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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힘겹게 들어 올린 눈꺼풀 밖으로 보이는 세상이 낯이 익다. 다시 눈을 감는데 머리 전체에 싸늘한 통증이 느껴진다. 다시 힘을 주어 눈을 뜨고 주위를 살핀다. 집 안 거실이다. 집엔 잘 왔구나, 생각하는 순간, 거실 바닥에 흥건한 핏자국이 눈에 띈다. 퍽치기에게 당한 건가? 하지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힘은 없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사지와 몸통을 살핀다. 다행히 다친 흔적은 없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요의를 느껴 화장실로 향한다. 그러고는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보고 기겁을 하며 비명을 지른다. "이게, 뭐야!"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주먹보다 더 커진 코 밑에 위치한, 퉁퉁 부어오른 입술 밖으로 새어나온 단말마의 외침은 "워우워우" 라는 오크족의 암호 같은 것이었다.

나의 최측근에 있는 사람의 불과 얼마 전 실화이다. 새벽 네 시까지 온몸을 불사른 후 가까스로 집에 들어갔다가 거실 바닥에 고꾸라져서 안면 절반이 부풀어 오른 것이다. 지인의 경험담이라고는 하지만 필자 역시 비슷한 경험들이 수없이 많았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만취상태로 엎어졌다가 상 모서리에 턱선 부분이 찢어져서 경찰차 호위를 받으며 응급실에 실려 갔던(경동맥 출혈로 판단한 선배들의 호들갑의 결과로) 전설에서부터, 지금의 아내에게 대시하던 날 화장실에서 미끄러져 깨진 머리를 부여잡고 아내 손에 이끌려 응급실에 갔던 기억까지, 음주와 관련된 사건과 사고는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알코올 탈출 리얼 버라이어티 쇼'를 시작합니다 

살아있는 새우를 껍질만 벗겨서 회로도 즐김
▲ 생새우회 살아있는 새우를 껍질만 벗겨서 회로도 즐김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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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술을 끊으려고 하는가? 앞으로 연재하게 될 내용에 앞서, 도대체 이 인간은 무엇 때문에 술을 끊을 결심을 했는가 궁금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사례들도 물론 술을 끊기로 결심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불혹의 마흔을 코앞에 두고, 술자리 다음 날 여론의 주인공이 된다는 건 무척이나 볼썽사나운 일이다. 그 외에도 한번 마시면 아침이 올 때까지 끝장을 보려는 일명 '노 브레이크'의 술버릇, 기억 '통편집'의 분량이 점점 늘어만 가는 노화에 대한 두려움, 노화와 맞물려 그동안 버텨내면서 주인이 정신 차리기만 손꼽아 기다리던 오장육부 장기들의 불길한 반란 신호까지 대려면 이유는 많다. 여기에 결정적으로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 할 수 있는 남자 나이 마흔.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것인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등 여러 가지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는 단주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뭐 대단한 거사를 준비하는 건 아니다. 본인의 의지로는 절대 술을 끊을 수 없는 동네 아저씨, 좀 더 세밀하게 치고 들어가면 경력 20년짜리 진상 술꾼이 이제라도 정신 차려보겠다고, 외부의 도움을 받아 술을 끊는 과정을 여러분과 함께 공유해보고 싶은 것이다.

본인은 애주가라고 생각하고, 술김에 친 미미한 사고들은 애교로 넘겨주길 은근 바라는 이 땅의 수천 수만 주당들에게, 그건 좀 아니지 않냐고,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 아니냐고 에둘러 얘기해보고 싶은 것이다. 행여라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 주변 시선이 신경쓰여 용기내기 어려운 분들에게 '막상 해보니 별거 아니었다'는 꿈과 희망까지는 아니더라도, 자그마한 실천의지라도 싹 틔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무슨 통계나 조언 따위로 글을 따분하게 만들 생각은 전혀 없다. 우리나라 알코올중독자 수가 어떠니, 사회적으로 주폭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아냐느니, 술 소비량이 어쩌고저쩌고 하는 '꼰대' 같은 내용은 일절 배제하기로 한다. 한동안 술을 끔찍이도 사랑했던 한 사람으로서 같은 애주가들에게 충고나 조언 따위 거들먹거리는 건 예의가 아니다.

