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 풀 뜯어 먹는 소리가 이리도 숭고할 줄이야

[유기견 입양기4] 매력적인 야생녀 가을이의 과거가 궁금하다

등록 2013.05.17 21:12수정 2013.05.1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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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지내던 곳 나무 바닥, 벽. 정말이지 휑 하다. ⓒ 박혜림


지구상 수많은 생명체 중 유독 개와 인간이 가장 친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두 동물 모두 정을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물론 개의 조상인 늑대가 처음부터 인간의 손길을 즐기지는 않았겠지만, 귀엽고 순한 어린 늑대를 키우는 것을 시작으로 인간은 현재 수백종류에 이르는 애완견을 창조(?)해냈다.


연약한 유아기를 지나 따뜻한 시선을 나누고, 스킨십을 즐기고, 섬세한 감정 변화를 겪는 등 닮은 점이 많은 사람과 개. 그러나 네 발로 걷는 그네들과 우리는 하늘과 땅만큼 다르기도 하다. 포옹을 할 수 없는 구조, 월등한 후각과 청각 능력, 꼬리를 치고, 짖어대고…. 한 행동학자는 인간이 개와 같은 방식으로 인사하지 않아도 되어 신께 깊이 감사한다고 했다 (개는 상대의 항문에 코를 박고 정체를 파악한다).

가을이의 '가을이다움'은 어디서 연유한 것일까? 가을의 어린 시절과 성장기는 어땠을까? 안타깝게도 아주 조금만 유추해낼 수 있다. 한 남자가 성견(어쩌면 청소년기)인 가을이를 구조하여 자신의 집에서 키웠다. 그러다 "도저히 안 되겠어"서 보호소에 맡겼다. 가을이가 태어나서 그 남자를 만나기 전까지의 과정은 알 수 없지만, 잠시나마 귀여운 반려견으로 살아보긴 한 것 같다.

보호소 생활... 영양 간식은커녕 산책, 목욕은 기대하지 말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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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꼬까 야생견은 옷이 어색하다 ⓒ 박혜림


이후 가을이는 보호소가 자신의 집인 줄 알고 10년을 살아왔을 것이다. 거친 맨바닥에서 여러 개들과 함께 지내는 보호소 생활. 영양 간식은커녕 산책, 건강 검진, 목욕은 기대하지 말아야 했다. 외로움이나 추위, 두려움을 나눌 수 있는 존재는 같은 방 친구뿐. 그 친구가 전염병이 없고 사납지 않기를 바라야한다. 종종 작업복과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이 들어와 청소를 해주고 쓰다듬어 주긴 한다. 소장님은 가을이 외에도 챙겨야할 식구가 많아 늘 바쁘다. 이러한 환경 탓인지 가을이의 행동양식은 '야생'에 가깝다.

해가 뜨면 가을이는 나를 깨운다. 조신한 숙녀처럼 다가와 반복적으로 입맛을 다시거나 두 번 정도 핥거나, 아니면 앞발을 들어 살며시 건드린다. 가을이의 이런 모습은 나에겐 선물과 같아 아무리 피곤해도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날은 유독 잠을 설쳐 눈 뜨기도 힘든 채로 사료와 섞어줄 고등어(소금기를 빼기 위해 전날 물에 팔팔 끓여둔)의 살을 발라내고 있었다.


코를 벌름 거리며 기대를 머금은 가을이에게 아침밥을 선사했는데… 이럴 수가! 잔가시가 있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가을이의 움직임은 2배속으로 빨라졌다. 무언가 물어뜯을 것을 찾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책상 다리, 가방 끈, 옷 귀퉁이들을 씹으려 들었다. 그러고도 성에 안 차는지 딸꾹질을 하며 현관문 쪽으로 달아났다. 퍼뜩 정신이 든 나는 가을이를 집 밖 가로수 근처로 데려나갔다. 납작한 잡초를 맹렬히 뜯어먹는 가을. 풀 뜯어먹는 개의 모습은 숭고하기까지 하여 묻거나 말릴 새도 없었다. 가을이가 진정한 후 검색을 해보니 속이 불편하거나 스스로 구토를 유도할 때 개는 풀을 찾는 본능이 있다고 한다. 엄마의 실수를 현명하게 대처한 딸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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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남긴 사료 다 이유가 있고 생각이 있어서 저런 거다. ⓒ 박혜림

밥그릇에서 사료를 덜어내 바닥에 흩뜨리곤 허공에서 모으는 행위는 가을의 주특기 '숨기기'이다. 마치 비질을 하듯 가운데에 양식을 놓고 주둥이를 바삐 움직인다. 비상식량으로 쓰려고 쟁여두려는 건지도 모른다. 자기만의 안식처에 물어다 놓기도 하고 밥그릇을 담요로 야무지게 덮어놓기도 한다.

처음엔 밥을 깨끗하게 안 먹고 남기거나 흘리는 가을에게 "밥 남기면 벌 받아. 세상엔 굶는 어린이가 많아"라며 훈계를 했지만, 개의 습성을 알고 나니 내가 억지였다. 개는 자신의 영역과 먹이가 어느 정도 확보되어야 안심한다. 그러니 밥그릇을 비웠다고 싹 치워버리기 보다는 자율 급식으로 개가 언제든 취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좋다. 요즘도 가을이는 아무리 맛이 있어도 단 한 알의 사료라도 꼭 남긴다.

산책을 하다 가을이가 평소의 반의 반으로 행동이 느려질 때가 있다. 시선은 한 군데 고정하고 귀는 바짝 세웠으며 코는 연신 씰룩씰룩. 무엇에 그리 집중한 걸까. 내 눈엔 절대로 그 대상이 안 보인다. 근접해서 사냥(!)의 대상이 득달같이 도망가야만 상황이 파악된다. 이는 보통 보호색으로 위장한 작은 동물들인데 바위색 고양이, 낙엽색 참새, 응가색 쥐 등이다.

역한 악취를 반기는 가을이의 심리는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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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서 만난 친구 가을이가 살금살금 다가간 곳엔 늘 누군가 있다 ⓒ 박혜림


때론 어떤 것의 냄새를 조심스레 맡고는 진중한 표정으로 그것에 온몸을 비비기도 한다. 그것이 '넘의 똥'인 경우엔 어마어마한 냄새를 참아야하고, 가여운 쥐의 사체라면 세균에 감염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 는다. 인간에게 역한 악취를 반기는 가을이의 심리는 뭐지? 손님의 가랑이 사이에 유달리 흥미를 보이거나, 벗어놓은 양말을 신줏단지 모시듯 하는 개의 행태를 동물학자들은 여러 가지 가설로 설명한다.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는 것, 새로운 냄새를 자랑하려는 것 등. 야생녀 가을이의 취향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차차 조율해가야겠지.

이렇게 매력적인 가을이를 입양한 지 벌써 3개월, 심장사상충을 판정받고 치료한 지 한 달을 넘어서고 있다. 이젠 매일 먹는 약이 아닌, 한 달에 한 번 유충을 잡는 약을 먹으면 된다. 두 달은 더 기다려 재검사를 해서 완치 판정을 받아야 한다. 간혹 가을이가 '헥헥'거리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날씨가 더워진 탓도 있겠고, 기분이 좋아서 자연스레 흥분했을 수도 있다. 병원에 물어보니 헥헥 보다는 '켁켁'이 위험 수위라고 한다. 조심해야지. 가을이가 가을이답게 씩씩하게 이겨내 주길 오늘도 빈다.
#가을 #야생 #유기견 #입양 #심장사상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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