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에 제작된 <작은 풀에도 이름이 있으니> 한 장면
바리터
<작은 풀에도 이름 있으니>는 사무직 여성 노동자들의 문제를 담은 국내 최초 작품이다. 1987년 6월 항쟁과 7,8,9월 노동자대투쟁 과정에서 향상된 사무직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 투쟁 과정 등을 그렸다. 2부로 구성된 영화는 회사 일을 하면서 가사 노동과 육아 등에 시달리는 여성 노동자의 모습과 함께, 미혼 사무직 여성들이 민주노조를 결성해 회사의 탄압에 맞서 사수하는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김영, 권은선, 김소연 등이 배우로 출연했다. 여성영상집단 바리터의 첫 작품으로 한국여성민우회와 공동으로 기획하고 제작했다.
권은선(영화평론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은 "여성운동단체와 여성영화창작자 단체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으로, 기혼 사무직 여성 노동자와 미혼 사무직 여성 노동자의 노동 조건과 젠더 억압이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했다"고 평가했다.
또 "여성 노동자 개개인의 노동조 건과 삶의 조건을 드러내고, 그것을 공동체적으로 사고하고 나누고자 했던 제작 의도가, 영화의 제목을 비롯하여 그 내용과 형식에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당시는 생산직 현장 노동자들이 주목받던 탓에 영화적으로 대중적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비슷한 시기 제작된 장산곶매의 <파업전야>의 큰 성공과는 대조적이었다.
서선영(시나리오 작가)는 "그때 당시에는 '여성 사무직 노동자'를 다룬다는 것에 내심 부끄러움을 가졌다"면서 "지금까지도 회자하는 <파업전야>는 공장에서 일하는 남성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였고, <파업전야>를 찍었던 장산곶매 선배들도 '야, 뭐 그런 영화를 찍고 있냐?'고 말해 마음이 조금 위축돼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요즘은 직장 내 성평등과 성희롱이 너무나 중요하고 와 닿는 주제이지만, 당시에는 완전히 아웃사이더가 된 느낌이었다"고 덧붙였다.
김소영은 "당시는 '여성 사무직 노동자'라는 존재가 이제 막 등장하던 시대였다"며 "바리터는 여러 층에서 '웬 여성?' '웬 사무직?'이라는 압력을 받았다. 우리와 뜻을 함께할 동지도 드물었다"고 밝혔다.
상영은 대학가 축제 등을 통해 이뤄졌다. 독립영화 제작과 상영이 불법으로 취급받던 시기에 <오! 꿈의 나라>를 통해 형성된 대학가 배급망이 활용된 것이다. 변영주는 "초청받은 대학교에 가서 상영하는 방식으로 관객들을 만났다"고 말했다.
서선영는 "영사기와 필름을 직접 들고 대학교 축제를 돌면서 배급했던 기억이 쓸쓸하게 남아있다"며 <파업전야>는 많은 사람이 모였고, 데모할 준비도 다 돼 있어 끝나면 다 시위하러 나가고 했지만, 우리 영화는 정말 쓸쓸했다. 관심이 없는 거다, 영화에 공감하지 않은 대학생들을 보며 쓸쓸하게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기억했다.
변영주(감독)는 "페미니스트가 모여 만든 '바리터'는 누구보다 좌파이고 그 자체로 독립영화 집단이었지만,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그때 독립영화를 했던 사람을 지금 다시 보면, 여전히 우리가 가장 좌파고 독립영화였다"고 회상했다. 이어 "바리터 활동에 어떤 후회도 없지만, 딱 하나 후회가 있다면 '어째서 우리는 언제나 증명하려고 했을까?'"라는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해산
바리터는 이후 도성희가 연출한 <우리네 아이들>(1989)을 두 번째 작품으로 만든다. 도시 빈민 여성의 현실을 고발한 다큐멘터리로 부모들이 일하러 간 사이에 죽음을 맞은 남매 사건이 작품을 만들게 된 계기였다.
이후 여성단체와 노동단체의 영상물을 만들거나 편집하는 프로덕션 일을 담당했고, 새로운 형식의 다큐멘터리를 고민하며 변영주를 비롯한 도성희, 홍형숙, 홍효숙 등은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전열>(1991) 제작에도 참여했다.
변영주는 "<전열>은 촬영을 끝내고 편집 단계에서 유학 문제 등으로 도성희(감독)가 중국으로 갔다"며 "나와 신명화(프로듀서)가 편집을 했고 도성희(감독)가 잠시 귀국해 후반작업을 맡아 완성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