그저 "당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저씨가 술 한번 끊어보겠다고 '알코올 탈출 리얼 버라이어티 쇼'를 준비 중이니, 보고 재미있으면 당신도 한번 도전해보십시오", 이게 내가 딱 하고 싶은 말이다.

"빈 병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 법이니까"

집 나간 며느리가 냄새 맡고 돌아온다는 전어구이
▲ 전어구이 집 나간 며느리가 냄새 맡고 돌아온다는 전어구이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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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까지만 해도 나와 잔을 기울이던 수많은 술꾼들과 눈높이도 맞추어볼 겸, 도대체 우리가 왜 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지부터 한번 짚고 넘어가 보자. 술꾼들을 위한 변명. 우린 이런 이유들 때문에 도저히 술을 멀리 할 수 없었다고.

첫째, 친목. 초면에 만난 사람과 단시간 내에 친해지는 데에 있어서, 술의 기운만큼 검증된 것은 없다. 1차에서 서로에 대한 탐색이 끝나면, 2차로 자리를 옮겨 본격적인 호형호제의 시간을 갖고, 3차와 4차를 두루 거치고 나면 세상에 둘도 없는, 친형제 버금가는 혈맹이 탄생한다. 상당수는 술자리의 힘으로 끈끈함이 다져지고, 그렇게 이 나라의 낯선 사람들은 형제자매로 연결되는 것이다. 인맥이란 늘 술자리의 기운이 전달되는 곳까지만 뻗쳐 흐르게 마련이다.

특히나 나처럼 낯가림이 심한 사람들에게 알코올의 힘은, 소심함을 밟고 일어서는 화술의 거인이요, 부끄러움을 응징하는 면피의 달인으로 나타나곤 한다. 테이블에 쌓이는 빈 병의 개수만큼 상대와 나 사이의 신뢰의 지수는 상승할 것이며, 두텁게만 느껴지던 방어의 벽도 서서히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빈 병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 법이니까.

초면뿐만 아니고, 몸 담고 있는 사회의 구성원간 단합과 친목에도 술은 유용하게 활용되었다. 예전처럼 '부어라 마셔라'는 아니더라도 술 한잔 주고 받으며 직장 내 스트레스를 술잔에 녹여내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족발에는 역시 막걸리
▲ 족발과 막걸리 족발에는 역시 막걸리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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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영업. 영업하면 떠오르는 건 술상무. 술을 억지로 권하는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직업군. 물론 개인적으로 술상무 수준의 접대를 경험해본 건 아니지만, 한창 때에는 정말 의지와 상관없는 접대성 술자리('접대받는'이 아니고 접대하는)를 일주일에 세 번 이상 치러냈던 적도 있다. 예부터 어디 가서 대접 좀 받았다 큰소리 칠라치면, 떡 벌어지게 차려진 술상 앞에서 일단 흡족해야 하고, 1차적으로 술이 몇 순배 돌아야 사업도 협상도 설득도 회유도 부드럽게 윤활작용을 일으켜 비로소 어딘가로 굴러가는 것이다.

직업과 관련해서 만나게 되는 술자리 혹은 만남은 거의 대부분 영업이라고 보면 맞을 것이다. 영업이 아니면 친목의 범주에 포함될 테니까. 영업의 술자리가 부담스러운 것은, 상대보다 먼저 쓰러지면 안 된다는 정신력과 오로지 상대방의 관심사에만 맞장구치며 끝까지 들어줘야 하는 인내력, 그리고 상대의 기분을 살펴야 하는 직관력, 마지막으로 기분과 상관없이 동조할 수 있는 연기력까지, 다양한 마음가짐 또는 태도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노래방에 가서 20대의 노래부터 60대의 노래까지 아우를 수 있도록 사전 훈련이 필요하며, 최신 경향의 폭탄주 제조법은 필수고, 말아먹기를 선호하는 사람들에서부터 한 주종으로 끝장 보는 사람들까지 빈틈없는 데이터 정리가 필요하다. 그렇게 치밀하게 접근해도, 영업이란 '각본 없는 드라마'와 같아서 언제 어떤 방향으로 공이 튀어 오를지 모르니 늘 세심한 주의와 분위기 탐지가 필요한 고난이도의 술자리인 것이다. 이 지면을 빌어 오늘도 어딘가에서 영업을 위해, 심신을 혹사당할 이땅의 아버지들에게 심심한 경의를 표한다.

