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JIFF

개막작은 영화제의 얼굴이다. 영화제의 정체성이며 지향점과 통하는 건 기본, 그해 조직위원회의 선택을 받을 만큼 작품성까지 인정받아야 한다. 자연히 개막작은 영화제마다 뜨거운 관심을 받을 밖에 없다. 올해로 25회째를 맞는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 <새벽의 모든>도 그와 같은 관심에 싸여 있다.
 
감독은 1984년생 미야케 쇼다. 나이는 젊지만 눈 밝은 이들에겐 일찌감치 일본 영화의 차세대 기수로 낙점받은 지 오래다. 지난 십수 년 동안 고레에다 히로카즈에 이어 하마구치 류스케란 거장이 연달아 출연한 일본 영화계이니만큼 그 뒤를 잇는 또 다른 재능을 찾는 이들의 관심이 끊이지 않고 있다. 미야케 쇼가 대표적인 후보군으로, 내놓는 작품마다 유수의 영화제에서 러브콜을 보내는 중이다.
 
미야케 쇼는 한국에도 지난해 무주산골영화제에 초청받아 관객과 만난 일이 있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을 들고서였다. 그는 이 작품으로 일본을 넘어 전 세계에 제 존재감을 확실히 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에선 각종 영화상을 휩쓸며 고레에다 히로카즈, 하마구치 류스케의 뒤를 잇는 작가로서 위치를 공고히 했다. 신작인 <새벽의 모든>은 그가 그 뒤를 이어 연출한 신작으로,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직접 각본작업을 갈무리해 찍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새벽의 모든>은 평론가 자격으로 받은 배지를 통해 2회 차 상영에서 겨우 예매에 성공했을 만큼 관심이 뜨거웠던 작품이다. 결코 좁지 않은 영화관 객석이 가득 메워졌는데, 미야케 쇼에 대한 기대가 어떠한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새벽의 모든> 포스터
<새벽의 모든> 포스터JIFF
 
전주를 들끓게 한 일본 감독의 시선
 
그런데 웬걸, 영화는 시작부터 견뎌내기가 쉽지 않았다. 절로 감기는 눈꺼풀을 간신히 밀어 올리며 팔뚝을 꼬집기를 십여 차례나 해야 했다. 허리를 곧추세우고 목을 돌려보아도 잠시 뒤면, 다시 감겨오는 눈을 어찌하기 어려웠다. 가득 들어찬 사람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가 상영관 공기의 배합비를 깨 놓은 탓일까. 버티고 버틴 끝에 30분이 넘어서야 나는 온전히 집중해 영화를 바라볼 수 있었다.
 
나 혼자만은 아닌 듯했다. 바로 옆에 앉은 여자는 20여 분 만에 숨소리가 바뀌더니 영화가 끝나기 얼마 전까지 나직하게 코를 곯았다. 앞자리에 앉은 어느 사내도, 뒷자리에서도 비슷한 광경이 펼쳐졌다. 그렇다면 이건 나 혼자만의 취향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영화가 막을 내렸을 때쯤엔 많은 이들이 만족감을 표했다. 여느 때보다는 큰 박수갈채가 나왔고, 몇은 눈물까지 훌쩍였다. 자못 특별한 감상이 있었던 듯, 긴장해 질문을 준비하는 이도 여럿이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러닝타임 가운데 중요한 순간을 마주했던 것이다.

<새벽의 모든>은 이처럼 상반된 감상을 끌어낼 만한 영화다. 지루해 연신 하품을 터뜨리는 이도, 참지 못해 고개를 떨어뜨리는 이도, 깊은 곳 어딘가 울림을 느끼고는 자리를 뜨지 못하는 이도 있을 만한 영화다. 대체 무엇이 이 영화를 그런 작품으로 만들었을까.
 
