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답십리에 있던 새한필름촬영소 모습
국가기록원(문화체육부)
하지만 법 개정의 핵심적 이유 중 하나는 제작 조건의 강화였다. 촬영 스튜디오와 현상소를 갖춰야 하고 연간 15편 이상의 극영화제작실적도 첨가하는 조항을 추가한 것이다. 규정된 시설을 갖추지 않으면 영화를 만들 수 없게 한 것으로, 자유로운 창작을 제한하는 법이었다.
개정된 영화법 시행령에서 정한 기준은 만만치 않았다. ▲35mm이상의 촬영기 3대 이상 ▲조명기(200kw 이상) ▲내화구조로서 방음장치가 완비된 건평 200평 이상의 견고한 스튜디오 ▲동시 녹음기 1대 이상 ▲5년 이상의 영화감독경험을 가진 전속영화감독 3인 이상 ▲5편이상 극영화에 출연한 경험을 가진 남녀 전속 배우 각10인 이상 ▲5년 이상 영화촬영경험을 가진 전속촬영기술자 3인 이상 ▲5년 이상의 녹음 경험을 가진 전속녹음기술자 1인 이상 등이었다.
이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영화사가 많지 않았다. 소수 제작사만 배려한 것이었다. 기존 제작업자들 외에 새로 영화사를 차리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군소 제작자들의 불만이 표출되고 논란이 크게 일자 일부 조건이 완화된다. 조명기 200kw 이상은 조명기 50kw 이상으로, 동시녹음기 1대 이상, 녹음기 1대 이상으로 변경됐다. 내화구조로서 방음장치가 완비된 건평 200평 이상의 견고한 스튜디오 조건은 삭제됐다.
제작사를 줄여라
그렇지만 완화된 조건은 3년 뒤 두 번째 개정에서 원상회복된다. 1966년 1월 당시 공보부는 연간 제작 편수를 120편으로 제한하고 우수 국산영화에 보상하는 영화시책을 발표한다. 군소업체들이 연합해 영화사 등록을 하면서 1965년 한국영화 제작 편수가 189편에 이를 정도로 양산된 것을 원인으로 제시한 것이다. 영화시책은 매년 발표하는 영화정책의 운용 방안이었나, 이때는 영화법 개정의 전조였다.
1966년 7월 15일 전면 개정된 영화법은 제작 편수를 줄이기 위해 제작사를 줄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기존 영화법 시행규칙에 상영허가 기준으로 명시했던 검열 조항은, 개정 영화법에서는 '검열기준'으로 본문에 자리를 잡는다.
또한, 국산영화 장려 방안으로 외화만 상영하던 개봉관도 일정량의 국산영화를 상영토록 하고 국산영화가 합작영화를 수출하고 수입하는 편수는 그해 상영된 국산영화의 3분의 1을 넘지 않도록 규제했다. 스크린쿼터제의 시작이었다. 당시 한국영화만 상영하던 극장은 국도극장, 명보극장, 아카데미 극장, 국제극장, 아세아극장 등이었고, 외국영화만 상영하던 곳은 스카라극장, 피카디리극장, 단성사 등이었다.
구체적인 시행령은 12월에 확정된다. 촬영 스튜디오는 300평을 갖춰야 했고, 총성능 50kw조명기가 있어야 했다. 흑백영화 1편을 촬영하는데 필요한 조명은 50kw면 충분했다고 한다. 과도한 시설을 요구한 것이다. 국산영화가 수출될 때는 외화를 변작 또는 모방한 부분이 없는 것에 한하도록 했고, 외화 수입은 국제영화제 출품 한국영화 편수, 국제영화제 수상 상장 개수, 공보장관으로부터 수상한 영화 편수에 따라 수입권을 1대1로 정했다.
이듬해인 1967년 3월, 이 기준에 따라 26개 제작사 가운데 13개사에 대한 등록요건 완비를 인정한다. 이후 추가로 요건을 완비한 제작사 12개가 추가돼 포함해 모두 25개사가 등록한다.
한양영화 주민규, 한국영화 성동호. 신필름 신상옥, 한국예술 박원석, 세기상사 우기동, 대한연합영화 홍의선, 합동영화 곽정환, 연합영화사 주동진, 제일영화 홍성칠, 안양필름 이수길, 대광영화 김봉주, 새한필름 황의식, 태창흥업 김태수, 극동필름 차태진, 대양영화 김형근, 중앙영화흥업 이수희. 아세아필름 이지룡, 동양영화흥업 이종벽, 동인영화 장동휘, 덕성필름 이민덕, 덕홍필름 지우성. 동남아영화공사 이병인, 대지영화사 김길용, 유한산업 유재훈, 독립필름 박구 등이었다.
하지만 제작사를 줄이려는 의도로 법을 개정한 것이었기에 25개 제작사도 많은 편이었다. 이때 제작업자들 간 협회 구성을 통한 다툼이 생기면서 정부가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주류 11개사 중심으로 한국영화업자협회(회장 주동진)가 구성된 것에 대해 나머지 14개사가 따로 한국영화제작자연합회로 나눠 대립한 것이다.
당시 문화공보부는 불시에 시설 점검을 통해 2개사의 등록을 취소하더니, 9월에는 제작사를 아예 절반으로 줄인다. 영화법 개정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25개사 난립한 것은 영화법 정비에 실패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현상이라며 영화사들의 통합을 종용한 것이었다. 이때 통폐합으로 남은 12개 영화사는 대양영화, 세기상사, 신필름, 안양필름, 연합영화, 연방영화, 제일영화, 태창흥업, 한국영화, 한국예술, 한영영화, 합동영화사 등이었다.
이 당시 영화법의 문제는 제작을 12개사가 독점한 것이었다. 당시 제작사들은 연간 제작 편수가 150편을 초과할 수 없다는 이른바 제작쿼터제를 결정한다. 내부 카르텔이었다. 수입쿼터, 스크린쿼터에 이어 제작쿼터까지 등장하면서 영화인들 간에 서로 대립도 심해진다.
1966년 영화법 개정 이전만 해도 마음대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던 작은 규모 영화사의 프로듀서들은 12개 제작회사로부터 쿼터를 100만 원~150만 원에 사서 제작해야 했다. 개별 제작사가 1년에 12편을 만들어야 했으나 70%밖에 소화할 능력이 없는 상태였다. 제작자들은 나머지 제작쿼터를 팔아서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굳이 영화를 안 만들어도 수익이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