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길복순>
넷플릭스
영화는 클리셰의 연속이다. 그렇지만 참신하고 신선하다는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왜일까. 앞에서 거의 설명했으나 다시 파악해 보자. 황정민이 오다 신이치로라는 야쿠자로 나오는 첫 장면. 길복순과 오다 신이치로가 다정하게 담배를 나눠 피며 대화하는 소소한 지연을 거쳐 예상한 대로 결국 총을 쏜다. 클리셰를 클리셰 같지 않게 구성하는 힘이 필요하다. 지연된 클리셰는, 그냥 지연하기만 한다면 저렴한 데다 저질의 클리셰가 되지만 지연의 기술을 적당히 또 우아하게 구사한다면 관객이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우라까이의 용례를 떠올리면 되겠다.
상충하는 관계
주요 등장인물 간에 관계가 있는 건 당연하겠고, 여기선 대부분 상충이 목격된다. 길복순 모녀간, 길복순과 차민규(설경구), 길복순과 차민규의 동생인 차민희(이솜), 길복순과 한희성 등. 영화에서 가장 비중 있게 그려지는 건 길복순이 겪는, 직업과 엄마라는 역할 사이의 갈등이다. 그렇다고 정색하고 갈등과 상충이 그려지지 않는다. 마지막의 쿨한 결말을 앞두고 길복순이 길복순답지 않게 울고불고하는 장면 정도가 예외일까. 이 영화의 특성상 그런 전개를 바라는 건 무리일 뿐 아니라, 그렇게 전개됐으면 인기를 끌지 못했을 터이다.
굳이 퀴어와 근친상간이 양념으로 뿌려지면서, 그러면서 건들만한 건 거의 전방위적으로 다 건드는 가운데 길복순을 향한 차민규의 순애보와 딸 길재영(김시아)을 향한 길복순의 모성이 결승전에 맞붙는다. 늘 그렇듯 어머니는 강했고 사랑에 빠진 자는 허약했다. 아무튼 해피엔딩이다.
길복순 없는 세상을 지옥이라고 말하는 차민규는 길복순 손에 죽어서 어쨌든 그가 없는 세상에서 살지 않게 됐다. 차민규가 지옥을 모면하는 방법에는 길복순을 살리는 것 말고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 있다. 차민규의 약점이 자신이라고 말하는 길복순. 과거 차민규가 길복순 아버지를 죽이러 왔을 때 미성년인 길복순이 아버지 살인의 목격자로 차민규로부터 제거될 위험에 처하지만, 살해되는 대신 자신이 살인자가 되고 차민규를 목격자로 만드는 기민한 변화를 만들어낸 그 시점에 두 사람의 승패는 예정돼 있었다. 사랑에 빠진 먼치킨은 절대강자 자리를 고수할 수 없다. 목격자는 살인자에게 제거되기 마련이다. 차민규는 길복순에게 패배한다.
차민규의 노림과 반대로 길복순 길재영 모녀의 관계는, 길복순이 그렇게 숨기고자 한 자신의 정체가 길재영에게 아주 날 것으로 밝혀진 뒤에 오히려 최상으로 복원된다. 길복순이 걱정한 것은 딸이 킬러 직종에 종사하는 엄마를 미워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자신은 킬러라는 직업에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죽은 한희성 말대로 길복순에게는 돈을 많이 버는 엄마가 좋은 엄마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