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여름 서울대 얄라셩과 서울영화집단 출신 영화인들의 MT에 함께한 권영락. 앞줄 왼쪽부터 김인수, 문원립, 신한섭, 김신희, (김홍준 딸 안고 있는)박광수, 홍기선. 뒷줄 왼쪽부터 권영락, 명혜원(가수. 권영락 부인), 김정희, 김명숙(김홍준 부인), 김홍준.
권영락 제공
권영락은 "외국어대 영화서클 '울림'의 김태균(감독)과 장기철(감독)이 주도해 외대 안에서 칸영화제 작품들을 상영할 때 기술적 지원 역할을 했다"면서 "당시 서울예전(현 서울예대)은 설립자인 유치진 작가의 아들 유덕형 학장이 미국을 통해 다양한 비디오와 장비를 들여와 갖춰 놓고 있던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이를 조교였던 권영락이 관리하면서 서울예대가 다른 대학의 영화서클에 장비를 지원해주고 대학에서 자체 영화제를 할 수 있도록 돕게 된 것이었다. 당시 이화여대 학생들은 첫 영화 <시발>을 만들며 영화서클 '누에'를 창립했는데, 서울예전의 16mm 장비를 대여해 주고 사용법을 가르쳐 준 것이 바로 권영락이었다.
권영락은 충무로 입문이 이르다는 점이 특별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78년 제작된 이원세 감독의 <속 엄마없는 하늘아래>(1979) 연출부 막내로 충무로에 첫발을 디뎠는데, "또래 중 충무로 입성이 가장 빨랐다"고 말했다.
1년 뒤 대학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당시 촬영 현장에 있던 영화인들의 조언 때문이었다. '이왕이면 영화를 제대로 공부해보라'는 권유를 받고 1979년 서울예대에 입학한다. 권영락은 "당시 하길종 감독이 교수로 있었는데, 입학하던 때 돌아가셨다"면서 "교수진이 정용탁, 김기덕, 안병섭 교수 등 쟁쟁했다"고 회상했다.
대학입학 직후 군에 입대한 권영락은 1982년 복학해 이듬해 졸업한다. 이후 1984년 충무로 현장과 서울예대 조교를 병행하게 된다. 1984년 작은영화제는 영화에 열정을 불태우던 비슷한 또래 청년영화인들을 만나게 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권영락은 "양윤모(영화평론가)가 조교 선배였고, 내 뒤로 심승보(감독)와 안병기(감독) 등이 조교를 했다"면서 "1985년과 1986년에는 서울영화집단 이효인(전 한국영상자료원장. 경희대 교수)과 같이 <썩지 아니한 시>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서울예대 졸업 이후 다른 대학영화운동을 도우며 다른 줄곧 감독 데뷔를 준비하던 권영락은 1992년 강우석 프로덕션 <투캅스> 기획이사(프로듀서)를 맡으면서 제작으로 방향을 정하게 된다.
충무로 세대교체
한국영화의 질적 수준이 조금씩 높아지기 시작한 것도 1985년 이후부터였다. 대학에서 서클 활동 등을 통해 영화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던 학생들이 충무로에 들어서면서 인적 구조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1985년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 안동규(제작자)에 따르면 1980년대 이전 충무로의 한국영화 스태프들은 도제식으로 경력을 쌓은 데다, 한국전쟁 이후 가장 어려웠던 시대를 관통했기에 대학을 마친 사람이 드물었다. 영화를 비롯한 문화예술 쪽이 '딴따라'라 불리던 시기였던 탓에 대학 졸업 후 영화를 택한다는 것이 쉽지 않기도 했다.
비록 각자 개인적인 관심에서 비롯됐으나, 영화를 집중적으로 공부한 청년들이 충무로에 들어선 것은 충무로 변화의 초석이었다. 안동규는 "충무로는 긍정적인 분위기가 강했다"며 "제작자들이 좋아했던 이유는 말이 통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1970년대~1980년대 충무로 제작 현장은 1950년 이후 곤궁했던 시기에 출생했던 사람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때였다. 말로는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해도 실제적으로는 먹고살기 어려운 시기라 학업을 포기하고 생업을 위해 영화제작 현장에 들어와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 많았다.
한국영화 원로 정진우 감독에 따르면 1950년대~60년대 영화계에 들어온 인사 중 대학 졸업자는 엄앵란 배우(숙명여대), 최무룡 배우(중앙대), 정진우 감독(중앙대), 김기영 감독(서울대), 신영균 배우(서울대), 유현목 감독(동국대) 김수용 감독(서울사대 전신 서울사범학교) 정도로 많지 않았다.
여기에 이형표 감독(서울대), 장일호 감독(국학대), 서정민 감독(고려대), 정일성 촬영감독(서울대)이 추가되는 정도였다. 대부분이 도제식 시스템을 거친 경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