 <새벽의 모든> 스틸컷
<새벽의 모든> 스틸컷JIFF
 
누군가에겐 지루함을, 누군가에겐 울림을
 
영화는 독특한 설정을 가졌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회사원으로 보이는 정장차림의 20대 여성이 벤치에 앉아 있다. 그녀는 이내 벤치에 쓰러지듯 눕는데 그 위로 빗방울이 세차게 떨어진다. 마침내 경찰까지 출동해 그녀를 돌보려 드는데, 그녀의 반응이 제법 신경질적이다. 아니, 이런 못돼 먹은 여자가 있는가! 그런 마음이 들 때쯤 그녀의 사정이 공개된다.
 
그녀, 후지사와(카미시라이시 모네 분)는 환자다. PMS라고도 불리는 '월경 전 증후군'을 앓고 있다. 애써 취업한 직장에서도 PMS 때문에 적응이 쉽지 않다. 월경이 다가올 때면 감정이 널을 뛰고, 약을 먹으면 잠이 쏟아진다. 결국 입사 석 달 만에 동료 직원에게 큰 잘못을 저지르고 만다. 곁에서 보면 성격파탄자의 막말이 따로 없을 정도다. 백번 고개를 조아려 기회를 얻지만 약물부작용으로 인해 회의실에서 잠들었다 걸려버린다. 진상도 이런 진상이 따로 없다.
 
상사는 후지사와를 불러 따로 지병이 있느냐고 묻지만 그녀는 감히 답하지 못한다. 쉽게 치료할 수 있는 병도 아닐뿐더러, 밝히면 불이익이 있을 게 빤해서다. 결국 연달아 사고를 친 그녀는 제 발로 회사를 관두게 된다.

영화는 후지사와에게 열린 다음 장을 응시한다. 그녀는 초등학생들이 쓰는 교구회사에 취업해 새 삶을 시작한다. 이 회사의 주력상품은 플라네타리움, 즉 별자리 투영기다. 별자리를 외부로 쏘아 비추는 기계를 만들어 학교에 납품하는 회사다. 요즈음엔 장식용으로도 흔히 팔리는 이 상품을 관리하는 게 그녀의 역할이다. 관리라고 해봐야 제작된 상품을 상자에 담고 설명서를 넣어 포장하는 것이 전부지만 말이다.  
 
 <새벽의 모든> 스틸컷
<새벽의 모든> 스틸컷JIFF

PMS와 공황장애... 서로를 지지하는 두 환자
 
직장을 옮겼다 해서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도시의 대기업에서 외딴곳에 있는 작은 업체로 이직했지만 나름의 스트레스가 있다. 스트레스가 심해질수록 PMS로 인한 문제도 돌출되게 마련, 마침내 문제가 드러난다. 그녀 딴엔 억울한 것이 이번만큼은 잘해보자고 노력한 결과였던 일이다. 간식으로 크림이 잔뜩 든 빵을 사 와서는 동료들에게 돌렸는데, 옆자리 직원 야마조에(마츠무라 호쿠토 분)만이 그것을 거절한 것이다. 매일 아무 맛도 첨가되지 않은 탄산수를 마시는 그 사내는 후지사와의 거듭된 권유에도 빵을 받아 들지 않는다.
 
월경이 다가온 어느 날이었나. 마침내 후지사와가 폭발한다. 피식, 탄산수 병을 따는 소리에 제발 탄산 좀 그만 먹으라며 발작에 가까운 성질을 부려댄 것이다. 된통 꼬장을 부리는 여자와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던 남자 사이에서 잠을 번쩍 깨우는 긴장이 빚어진다. 그로부터 영화는 진짜 속내를 꺼내놓는다.
 
영화는 후지사와와 야마조에가 서로를 이해하고 지지하며 연대하는 이야기다. 후지사와는 PMS를, 야마조에는 공황장애를 앓고 있다. 후지사와가 모두에게 그 사실을 알린 반면, 야마조에는 이를 감추고 있다. 그들은 서로가 가진 질병과 그 증상을 공유하고, 차츰 삶 가운데 같은 적을 맞아 싸우는 일종의 전우애를 쌓아나간다.
 
