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섬머소닉 도쿄 2023'에서 6만 명의 관객을 모은 걸그룹 뉴진스

올해 '섬머소닉 도쿄 2023'에서 6만 명의 관객을 모은 걸그룹 뉴진스 ⓒ 이현파

 
지난 19일부터 20일에 걸쳐 열린 페스티벌 '섬머소닉 도쿄 2023'에 다녀왔다. 섬머소닉은 2000년부터 진행된 세계적인 뮤직 페스티벌로서, 이틀간 일본 지바현 지바시 ZOZO 마린 스타디움과 마쿠하리 멧세, 그리고 오사카 마시마 소닉 파크에서 열린다. 올해로 23주년을 맞은 섬머소닉에는 브릿팝을 상징하는 록밴드 블러(Blur)와 래퍼 켄드릭 라마(Kednrick Lamar)가 헤드라이너(간판 출연자)로 나섰다.

페스티벌에서 음악 외의 콘텐츠가 중요하다는 시각이 있다. 반면 섬머소닉은 쾌적한 공연 관람이 핵심이라 강조하는 도심형 페스티벌이다. 대중교통을 통한 접근성이 좋고, 무대 간의 동선은 잘 정리되어 있으며, 행사장은 청결하다. 어떤 질문이든 친절하게 대답해주는 직원이 있다. 음식 부스와 맥주 부스가 분리된 국내 페스티벌과 달리 모든 음식 부스에서 생맥주를 팔고 있다. 해외 뮤직 페스티벌 입문자에게 늘 '섬머소닉'을 추천하는 이유다. 

그러나 쾌적하다는 소개가 무색하게 페스티벌 첫날, 100여 명이 더위에 쓰러졌다. 나도 그 중 하나가 될 뻔 했다. 체감온도가 40도를 넘나들던 낮 12시, 뉴진스가 실외 무대인 마린 스테이지에서 공연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6만 명이 뉴진스를 보기 위해 스타디움을 가득 채웠다.

무서운 폭염 속에서 뉴진스는 40분 동안 시대가 원하는 감각을 증명했다. 미국 '롤라팔루자' 페스티벌에서 선보인 것처럼, 밴드 라이브로 구성된 1부, 보다 '케이팝'스러운 퍼포먼스로 무장한 2부로 나누어 공연을 구성했다. 댄스 라이브는 안정적이었다. 뉴진스의 공연이 끝나마자자 급하게 그늘로 달려가 이온 음료로 생명력을 충전했다. 온몸이 빨갛게 익었지만, 고생한 보람은 있었다.

최근 수년 동안 섬머소닉에서 한국 뮤지션이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커지고 있다. 뉴진스 외에도 빅뱅 출신의 태양, 엔하이픈, 트레져 등 많은 케이팝 뮤지션들이 섬머소닉 무대에 올랐다.  일본 정부의 오염수 방류 등 험상궂은 뉴스와 별개로, 어느 때보다 민간의 문화 교류가 활성화된 시점임을 느꼈다. 
 
 올해 '섬머소닉 도쿄 2023'에서 관록의 공연을 펼친 밴드 블러(Blur)

올해 '섬머소닉 도쿄 2023'에서 관록의 공연을 펼친 밴드 블러(Blur) ⓒ 이현파

 
올해 섬머소닉은 1990년대의 전설들을 초대하는 데에 많은 힘을 쏟았다. 블러, 그리고 오아시스의 보컬 리암 갤러거 등 록스타들은 건재했고, 덕분에 나는 잠시나마 1990년대 영국의 어느 날을 경험할 수 있었다. 이틀에 걸쳐 블러의 'Parklife', 'Girls & Boys', 오아시스의 'Champagne Supernova', 'Wonderwall' 등 시대의 '찬가'가 울려퍼졌다.

특히 블러의 공연은 최근 경험한 밴드 공연 중에서도 손꼽을만한 수준이었다. 네 명의 멤버(데이먼 알반, 그레이엄 콕슨, 알렉스 제임스, 데이브 로운트리)는 관록의 연주와 열정적인 무대매너, 그리고 좋은 신곡으로 무장했다. 세월의 흐름에 퇴색된 채 과거로 연명하는 록스타와는 달랐다. 이틀 동안 영국 웸블리 스타디움을 매진시킨 저력을 이해할 수 있었다.

