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짜리 공간에서 10년을... 말문이 막혔다

[유기견 입양기①] 얌전하고 의젓한 가을이가 우리집으로 왔다

등록 2013.03.24 14:10수정 2013.03.24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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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소의 강아지들 어느 아이를 입양하고 싶으세요? ⓒ 박혜림


사람은 자신과 닮은 상대에게 호감을 갖는다. 실제 연구사례도 있고, 이루어진 한 쌍이 소름끼치게 서로 닮은 경우도 여럿 봤다. 옛 남자친구는 내 말투나 표정을 기막히게 잘 흉내 냈는데, 그 모습이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한참 웃다가 내가 왜 이리 웃나 싶어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에게서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게 놀라웠고, 그럼 나는 '나를 사랑하나?' 하는 괴상한 결론에 이른 적도 있다.


내가 입양하고 싶은 강아지도 꼭 나와 성격이 닮아 있었다. 자신을 봐달라고 목청껏 짖어대는 왈왈이, 응가와 쉬를 밟아대며 반가움을 표현하는 유비, 거대한 몸통을 나비처럼 내던지는 해탈이. 모두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는 아이들이다. 그 중, 최근에 보호소에 들어온 이름도 없는 흰둥이는 더욱 눈에 밟혔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좁은 케이지 안에 있었는데, 쉼 없이 낑낑대며 앙살을 부렸다. 가여운 마음에 꺼내서 안아주면 아기처럼 착 달라붙어 입에 뽀뽀를 해댄다. 아, 이대로 집에 데려가고 싶다!

함께 봉사하는 친구들은 조심스레 말렸다. '좁은 오피스텔에 혼자 사는 견주'에게 모두 '맞지 않는' 경우였기 때문이다. 단언할 순 없지만, 곁에 사람이 없을 때 울부짖거나 집안에서 난동을 부릴 것 같은 습성이 어렵지 않게 파악되었다. 그렇지만 저 처량한 눈빛들은 어쩌지?

하얀 바탕에 회색, 연갈색 무늬...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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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와 아름이 이 눈빛에 넋을 놓았다. ⓒ 이현진

고민하던 중 '가을이'를 만났다. 400마리의 유기견들을 다 기억할 순 없는데, 일상으로 돌아와 사진을 보다가 가을이의 눈빛에 일시정지 된 것이다. 귀가 뾰족하고 눈에는 쌍꺼풀이 있다. 지저분한 이불 위에 짝꿍 아름이와 꼭 붙어있다.

짧은 다리는 다부지다. 하얀 바탕에 회색, 연갈색 무늬. 사실 내 눈에 예쁘지 않은 개는 없기에 외양 묘사는 무의미하고, 보호소 소장님의 '최소 10년'이란 말씀이 가을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운명의 데스티니.


'평강공주 유기견 보호소'는 1992년 설립된 '생명의 집'에 있던 개와 고양이들이 현재의 보호소 소장님과 함께 2005년 이전하여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가을이는 '생명의 집'에서부터 있어 온 아이다.

"2003년인가…. 어떤 남자 분한테 구조돼서 왔는데…."

한 평 남짓 견사에서 최소한 10년을 지내왔다고 생각하니 말문이 막혔다. 똑같은 사료, 똑같은 벽. 잠시 왔다가 가는 봉사자들. 추위, 더위, 엄청난 소음. 개의 즐거움인 달리기나 땅파기는 절대 할 수 없는 상태로 긴 세월을 견뎌온 것이다. 더군다나 가을이는 품에 안길 크기도 아니고 이름 있는 종류도 아니고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라 이렇게 보호소에서 여생을 마칠 확률이 컸다. 남은 날들이라도 따뜻하게 지내게 해주자 마음먹고 채비를 서둘렀다.

2월 7일 추운 저녁, 가을이는 컨테이너 형태인 '봉사자 탈의실'에서 새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껏 보아온 얌전한 모습이 아닌 극도로 긴장한 상태. 송곳니를 드러내며 다른 개들에게 "콰릉!" 무섭게 짖었다. 자자, 흥분을 가라앉히고 새엄마에게 오렴.

차에 타자마자 가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의젓해졌다. 개의 호기심과 들뜸은 어린 아이와 많이 비슷한데, 차 안에서의 불안한 상태는 더욱 그렇다. 창밖을 보다가 자세를 뒤집다가 보채다가 멀미를 하다가. 이게 차를 처음 탄 보통 개들의 모습인데 가을이는 내 무릎 위에서 잠시 머물더니 발딱, 패드를 깔아놓은 옆자리로 옮겨 앉는다.