감독은 상영 뒤 관객들과 가진 자리에서 이 두 캐릭터가 제게 각별히 다가온 이유를 전했다. 하나는 두 캐릭터가 어떤 선입견도 없이 자문자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에, 또 하나는 물러나 포기하는 대신 무언가 행동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 끌렸다는 얘기다. 실제로 그러하여서 두 인물은 그와 같은 문제를 지녔다곤 믿어지지 않을 만큼 편견 없이 저의 문제에 맞선다. 나는 지난 경험을 통해 그것이 거의 환상에 가까울 만큼 이례적이란 것을 알고 있지만, 미야케 쇼가 그 같은 설정에 반한 이유를 알 것 같은 마음이 되었다. 대체 누가 그와 같은 이에게 반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새벽의 모든 현장 사진
새벽의 모든현장 사진김성호

우리도 자유롭지 못한 이야기
 
이는 그대로 영화의 단점이자 장점이 된다. 장애와 질환을 갖고, 그 때문에 수차례 좌절하면서도 어떠한 편견이나 소극성도 갖지 않은 캐릭터는 얼마나 설득력이 없는가. 그러나 그 설득력 없음을 관객 앞에 설득해내기만 한다면, 그대로 관객을 매료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그와 관련해 <새벽의 모든>이 얼마쯤의 성취와 얼마쯤의 실패를 하는 광경을 목도했다. 누구는 코를 골고 누구는 눈물을 흘렸다는 뜻이다.
 
한편 영화는 연기와 연기지도에 있어 기록할 만한 순간을 여럿 거친 듯 보인다. 감독은 공황장애를 연기해야 하는 배우 마츠무라 호쿠토에게 일반적이지 않은 연기지도를 했다고 털어놓았다. 통상 현장에서 연기지도는 감독이 배우를 독려해 밀어붙이는 방식으로 이뤄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만큼은 감독이 배우를 제어하는 방향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또 촬영현장에 의사가 배석한 상태에서 배우가 공황장애 및 발작 연기를 제한적으로 수행했다고 전한다.
 
배우가 배역에 몰입하고 심지어 저와 배역을 동일시하는 것이 일상화된 현대 영화예술의 연기방법론은 정신질환을 가진 캐릭터를 연기하는 경우에 과몰입으로 인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이를 예비해 공황장애 연기가 실제 미칠 수 있는 후폭풍을 사전에 차단했다는 이야기다. 적극 활용했다면 영화를 보다 극적으로 보이게 할 수 있었을 공황장애란 설정을 상대적으로 적게 그린 연유가 여기에 있다.
 
한편 PMS와 관련해, 감독은 한국 관객들에게 제가 가진 월경 관련 증상을 사회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남다은 평론가가 나서 저도 그렇고 한국에선 월경 관련 이야기를 편히 하는 분위기라 답했으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대신 곁에 앉은 여성통역가가 제 세대엔 그렇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남 평론가가 돌아보면 자신은 저항적인 마음으로 더욱 그런 이야기를 주변에 자유롭게 한 것 같다 부연하기도 했거니와, 여전히 월경과 관련한 증상을 자유롭게 내놓고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가 한국사회에 조성돼 있다 보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PMS에 대한 낮은 인지도부터가 그를 방증하지 않은가.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은 프로그램 진행에도 불구하고 미야케 쇼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영화가 담고 있는 문제의식이 한국 관객에게 그대로 공명한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영화 속 후지사와와 야마조에의 슬픔을 이 땅의 아무개들도 겪고 있을 것이 분명한데, 우리는 왜 이와 같은 담론을 갖지 못했는가. 한국이라 해서 공황장애와 PMS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갖지 못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말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새벽의모든 미야케쇼 전주국제영화제 JIFF 김성호의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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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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