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의 전개와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제목이 '그녀가 죽었다'이다. 제목 자체가 영화의 방향을 이야기한다. '그녀가 죽었다'는 진술에 빠진 것은 관찰자이다. 내가 보기에 '내가 보기에'가 빠져 있다. 여기서 '나'는 극중에서 훔쳐보기에 탐닉하는 주인공인 공인중개사 구정태(변요한)이다. 구정태가 보기에 그녀가 죽었다.

구정태가 SNS 인플루언서 한소라(신혜선)의 죽음을 목격하고 살인자의 누명을 쓰는데, 누명을 벗기 위해 한소라의 주변을 탐문하며 진짜 살인범을 찾는 미스터리 추적 스릴러가 영화 <그녀가 죽었다>이다. '미스터리 추적 스릴러'는 영화사의 규정.

시점
 
  영화 '그녀가 죽었다' 스틸 이미지.

영화 '그녀가 죽었다' 스틸 이미지. ⓒ 엔진필름

 
두 개의 일인칭이 등장한다. 구정태는 광의의 관음증 환자에 속한다. 알몸이나 성행위를 훔쳐보며 성적 만족을 얻는 도착은 아니지만, 남의 사생활을 훔쳐보며 만족감을 얻는다는 측면에서 유사 도착증 환자다.
 
"나쁜 짓은 절대 안 해요. 그냥 보기만 하는 거예요."
 

구정태의 이런 생각은, 용인되는 범위 안에 머무는 한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카페에서 옆자리 사람의 얘기를 듣거나 버스 안에서 우연히 남의 카톡을 보게 되는 것과 같은 행위는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관찰하려는 적극적인 의지의 개입과 실제 행동을 통해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하고, 마침내 통상적인 수준의 엿듣기나 엿보기를 넘어서면 즉 영화의 구정태처럼 고객이 맡긴 열쇠로 그 집에 들어가 남의 삶을 훔쳐보면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 아닌 게 된다. 다만 성적 도착이 아니기에 사생활의 침해이자 범죄인 이 행위를 구정태처럼 취미로 착각하는 사람이 현실에서 없지는 않을 것이다. 전술한 대사처럼 죄의식을 못 느낀다.

이런 별난 '취미'는 영화 소재로 삼기 좋은 데다 공인중개사라는 직업 또한 적절한 개연성을 부여한다. 구정태는 일인칭 관찰자의 내레이션으로 극을 끌고 간다. 일인칭 관찰자 설정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진실이 부분적이고 파편적임을 전제한다는, 감독이 관객에게 전하는 안내문이다.

영화 전반부는 그녀, 즉 한소라의 죽음을 구정태가 부적절한 방식으로 목격한 뒤 자신이 살인범으로 몰리지 않기 위해 그녀 죽음의 진상을 파헤치는 내용이다. 요즘의 영리한 관객은 '그녀가 죽었다'는 제목을 힌트로 받아들여 이때 여러 가지를 상상할 수 있다. 감독이 관객의 예상을 피해 나갈 근본적인 방법은 없다. 예상 자체가 아니라 예상의 흐름을 비틀어 보는 쾌감을 주는 정도가 감독이 발휘할 수 있는 역량일 터이다.

제목처럼 그녀, 한소라가 죽었다면 정말 죽었는지, 만일 죽은 게 아니라면 제작진이 제시하려는 영화적 진실이 무엇인지를 관객이 찾으려들 것이다. 반대로 죽은 게 맞는다면 자명한 사실을 굳이 제목으로 끌어낸 의도가 무엇인지, 또한 어떤 이유로 어떻게 죽었는지를 극중에서 분석하려들 터이다. 영화는 익숙한 정공법을 택했다.
 
 영화 '그녀가 죽었다' 스틸 이미지.