둘째날 헤드라이너로 나선 래퍼 켄드릭 라마는 첫 내한 공연의 아쉬움을 풀 수 있을만큼 대단한 연출로 무장했다. 가면을 쓴 다섯 명의 댄서가 켄드릭 라마와 함께 무대에 올라, 미국 흑인 사회와 개인의 번뇌를 그렸다. 윌로우(WILLOW)와 여성 밴드 노바 트윈스(Nova Twins)는 이 시대 록 음악의 미래가 젊은 여성에게 달려 있음을 웅변했다. 밴드 폴 아웃 보이(Fall Out Boy)가 연주하는 추억의 배경 음악도 반가웠다. 

탄탄한 자국 시장의 힘
 
 '섬머소닉 도쿄 2023'의 최종 라인업

'섬머소닉 도쿄 2023'의 최종 라인업 ⓒ Summersonic

 
우리나라의 음악 팬들은 섬머소닉이나 후지록 페스티벌의 화려한 해외 라인업을 부러워한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영미권의 저명한 뮤지션이 대거 방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컬의 힘'도 주목해야 한다. 일본의 자국 뮤지션들은 영미권 뮤지션보다 더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요아소비(YOASOBI)는 블러의 공연 시간과 겹쳤고, 베이비메탈(Babymetal)은 켄드릭 라마와 겹쳤다. 그러나 이들 역시 수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나는 인원 초과로 요아소비의 공연을 보지 못하고 문 앞에서 'IDOL'을 들어야만 했다. 탄탄한 로컬의 힘을 체감한 순간이다.

옛 일본 밴드의 향수를 자극하는 록밴드 노벨브라이트(Novelbright)는 시원한 라이브와 함께 밴드 공연의 정석을 보여주었다. 지난해 'W/X/Y'로 일본 스트리밍 1위를 차지한 타니 유키의 무대도 기대 이상이었다. 2006년생 싱어송라이터 'ao' 역시 미래를 기대하게 했다. 처음 보는 아티스트지만 서로 엄지손가락을 주고 받았다. 

어느 한쪽으로 과하게 관객이 쏠리지 않는다. 거물급 서양 뮤지션이 등장한다고 해서, 자국 뮤지션이 초라하게 여겨지지도 않는다. 가장 작은 무대 앞에도 일정한 수의 관객이 모일만큼, 다채로운 수요가 존재한다. 물론 모든 아티스트의 공연에 슬램과 떼창이 등장하는 우리나라의 락 페스티벌의 분위기를 따라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일본 로컬 시장의 규모와 역동성 역시 부러운 지점 중 하나다.
 
 올해 '섬머소닉 도쿄 2023'에서 펼쳐진 세카이 노 오와리(SEKAI NO OWARI)의 공연

올해 '섬머소닉 도쿄 2023'에서 펼쳐진 세카이 노 오와리(SEKAI NO OWARI)의 공연 ⓒ 이현파

 
매년 섬머소닉에서는 휴가를 나온 송골매 출신 DJ 배철수씨의 목격담이 전해진다. 누군가는 '그 나이에 페스티벌이라니 신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에선 페스티벌이 청년의 전유물이 아니다. 중년 어머니의 손을 잡고 온 딸, 그리고 요아소비를 보러 온 어린이가 있었다. 'KIDS CLUB'에서는 디제이가 아이들을 위한 공연을 준비했다. 지난해 철원에서 열린 DMZ 피스트레인에서 깃발을 흔드는 어린이가 떠올랐다. 페스티벌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바로 일련의 장면들에 있다. 페스티벌은 모두를 위한 곳이 되어야 한다.

올해 섬머소닉 최고의 순간을 하나 뽑으라면 세카이 노 오와리가 'RPG'를 연주할 때다. 세카이 노 오와리는 네 명의 소꿉친구로 이뤄진 일본의 인기 밴드다. 한동안 관심에서 멀어져 있던 이 밴드에게 받은 감동은 컸다. 더위를 식혀주는 산들 바람에 키보디스트 사오리의 연주가 얹혀질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뜻밖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 중 하나일 것이다. 

"하늘은 파랗게 맑아지고 바다를 향해서 걸어가.
무서운 것 따윈 없어 우리들은 더 이상 혼자가 아냐."
- 'RPG(세카이 노 오와리)' 중에서.
섬머소닉 뉴진스 리암 갤러거 블러 켄드릭 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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