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울산문수축구경기장, 3.4위 전이 시작되기 1시간 전 평소 같으면 꽉 찼을 경기장 곳곳이 비어 있다. 2층은 완전히 텅 빈 상태. 대부분 축구 팬들이 한국대표팀의 결승 진출을 예상했던 탓에 표가 많이 남은 탓이다.

"대한민국 팀의 박항서 감독입니다"
대표팀에게 쏟아진 관중들의 함성과 박수


경기장 왼편 중앙에는 2천여 명의 붉은악마 회원이 찾아와 대형태극기를 펼치는 등 응원연습을 진행했다. 붉은악마의 오른편으로는 북측 응원단이 자리를 잡고 '반갑습니다' 등의 노래에 맞춰 율동으로 남측팀을 응원했다.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북측 응원단이 북측 경기가 열리지 않는 경기장을 찾아와 남측팀을 응원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 경기 시작 전 이들은 붉은 악마와 함께 응원하진 않았지만 준비해온 3-4가지 곡에 맞춰 남측 선수들을 격려했다.

 아시안게임 3.4위전 경기가 진행되고 있는 울산 문수구장. 2층 자리가 많이 비었다. 1층 중앙에 북측 응원단 모습이 보인다
ⓒ 스포츠피플 이혜준

관련사진보기


경기 시작 전 태국 대표팀에 이어 장내에 한국 대표선수들의 이름이 소개되자, 관중들은 일일이 한 사람에게 함성과 박수를 보내주며 크게 환호했다. "대한민국 팀의 박항서 감독입니다"라는 마지막 소개에도 역시 큰 박수가 쏟아졌다.

객관적 전력이 한 수 위인 한국은 90분 경기 내내 주도권을 장악했다. 경기시작 15분만에 박동혁 선수가 헤딩으로 선취골을 터뜨렸다. 그 후에도 이동국과 최태욱 선수가 몇 차례 위협적인 슛을 날렸으나, 결국 득점 없이 전반전을 종료했다. 전반전에서 태국 선수들에 비해 월등한 기량을 보인 한국 선수들은 후반전에선 다소 힘들게 경기를 풀어갔다.

미드필더들의 움직임이 둔해지고 패스가 자주 끊긴 것. 터질 듯 터지지 않던 두 번째 골은 후반 28분에 나왔다. 이영표의 센터링과 최태욱의 짧은 패스를 받은 이천수가 강력한 마무리 슈팅으로 한 점을 추가했다. 골을 넣은 이 선수가 그 자리에 주저앉아 기도한 지 1분 후, 이번엔 최태욱 선수가 김은중의 센터링을 받아 왼발 터치 슛으로 세 번째 골을 기록했다.

후반전 들어 수세에 몰릴 때마다 박항서 감독은 몇 차례씩 자리에서 일어나 선수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연이어 골이 터지고 한국의 승리가 확정되자 박 감독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벤치에 앉아 조용히 경기를 지켜봤다.

35분 최태욱의 결정적인 골 찬스 이외에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더 이상은 추가 득점 없이 경기가 종료됐다. 3:0의 스코어로 한국의 동메달이 확정됐다.

경기를 마친 선수들은 붉은 악마가 앉아 있는 관중석으로 와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선수들을 맞는 붉은악마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든 채 수고한 선수들에게 환호와 박수를 보냈다.

"박항서는 마음에 안 차, 잘못은 '축협'"

 경기중 앞으로 나와 코치하는 박항서 감독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 스포츠피플 이혜준

관련사진보기

하지만 경기 종료 후 만난 붉은악마와 관중들 대부분은 "아쉽다"는 반응이었다. 결승 진출 실패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3. 4위전 응원을 총괄한 이현두(25)씨는 "이겼지만 많이 아쉬웠다"며 "월드컵 때 멤버와 많이 다르지 않아, 결승 올라가서 금메달 따길 학수고대했다"며 씁쓸해했다. 대부분 이씨와 같은 생각이었던 붉은 악마 회원들은 이 날 경기 관람을 위해 미리 예매해둔 결승전 입장권을 버려둔 채 급히 3,4위 전 표를 구해야 했다고.

이씨는 "(결승전)표를 환불하지 않은 일부는 바로 결승전을 보러 갈 예정이지만, 아마 속상해서 안 가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또 그는 박항서 감독에 대해서는 "자질 부족"이란 입장이었다. "4강전에서 이란이 뻔히 보이는 전술을 썼는데도 이를 활용하지 못했다"는 것. 하지만 대한축구협회(이하 축협)에 대한 비판 역시 뒤따랐다.

"한번 맡겼으면 끝까지 밀어줘야 하는데 너무 잡고 흔들었어요. 결국 박항서 감독도 히딩크의 희생양인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네요."

딸과 경기장을 찾은 정종운(41)씨는 '박항서 감독 경질'에 대해 유보적 입장이었다. 검증을 하기에 주어진 시간이 너무 짧다는 것.

"히딩크 감독 체제 이후 제대로 조직력도 안 갖춰진 상태인 데다, 협회도 너무 몰아붙였지 않습니까. 이번에 3위에 머물렀지만 검증하기엔 시간이 너무 짧은 것 같습니다. 아테네 올림픽까지 그대로 박항서 체제로 나가는 게 좋지 않겠나 싶은 생각입니다."
"좀 그랬다."

마지막으로 경기장 출입구에서 만난 붉은악마 회원 박재열씨(29) 역시 경기가 끝난 후 소감에 대해 '별로'라는 반응이었다.

"이란 전에서 잘 했으면 좋았을 걸.(주변의 10여명의 친구들을 가리키며)저 사람들 다 표 환불하고 왔어요".

몹시 속상해 하는 박씨에게 '그렇게 속상한 데도 경기장을 찾았나?'고 묻자, 당연하다는 듯 그는 기자의 얼굴을 쳐다보며 반문했다.

"붉은악마가 뭡니까? 우리는 국가대표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응원합니다."

 3.4위전, 어김없이 목청껏 응원하는 붉은악마들
ⓒ 스포츠피플 이혜준

관련사진보기

박씨는 박항서 감독에 대해 '떠나야 할 사람'이란 입장을 취했다. "자기 스스로 떠난다는 사람을 어떻게 말리겠나"는 것. 하지만 앞서 만난 붉은악마 회원처럼 박씨 역시 문제는 박항서 감독 이전에 '축협'에 있다고 주장했다.

'선수 기용, 조직력 부족, 스트라이커 부재'와 같은 많은 문제점으로 아시안게임 대표팀이 결승 진출에 실패했지만, 이는 "감독 뒤에서 계속 압력을 가하는 축협의 영향이 크다"는 것. 마지막으로 그는 축협에 경고했다.

"협회에서 계속 이런 식으로 한다면, 이번과 같은 '어처구니없는 결과'(아시안게임 결승진출탈락)는 앞으로 계속 되풀이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스포츠피플(www.sple.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