네 발을 오므려 고개를 파묻은 자세에 한 치도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러곤 곧 색색-숨이 깊어졌다. 벌써 잠들었나? 고마울 따름이다. 먼 길 힘들어할까봐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마냥 태연하다. 가을이는 내릴 때까지 딱 한 번 패드를 박박 긁어 자리를 재정비한 뒤론 움직이지 않았다. 90여 분간, 여느 인간보다도 점잖은 가을. 보드라운 털을 마구 껴안고 싶었던 나는 서운하면서도 신기하기만 했다.

"대소변을 한 번에 가렸다!"

누추하지만 너의 스윗홈이 될 곳이란다. 현관에 내려놓으니 재빨리 소파 위에 올라가 다시금 반듯하게 앉는다. 눈만 또롱또롱 굴리며 미동도 없다. 무슨 생각을 할까? 귀만 쫑긋쫑긋. 사료도 물도 관심 밖. 오늘은 이렇게 마무리해야 하나? 가을이의 도착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한다. 입을 꾹 다물고 눈만 띵그런 사진을 찍어 전송하니 친구들 말하길, "가을이 너 닮았어!"

정말? 결국 나는 나 닮은 반려견을 선택한 건가? 아무려나 기쁘다. 가을이와의 삶이 조금 더 따뜻해질 것 같아 심장이 마구 뛴다. 내일은 맛있는 밥도 먹고 산책도 하고 예방주사도 맞자, 가을아!

가을이의 표정은 '다 안다' 같다. 정말 다 아는 것 같다. 동물병원에서도 '보호소에서 10년'이면 '그럴 수 있다'고 한다. 정말일까?

가을이는 한 번 간 길은 기억한다. 한 번 한 행동도 기억한다. 나의 행동 패턴을 기억한다. 믿을 수 없다고? 그렇다면, 이 말엔 모든 견주들이 감탄할 거다. "대소변을 한 번에 가렸다!"

이 아이는 내 집에 발 디딜 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한 낌새더니 한사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어디 네 녀석의 영특함이 어디까지인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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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산책용 목도리를 하고. ⓒ 박혜림

첫 날, 배변패드에 조신하게 쉬야만 했던 가을이는 밖을 나서자마자 시원하게 응가를 했다. 그동안 황태 별식을 먹이며 변비인가 걱정하던 나는 가을이의 초록빛 구린내가 반가워 손뼉을 세 번이나 칠 뻔했다. 자신의 보금자리와 뒤처리의 영역을 분리하는 개의 습성이 살아있다니.

첫 산책은 집 뒤의 초등학교를 한 바퀴 도는 걸로 만족했으나 날이 갈수록 가을이는 새로운 길을 탐했다. 세상이 이렇게 넓구나, 확인하며 즐거운 모양이다. 코는 반들반들, 발걸음은 가볍게 탁탁탁. 앞장서서 잡아끄는 힘이 제법 세졌다.

그러곤 꾀가 생긴다. 동서남북 어느 쪽에서도 집으로 향하는 길을 정확하게 알아채고 버티기 작전이다. 목줄을 당기며 어르고 달래 보아도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한다. 더 놀고 싶겠지. 궁금한 게 많겠지. 하지만 가을아, 하루 두 번 30분씩으로도 엄마는 충분한 것 같은데…?

가을이는 내가 산책을 위해 옷을 갈아입는지 돈 벌러 나갈 준비 중인지 구분한다. 전자이면 발을 동동 구르며 목줄 앞에서 대기, 후자면 단정하게 현관에서 배웅. 잘 다녀오라고 혹은 기다리겠노라고 눈으로 말한다. 이 모든 걸 나는 가르친 적이 없는데 가을이는 어떻게 알았을까? 이래서 사지 말고 입양하라고 하는구나. 눈칫밥 먹으며 쓸쓸히 보냈을 시간을 생각하니 미안함이 앞선다. 가을아, 고마워. 내가 널 위해 해줄 건 없겠니? 네가 알아서 다 하는구나.