전국의 동지적 술꾼들에게 작은 보탬이 되기를...

소곱창 야채 구이
▲ 소곱창구이 소곱창 야채 구이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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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작업'. 할 말 참 많은 파트지만, 애 둘 키우는 유부남으로서 최대한 자제하기로 한다. 이성에 대한 작업에서 술의 존재감은 비로소 빛을 발한다. 술이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오면서 그 많은 부작용과 피해를 유발하면서도 아직까지 퇴화 또는 멸종되지 않고 우리 곁에 남아 있는 이유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작업의 중간자 역할이다. 연애가 아닌 작업으로 굳이 표현한 것은 그 단어가 담고 있는 단 한 가지의 순수한(?) 의도에 일단 집중하고자 함이다.

하지만 작업과 연관지어 떠오르는 술에 대한 이미지들은 그 값어치에 비해 굉장히 비하되는 경향이 있다. 솔직히 술이 빠진 작업은 굉장히 난이도 높은 영역이며, 그러한 경우 특정 분야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지니고 거기서 자체 발광하는 빛에 의해 이성을 눈멀게 만들어야 하는데,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일반인들에게 그런 능력은 희박하다. 따라서 우리 같은 민초들은 그저 술로 상대가 빨리 눈멀기만을 기도할 뿐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떠올리는 작업용 술은 독주(예를 들어 데킬라나 성자의 이름을 빌린 고급 양주들처럼 이름만 들어도 녹아버릴 것 같은 착각을 주는)일 거라고 착각하기 쉬운데, 실제 상황에서 독주를 작업용으로 사용하는 것은 너무 빤하게 티가 나기 때문에 아마추어임을 스스로 인정해버리는 꼴이 된다.

소나기 올 때 그걸 정면으로 맞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일단 피하거나 우산을 펴들게 마련이다. 작업에 사용되는 술은 최대한 도수가 낮아서 경계의 끈을 풀어 놓고 마실 수 있는 술이 좋다.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는 법이니까. 이렇듯, 술은 작업과 관련하여 오랜 기간 내 곁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고, 그렇기에 더더욱 쉽게 놓아주지 못한 이유가 되기도 했다.

홍어, 수육, 신김치의 절묘한 조화
▲ 홍어삼합 홍어, 수육, 신김치의 절묘한 조화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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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풍류. 위의 세 가지의 이유가 외부적 요인에 의한 것이라면 네 번째에 해당하는 풍류는 지극히 내부적 원인이다. 다시 말해, 술 자체를 즐기는 것이다. 술과 함께 굴러가는 인생이 사뭇 행복하고 여유까지 느껴지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개인차가 존재하며, '술은 못 마시지만, 술자리는 즐겨요'에서 부터 '술만 있으면 혼자서도 괜찮아요'까지, 술을 받아들이는 인생의 자세는 모두 다를 것이며, 술을 소화해내는 개인의 생리적 여건에도 분명 차이는 나타나게 마련이다.

본인의 경우에는 술자리보다 술 자체를 즐겼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에는 그 양의 한계를 몰랐던 것을 통해 볼 때, 이미 주당의 경지를 넘어서 풍류의 자리까지 오른 상황이 아니었나 싶다. 주당과 풍류는 분명한 경계에 의해 나뉜다기보다는 술이라는 존재의 본질에 피상적으로 접근하였는가, 아니면 심오한 철학적 접근을 하였는가의 차이이므로 어지간한 일반인의 시각으로는 구분하기 어렵다. 주당과 풍류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추후에 따져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상 네 가지 정도로 매우 주관적 시각에서 술을 마실 수밖에 없던 이유에 대해서 분석해보았다. 어찌 보면 어느 알코올중독자의 양심선언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맞다. 나는 내 스스로를 알코올중독으로 진단하였으므로 이렇게 만인 앞에 용기 내어 신고하는 것이다. 다음 편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다루게 될 치유기가 위와 같은 변명 혹은 핑계를 찾는 동지적 술꾼들에게 작은 보탬이 되기를 진심으로 갈망하는 바이다.

글 중간중간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의 안주 사진을 삽입했다. 사진을 보면서 술 한잔 생각난다면, 당신은 분명 알코올중독의 고위험군이다.


태그:#알콜클리닉, #알콜상담센터, #금주, #주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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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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