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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가그라~" "다시 만납시다". 16일 북측응원단을 태운 만경봉호가 긴 고동소리를 울리는 가운데 그보다 더 긴 이별인사가 부두에 울려퍼졌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인제 가면 언제 올랑교.”
“다시 만납시다요.”
“정 들자 이별이란 말이 딱 맞구만.”
“누이를 멀리 시집보내는 기분이네요.”
“잘 가이소."

15일 낮 1시. 환송행사가 끝나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인제 갈랑갑다. 우짜겄노.” “아이구 저렇게 갈 것을.” 비닐봉지를 깔고 땅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던 노인들이 눈시울을 적시며 말을 내뱉었다. 70대의 한 할머니는 “못 보겄다”고 말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자 이내 ‘부웅~’하는 소리가 들렸다. 뱃고동 소리였다. 다대포항이 내려다 보이는 다송아파트에 산다는 한 노인은 “이전에 듣던 뱃고동 소리가 아니여. 더 슬프게 들리는 구먼”이라 말했다. 사람들은 ‘더 가까이 가서 보자’면서 ‘와~’하는 함성과 함께 달려가기 시작했다.

▲ 환송식장을 둘러싸고 있는 철조망밖으로 수천명의 시민들과 노란옷을 입은 경찰들이 보인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환송행사장과 수천명이 몰린 곳은 50여 미터가 떨어져 있다. 4차선 도로와 공터가 사이에 있다. 경찰 병력이 일렬로 서 있었으며, 경찰은 그것도 모자라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붙인 줄을 쳐 놓고 있었다. 일반 주민들이 볼 때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공간처럼 느껴졌다. 경찰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안전통제 차원에서 취한 조치였다.

그런데 ‘철통같던’ 그 안전통제선이 무너진 것이다. 사람들은 함성과 함께 도로를 지나 공터를 지났다. 마치 휴전선을 뚫고 북으로 달려가는 남측 사람들의 모습처럼 느껴졌다. 부두와 공터 사이에는 철조망이 설치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가시가 돋힌 철조망도 아랑곳하지 않고 담벼락에 올라섰다. 철조망 사이로 얼굴과 손을 내밀었다.

‘가는 거 못 보겠다’면서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리는 사람, 목이 쉬도록 ‘잘 가이소’를 외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한 쪽에서 ‘우리는’이라고 외치면 배에 탄 사람들은 ‘하나다’라고 화답했고, 또 ‘조국’이라고 하면 ‘통일’이라는 대답이 왔다.

이 광경을 눈시울을 적시며 손을 흔들어가면서 지켜본 아리랑응원단 김영만 총단장은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도 이랬을까. 경찰 안전통제선과 철조망을 뚫고 북쪽 사람들을 더 가까이에서 보고자 하는 모습이 놀랍다”면서, “이제 우리는 ‘작은 통일’을 이룩한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 철조망에 매달려 손을 흔드는 시민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통일염원호’, ‘만경봉호’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봐

헤어지기가 아쉽고 슬픈 것은 남이나 북이나 마찬가지였다. 공식행사를 마친 북한응원단이 배에 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누구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달려들어 서로 손을 잡았다. 북한응원단 중에는 울먹이는 사람도 있었다. 남측사람들과 손을 잡고 건넨 말이 “다시 만납시다” “통일되면 다시 만납시다”였다.

수천명의 주민뿐만 아니라 북한 응원단도 마음과 눈길과 손짓은 한결같았다. 행사 도중 8도의 염원을 담은 ‘통일염원호’가 비상할 때도 그랬다. “부산사람들은 통일을 염원합니다”라고 새겨진 대형 고무풍선이 하늘로 날아올라 갈 때,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사회자도 그 분위기를 직감한 듯 다음 순서를 말하지 않고 한동안을 기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만경봉-92호가 뱃고동을 울리며 사라진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돌아가지 않고, 철조망을 부여잡고 서 있었다. 배가 수평선 멀리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았다. 부두가에 서 있던 남측 행사 참석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바다에 뛰어들 분위기였다. 사회자는 “부두가에서 조금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바다에 뛰어들 것 같아서 그럽니다”고 부탁을 했는데, 그 말이 하나도 과장된 말로 들리지 않았다.

▲ 가시 철조망 사이에 몸을 집어 넣은 채 떠나가는 만경봉호를 바라보는 부산시민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배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철조망이 쳐진 담벼락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말했다. “가시에 찔렸어. 그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피가 나기도 하네”라고. 그러자 옆에 있던 60대 할아버지는 “난 뛰어 오다가 돌에 걸려 넘어졌지”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결같이 말했다. “괜찮아. 아프지도 않아. 더 좋은 걸.”

실향민은 의외로 찾기 힘들어... 일반 국민들의 통일열망 실감

만경봉-92호가 떠나는 다대포항에는 수천명이 몰려 들었다. 일반적으로 북한에 고향을 둔 ‘실향민’이 많을 것이라 짐작되었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취재 기자들이 사연이 많은 사람을 찾고자 했지만, 그렇게 많이 눈에 띄지 않았다.

50년대 말 북송선을 타고 북으로 간 동생을 찾는다는 재일교포 출신의 임관옥씨와 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라 불렀던 고아원 원장을 생각하며 아코디언을 연주한 이희완씨 사연이 전부였을 정도다. 대부분 일반 주민들이었다.

부산에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대구와 울산 마산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다. 40대는 직장도 가지 않고 나왔다고 할 정도였다. 건국중학교에서는 소풍을 이곳으로 오기도 했다. ‘실향민’의 애틋한 사연도 중요하지만, 일반 국민들이 통일에 대한 염원이 얼마나 깊은가를 짐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제14회 부산아시안게임은 ‘통일의 꿈’이 멀리 있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해 주었다. 사람들에게 소감을 묻자 “처음 당하는 일이라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한 첫 경험은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이 현실이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릴 것이다.

▲ 한 할머니가 멀어지는 만경봉호를 아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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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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