지금까지 이렇게 차분하고 사려 깊은 반려견은 없었다

지금까지 많은 반려견들을 만나봤지만 가을이처럼 차분하고 사려 깊은 아이는 없었다. 달리 말하면 의심이 많고 체념이 빠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애견숍에서 생후 2개월에 데려와 집에서 키우기 시작한 많은 강아지들이 가공할 사랑스러움에 버금가게 견주들을 귀찮게 한다. 재워주세요. 먹여주세요. 놀아주세요. 만져주세요. 이건 싫어요, 저게 좋아요…. 가슴 아프게도 가을이에겐 찾을 수 없는 면들이다. 내 품에 폭 안긴다거나 쓰다듬으면 배를 발랑 뒤집는다거나 하지 않는다. 잘 때는 두 뼘 떨어져서, 옆에서 부산스러우면 밥을 먹다가도 멈춤, 산책이 고프더라도 크게 한숨 한 번 쉬고 등을 돌려 눕는다.

그러나 가을이는 하루가 다르게 다가와 준다. 아주 조금씩이지만 그래서 더욱 두근거리는 설렘이다. 책상에 앉아있는 나를 멀리서 물끄러미 바라만 보다가, 다음 날엔 발치에 와서 앉아 있다가, 다음엔 앞발을 들어 올려 내게 기댄다. 외출 후 돌아왔을 때 제 방석 위에서 하품을 하던 녀석이 꼬리를 치며 다가올 때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고, 오른발을 들어 올리며 얼굴을 내 손에 비빌 땐 탄성이 절로 나왔다.

자는 모습은 어떤가. 암탉이 알을 품듯이 몸을 동그랗게 말아 고개를 파묻는다. 때문에 나는 가을이의 배와 가슴 쪽 피부상태를 살필 수 없었다. 강제로 들어 올리려 하면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너무 큰 스트레스를 주는 것 같았기에 시간을 두고 기다리기로 했다. 사랑은 기다림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틀 쯤 지나니 가을이는 구부렸던 고개를 뒤로 젖혀서 자다가, 또 하루 지나니 다리를 편안히 폈고, 요즘은 제 멋대로 몸을 늘리기도 휘기도 하며 잘 잔다. 사람처럼 배를 드러내고 자는 반려견들을 따라가려면 멀었지만 저 정도만으로도 감계무량이다. 부디 그간 뭉친 근육이 풀리고 관절에 숨통이 트이기를.

심장사상충 양성 판정... 억장이 무너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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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는 가을 초반의 웅크린 모습과 달리 많이 편해진 요즘. ⓒ 박혜림


심장사상충 음성 판정을 확인하고 가을이를 데려왔다. 종합백신을 맞히고 구충제를 먹이고 광견병 예방 주사를 맞혔다. 유기견이라고 광견병 비용은 받지 않으셨다. 칭찬도 담뿍 안겨주셨다.

산책을 하다보니 가을이의 왼쪽 뒷다리가 깨갱이다. 관절을 오므려 발을 딛지 않는 게 불편한가 보다. 발바닥은 괜찮으니 뼈에 문제가 있나 싶어 엑스레이를 찍었다. 다행히 골격은 이상이 없는데 혹시 염증이 있을지 모르니 진통제 4일치를 처방 받았다. 깎아 주셨다. 그것도 외상으로….

딸기향 진통제를 먹은 후에도 다리 상태는 여전하다. 아파하지는 않고 간헐적으로 깨금발이다. 의사 선생님은 습관적으로 그럴 수 있다며 크게 괘념치 말라신다.

가을이와 한 방 쓰던 아름이, 최근 입양이 됐는데 속상한 소식을 전했다. 피검사를 했더니 심장사상충 유충이 나왔다고 한다. 가을이도 안심할 수 없기에 병원에 달려갔다. 피검사에서는 유충이 보이지 않는데 키트 검사에서 심장사상충 양성 판정이 나왔다. 키트 오류일 수도 있으니 다른 키트로 다시 검사해보자고 한다.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 가을이는 나이가 많아 치료가 고될 수도 있는데 그걸 어떻게 지켜봐야 하나.

눈물을 감추느라 의사 선생님의 설명도 잘 못 알아들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고 지인들의 경험담을 듣고. 머릿속은 더 복잡해진다. 건강한 줄만 알았던 가을이에게 시련이 닥칠까봐 겁이나 죽겠다. 가을아, 일단 내일 다시 검사해보자. 괜찮을 거야.
#가을 #유기견 #입양 #보호소 #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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