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겁쟁이라고 했나, 이 용맹한 강아지에게

[유기견 입양기⑦] 집 지키는 가을이, 놀랍다

등록 2013.08.10 17:05수정 2013.08.1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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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스러운 털의 밤비 비슷한 시기 입양되었으나 외모 차이로 주눅든 모습,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 이현진


겨우 이사를 했다. 개가 있다고 집을 보지도 않고 가버리는 사람들이 많아 집이 나가는 데 오래 걸렸다. 개가 있다고 주인이 거부하는 집이 많아 구하는 데도 또 좀 걸렸다. 그렇게 조건에 맞추다 보니 평균기온이 가장 높은 시기에 일을 치를 수 있었다. 오매불망 고대하던 이사였지만 육체적으로는 최고로 힘들었다.


얼마나 땀을 흘렸을까. 실연당했을 때 흘린 눈물보다 더 많이 흘렸지 싶다. 아니, 그건 아닌가? 아무튼 관건은 '가을이'의 새 집 적응 여부일 텐데, 한동안은 섭식과 배변을 거부하며 신경이 곤두서 있다가 이제 서서히 입맛이 돌아온 것 같다. 밥을 제대로 먹으니 변도 황금색을 되찾아 다행이다.

5년을 살아온 예전 집은 장례식장 바로 옆이었다. 하여, 치안은 안심이 됐지만 낮이며 밤이며 곡소리가 들려왔다. 돌아가신 분과 유족의 슬픔을 생각하면 덩달아 마음이 안 좋아지곤 했다. 하지만 더 안타까운 건 꼭 빠지지 않는 유족 간의 다툼과 술주정이었다. 그리고 문상객들이 모여 동창회를 하듯 왁자한 수다가 잇따라 늘 귀가 따가웠다. 겁이 없는 편이라 꽤 오래 버티긴 했지만 그 소음으로부터는 벗어나고 싶었다.

이번에 주택가에 위치한 작은 원룸으로 이사 오니 집안에서도 속삭여야 할 만큼 동네가 조용하다. 굳이 흠을 잡자면, 즐비한 중국음식점 때문인지 화교가 많이 사는데, 종종 들려오는 4성의 화음이 아직 어색하다.

한번은 새벽에 부부싸움이 났다. 아주머니는 울부짖고 아저씨는 화가 나 소리치고 있었다. 곤히 자던 가을이가 벌떡 일어나 창 쪽을 바라보며 상황을 이해하려 애썼다. 나 역시 우리말이라면 돕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싸움이 있기 마련인가 보다.

그래도 산책을 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환경이다. 차가 다니지 않는 골목길,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 다양한 종의 동물 친구들. 숨 막히는 열기 속에서도 가을이는 연신 코를 실룩이며 새로운 냄새를 습득해나가고 있다.


"왈왈왈왈왈!" 주인의 마음을 읽은 가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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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선미를 뽐내는 이웃 개, 리오 하지만 엄마 눈엔, 그저 가을보다 조금 더 길 뿐. ⓒ 박혜림


이사 온 첫 날의 일이다. 전등을 고치러 온 기사분이 금세 일을 끝낸 것까진 좋았는데 전기코드를 우리집 화장실에 꽂고는 밖에서 무언가 한참을 더 진행했다. 무슨 일이냐 물으니, 주차장에 구멍 운운하며 가장 가까운 콘센트가 우리집 밖에 없고 전기세는 10원 어치도 안 나오게 금방 끝낼 거란다.

그럴 거면 미리 양해를 구했어야 하는 게 아니냐 했으나 슬그머니 말끝을 흐리고 작업으로 돌아갈 뿐이다. 날은 덥고 얼굴 붉히긴 싫어 찜찜한 마음으로 돌아섰다.

그런데 몇 분 후, 가을이가 최초로, 정말이지 일생일대 최초로 맹렬하게 짖어댔다.

"왈왈왈왈왈!"

바로 그 기사분이 아무도 몰래 집에 들어와 코드를 다시 빼 가려는 찰나였다. 단 한 번도 사람에게 거칠게 군 적이 없는 가을이의 이토록 무서운 모습은 처음 봤다. 송곳니를 잔뜩 드러내고 세상에서 가장 사나운 투견처럼 집을 지키는 든든한 모습이라니!

옆에서 이 과정을 고스란히 목격한 엄마는 가을이를 '신이 내린 개'처럼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 털도 볼품없고 애교도 없다며 가을이를 영 마뜩잖아 했던 엄마가 가을이의 이마에 뽀뽀세례를 퍼부으며 고맙다 기특하다 칭찬을 했다.

"정말 영리하구나. 주인의 마음을 읽는 것 같다."

아저씨가 재빨리 사라지자 가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소의 온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분도 많이 놀라셨겠지만, 허가하지 않은 침입자에 대한 가을이의 경계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엄마에게 가을이는 '신이 내린 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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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가을 어느새 보니 둘이서 같은 자세로 잠들어 있다. ⓒ 박혜림


그날 이후로 엄마의 가을이를 향한 신뢰와 배려는 '로열 베이비'의 그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외출할 땐 가을이를 위해 선풍기를 켜놓고 나가고 최대한 빨리 돌아올 것이며, 그게 불안하면 에어컨을 구매하란다.

내가 다리가 늘씬한 여느 개를 보고 감탄을 할라치면, 가을이의 다부진 다리가 훨씬 매력적이라며 고개를 돌린다. 나와 한 침대를 쓰는 가을이가 뒤척이며 불편해하자 가을이 전용 소파라도 장만해 모시 이불을 깔아줘야겠다고 계획한다.

이런 마음이 전해졌는지 가을이는 사뿐사뿐 다가가 엄마의 손을 세 번 정도 핥는다. 오로지 나만 바라보는 줄 알았는데, 아니다. 그리고 짧은 앞발을 들어 엄마에게 하이파이브를 청하기도 한다. 그러면 엄마는 탄복하여 냉장고에서 고기를 꺼내 가을이를 위해 굽기 시작하는 거다. 어쩔 때 보면 둘이서 윙크를 주고받는 것 같기도 하다.

뭐, 싸우지 않고 서로 사랑하는 모습은 언제든 보기 좋다. 새 보금자리에서 가을이와 이웃들이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기를(지금까지 선풍기 한 대로 여름을 보내온 나는, 초소형 벽걸이 에어컨을 구매하고야 말았다).
#가을이 #이사 #집지킴이 #믿음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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