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와 튀르키예를 뒤흔든 대지진 가운데서 무력한 정부의 책임론이 떠오른다. 사망자만 수만에 이른다는 지진 뒤 생존자 구호를 위한 골든타임이 흘러가는 가운데 정부의 조치가 적절치 못하다는 비난이 국제사회는 물론 자국 내에서도 들끓고 있는 것이다.
 
지난 6일 새벽 4시께(현지시각) 진도 7.8 규모 강진이 튀르키예와 시리아 국경지대에서 발생했다. 사고 며칠 뒤까지도 건물이 무너져 내릴 정도의 지진에 피해규모조차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상태다. 내전이 진행 중인 시리아는 정확한 피해규모조차 집계하지 못하고 있고, 튀르키예에서 확인된 사망자만 2만 명을 훌쩍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과 튀르키예 전문가들은 최대 피해가 10만 명을 넘을 수 있다고까지 경고한다.
 
이런 상황에서 튀르키예 독재자 에르도안은 그간 억눌러왔던 국민들의 반감을 직접 마주해 논란이 되고 있다. 사고 이틀 만에 피해현장을 찾은 자리에서 "이런 대형 재난에 대비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언급해 성난 민심에 불을 지른 것이다. 그로부터 이틀 만에 정부 대응이 신속하지 못했다며 부실대응을 인정했으나 민심은 여전히 좋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첫 발언 뒤 그간 지진대비 명목으로 걷어온 세금의 용처가 확인되지 않는단 사실이 보도됐고, 약 10만 명 규모로 추정되는 매몰자에 대한 초기 구조 역시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곳곳에서 확인된 탓이다. 그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지속적으로 억눌러 국제사회의 비난을 한 몸에 샀던 에르도안이 국가재난에는 무방비란 사실은 튀르키예의 사정을 아는 이들에게 충격적으로까지 여겨진다.
 
재난 뒤에도 구호는커녕 내전에만 집중하고 반군 점령지에 대한 국제사회의 구호조차 통제하는 시리아의 사례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영화 <샌 안드레아스> 포스터
영화 <샌 안드레아스> 포스터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재난영화 속 정부는 어떻게 그려졌는가
 
흔히 국가는 위기상황에서 개인의 힘으로 확보할 수 없는 안전을 대신하여 지켜줄 것이란 기대를 받는다. 국가론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계약설 등이 모두 이 같은 이론을 뒷받침하는데, 각국 헌법 역시도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임무를 가졌단 사실을 강조하여 국가의 책임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피해를 양산하는 대형 재난 가운데 정부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한 사건이 그리 많지만은 못하다. 세월호 침몰참사며 이태원 압사사고에서 볼 수 있듯, 한국 같은 선진국조차 역할을 충실히 하지 못해 국민적 반감과 맞닥뜨린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영화 역시 재난 속 무력한 정부의 모습을 가까이 받아들이는 추세다. 지난 시대, 이를테면 할리우드가 정점에 있던 1990년대 영화들에서 대통령의 모습이 영웅적으로 등장했다면, 근래 재난영화에선 정부가 무력하거나 심지어 등장조차 않는 모습을 흔하게 마주한다.
 
재난영화의 거장으로 할리우드 최고의 파괴왕이라 불리는 롤랜드 에머리히만 봐도 이 사실은 분명해진다. 그의 1996년 작 <인디펜던스 데이>에서 토마스 휘트모어 대통령(빌 풀먼 분)은 군이 와해되고 지구가 멸망 직전에 놓인 긴박한 상황에서 직접 전투기를 몰고 외계인들과 일대 결전을 벌인다. 역시 그의 영화인 <2012>에선 대통령(대니 글로버 분)이 아예 목숨을 잃기까지 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의식해서인지, 흑인으로 나오는 대통령은 위기 상황에서 끝까지 국민들을 돌보다 장렬히 최후를 맞는다.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 스틸컷
영화 <인디펜던스 데이> 스틸컷20세기 폭스
 
밥값 하던 90년대, 무력한 2000년대
 
1998년 작 <딥 임팩트>와 <아마겟돈>에서도 미국 정부 주도로 혜성충돌에 대비하는 계획이 세워진다. 화산폭발을 다룬 1997년 작 <볼케이노>에서도 정부의 역할이 주요하게 등장한다. 시장이며 경찰을 부정적으로 그리면서도 재난사태에 대응하는 비상대책반장(토미 리 존스 분)의 활약으로 위기를 일소하는 모습이 흥미진진하게 다뤄진다.
 
그러나 이 같은 설정들은 영화팬들에게 지나치게 영웅적이며 작위적이란 비판을 듣기 일쑤다. 심지어 실제 재난상황에서 정부의 무력함이며 뒤늦은 대처가 화제가 될 때마다 영화와 현실의 괴리가 더욱 강조될 뿐이었다.
 
그래서일까. 근래 나온 일련의 재난영화에서 정부는 무력하거나 아예 배제되기까지 한다. 위기상황에서 소신을 굽히고 끌려 다니는 <판도라>의 대통령 강석호(김명민 분)나 어떠한 합리적 경고도 외면하고 정치적 이해득실에만 골몰하는 <돈 룩 업> 속 대통령 제이니 올린(메릴 스트립 분) 등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영화 <판도라> 스틸컷
영화 <판도라> 스틸컷(주)NEW
 
사회를 향한 영화의 경고
 
천만 영화 <해운대>에서도 정부는 지질학자(박중훈 분)의 경고를 무시할 뿐이며 재난상황 내내 지역 소방대 말고는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전대미문의 대지진을 다룬 2015년 작 <샌 안드레아스>는 아예 정부가 사라진 재난상황을 저의 차별점으로 내세울 정도다.
 
재난영화는 단순한 오락을 넘어 인간을 향해 대중예술이 보내는 일종의 경고이기도 하다.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공권력의 책무를 일깨우고 실제 있을지 모를 위험을 지적하기도 한다.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동안 점차 영화가 권력을 위기에 무력하게 그린다는 건 사회가 대중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음을 내보이는 징후나 다름없다. 실제 세계 많은 나라가, 또 한국조차도 여러 재난으로부터 제가 했어야 마땅한 역할에 실패하고는 하지 않았던가.
 
권력을 다투는 데만 민감하여 오랫동안 자국민의 안위를 돌보지 않았던 두 나라의 정부가 마주한 작금의 위기는 비단 두 나라의 사정만은 아닐지 모른다. 위기에 대응하는 정부의 역할이 비단 위기 뒤에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책임 있는 지도자를 갖지 못한 나라가 어떻게 제게 닥친 위기를 더 키워가는가를 모두에게 낱낱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골든타임이 완전히 지나기 전, 더 많은 이들에게 구호의 손길이 닿기를 바랄 뿐이다.
 
 영화 <볼케이노> 스틸컷
영화 <볼케이노> 스틸컷20세기 폭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인디펜던스 데이 볼케이노 판도라 재난영화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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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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