영화 '그녀가 죽었다' 스틸 이미지. ⓒ 엔진필름

 
한소라의 죽음은 일찍 등장하고, 적절한 시점에 내레이션의 화자가 바뀐다. 죽은 그녀가 말하기 시작한다. 죽음 여부를 말하는지, 아니면 죽음의 원인을 해명하는지, 둘 다인지는 영화적 재미를 위해 남겨두지만, 구성 측면에서 두 개의 일인칭 시점과 마지막의 짧은 전지적 시점을 채택함으로써 사건의 입체화와 미스터리영화의 장점을 극대화한다.

이 영화는 '그녀가 죽었다'이지, '그녀를 죽였다'는 아니다. '그녀가 죽였다'의 가능성은 열려 있다. 끝부분의 짧은 전지적 시점은 사건이 끝난 이후의 작은 관객 서비스로, 소소한 반전을 포함한 흔한 후일담과 영화가 다루는 주제에 관한 윤리성을 추가하는 기능을 맡는다.

구정태와 한소라의 두 개 일인칭은 영화라는 특성상 또한 시간의 제약으로 어쩔 수 없이 요철의 형태를 취한다. 부분적 진실을 종합해 전체 사건의 실체를 보여주는 기법은 영화나 소설에서 많이 차용한다. 이 영화의 구성은 일문일답이 아니라 하나의 질의서를 끝까지 읽고 순차적으로 답변서를 읽는 식이다. 이러한 구성을 통해 관객은 지연된 더불어 통합된 미스터리의 해소에 따른 색다른 카타르시스를 체험한다. 미스터리가 심각하고 해명이 자명하다면 관객이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더 커진다.
 
해피엔딩, 혹은
 
 영화 '그녀가 죽었다' 스틸 이미지.

영화 '그녀가 죽었다' 스틸 이미지. ⓒ 엔진필름

 
편의점 소시지를 먹으며 비건 샐러드 사진을 포스팅하는 SNS 인플루언서 한소라의 특이한 행동에 구정태가 흥미를 느끼게 되면서 두 사람의 악연이 시작한다. 현실에서라면 만나지 말았어야 할 사이이지만 영화적 설정에선 꼭 필요한 만남이다. 문제적 인간의 우연한 조우와 필연적 충돌을 통해 크게 보아 재미와 교훈을 주는 게 영화예술의 얼개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해피엔딩이긴 하다. 구정태가 누명을 벗는다. 높아진 관객 수준에 맞춰 막판의 몰래카메라 같은 해법은 장식으로 사용하고 더 강력한 반전을 준비해 대미에 쏟아붓는다. 마지막에 굳이 전지적 시점이 필요한 이유는 영화가 다룬 사건의 성격 때문이다. 윌리엄 포크너가 그의 대표작이자 모더니즘의 걸작인 <소리와 분노>에서 세 개의 일인칭과 하나의 전지적 시점을 쓴 것은, 소설적 진실을 드러내는 데 꼭 필요한 형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에서 두 개의 일인칭 다음에 짧은 전지적 시점이 필요한 이유는 해피엔딩으로 끝낼 수 없어서이다. <그녀가 죽었다>는 선과 악이 대결해 어느 쪽이 승리하는 줄거리가 아니다. 큰 악과 작은 악의 대결을 그리기에 김세휘 감독으로서는 작은 악의 승리에서 자칫 잘못된 윤리적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고 걱정했을 수 있다. 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니 말이다.

기우가 아니었을까. 전지적 시점 없고 에필로그 없는 힘 있는 대단원이 영화의 완성도를 더 높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꼭 에필로그를 넣고 싶었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이어야 한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윤리적이지 않은 것이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완성도가 높고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반응과 평을 받을 수 있는 작품이다.

글 안치용 영화평론가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르몽드디플로마티크에도 게재되었습니다.
그녀가죽었다 신혜선 변요한 김세휘 안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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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영화, 미술, 춤 등 예술을 평론하고, 다음 세상을 사유한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ESG연구소장. (사)ESG코리아 철학대표,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영화평론가협회/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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