매 대표였던 강헌(음악평론가. 경기문화재단 대표)과 이은(제작자. 명필름 대표)을 만나 도움을 요청해, 봉천동인가 신림동 쪽 사무실에서 편집을 마무리했다"고 말했다.
당시 상영 방해와 탄압은 시사회가 예정됐던 이언경의 '영화공간1895'에도 가해졌다. 1991년 4월 9일 영화평론가를 위한 시사회가 열릴 예정이던 영화공간1895에 이효인(경희대 교수, 전 한국영상자료원장) 등이 기다리고 있었으나, 시사회 20분을 남겨 놓고 경찰이 들이닥친 것이다. 5벌의 필름이 압수당했고. 이를 항의하던 이진욱과 이하영(프로듀서)이 연행되기도 했다.
이상인은 "인근 다방에서 대기하고 있었는데, 전경버스 2대가 와 있었다"며 "한겨레신문 안정숙 기자와 통화하게 됐는데, '영화공간 1895로 오지 말고 피신하는 게 좋겠다'고 해서 봉고차를 이용해 연세대학교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이후 여러 대학을 옮겨 다니며 상영투쟁과 수배생활을 이어간다.
이상인은 당시 시사회 공간을 빌려줬던 이언경(감독. 작고)에 대해 고마움을 나타냈다. "영화마당우리에서 활동하면서 알게 됐는데, 학생운동을 한 것은 아니었고, 당시 분위기에서 위험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상관없다'면서, 영화공간1895를 사용할 수 있게 해줘 큰 힘이 됐다"고 회상했다. "덕분에 러쉬필름(편집되지 않은 촬영 원본)으로 먼저 시사회를 하고, 기자시사회도 준비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영화공간1895는 김응수(감독)가 영화를 공부한 곳이기도 했다. 김응수는 "20대 때 영화공간 1895에서 이탈리아 여성 감독이 연출한 영화의 비디오테이프를 빌렸는데, 몇 번이나 복사돼 얼굴이 안 보일 정도였고 그걸 보고 영화를 공부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때 그런 활동을 한다는 것은 지금 영상자료원 만드는 것만큼 도움 되는 일로 이언경은 특이한 분이었고, 선구자였다"면서 "거기서 많이 배웠다"고 덧붙였다.
이적표현물이 된 영화
상영을 위해 준비했던 촬영 프린트가 모두 압수당하면서 다시 막막한 상황이 됐다. 갈수록 첩첩산중이었다. 처음에는 영화법으로 수배됐으나 영화가 완성됐을 때는 국가보안법으로 바뀌어 있었다.
남은 제작비도 없는 상황에서 이상인은 민중운동 단체와 영화단체 등을 불러 모아 도움을 요청한다. 영화를 보고 가능성이 있으면 돈을 내고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네가(원본)필름을 갖고 있었기에 단체 활동가들을 불러 러쉬필름 시사회를 열었고, 이를 통해 프린트(상영용 필름) 비용이 마련됐다. 이상인은 "김동원(감독) 형을 비롯해 여러 단체 분들이 미리 돈을 준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경찰이 영화제작 과정을 잘 알지 못했던 듯 현상소를 막지 않으면서 프린트 제작은 순조롭게 이뤄진다. 상영은 남아 있던 남궁균(기획/배급)과 이선미(편집)가 각 대학 총학생회에 연락해 배급을 진행하면서 풀리기 시작한다.
이상인은 "16mm 단편 <친구여, 이제는 내가 말할 때>를 만들 때 시위장면을 촬영하다 경찰에 잡혀간 적이 있는데, 필름을 내놓으라고 해서 촬영 안 된 필름을 주고 촬영된 필름은 수업에 필요한 거라고 주지 않았더니, 형사가 '이거 맡기면 사진이 나오는 거냐?'라고 물었을 정도였다"며 당시 "경찰이나 안기부 모두 영화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다"고 말했다. 필름 작업을 해서 영사기에 튼다는 게 전문적인 작업이다 보니 현상소에 압박 전화 한 통도 간 게 없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