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렷하지만 아쉬운 펠레 스코어 패배를 보며 이렇게 위안삼고 싶었다.

'태극 전사들은 히딩크 감독과 더 오래 있고 싶어서 그랬을거야.'

그래도 너무나 아쉽지 않은가? 예까지 왔는데. 이 자리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의 일곱점차 패배를 갚는 자리인가? 2002월드컵 3,4위전에 누가 그런 의미를 부여했나? '그 때는 이기지 못했으니까 지금은 이겨야 돼'라는 억지 생각만으로 축구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축구를 축구로만 봤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개입시키기 시작하면 가뜩이나 흔들리고 있는 축구판이 더 철저하게 이용당하게 될 것이다.

독일과의 준결승전, 붉은 악마가 준비해서 또 한 번 우리들을 감동시킨 그 인상적인 글귀,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다시 떠오르는 순간이다. 준결승, 3,4위전에서의 패배가 '꿈'을 깨뜨린 것은 결코 아니다. 태극 전사들과 코칭 스태프들은 이미 우리들의 꿈을 이루어 주지 않았나? 그저 감사드리고 또 고개 숙일 뿐이다. 유월을 접고 7월 달력을 펼쳐 놓기에 너무 아쉬울 정도로.

이제 '숙원(宿怨)'이라는 말이나 '6·25로 빚진 은혜의 나라' 터키라는 생각은 일단 접어두고 '축구'라는 것 그 자체에 대해 더 생각하게 했던 3,4위전을 조금 냉철하게 되짚어 보자.


상대의 초반 전술에 대한 대응 전략은 적절했나?

11초만에 허용한 첫골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을용의 멋진 왼발 감아차기가 터키의 오른쪽 포스트 상단을 때리고 그물을 흔든 다음이 문제였다.

싱겁다고 표현할 정도로 어이 없게 허용한 첫골에 비해 우리가 터뜨린 동점골이 너무 환상적이어서 였을까? 전반 10분이 흘러갈 무렵 정도면 터키가 우리 대표팀에 대해 어떤 전술을 주무기로 들고 나왔는가는 파악했어야 했다.

이번 대회에서 가장 큰 활약을 보인 선수 중 하나인 하산 사슈 선수가 피로 누적과 부상을 이유로 선발 출전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일한 만시즈 선수가 처음부터 나와 하칸 수쿠르 선수와 투톱을 이루었고 최진철, 김태영이 빠진 우리 수비들을 어떻게 공략하는가를 유심히 지켜봤어야 했다. 적어도 시작 후 10분 간은.

터키가 미드필드 플레이를 과감하게 생략한 상태에서 긴 패스로 한 번에 넘겨주는 공격을 전반 초반에 집중적으로 선보일 때, 적절한 대응 전략이 있어야 했다. 적어도 세 명의 수비수 중 한 명은 긴 패스가 넘어 올 때, 그 볼이 떨어지고 난 다음 위치를 예상하고 움직였어야 했다.

이민성, 유상철은 간격을 좁히며 겹치기 시작했고 거기에 홍명보까지 당황하고 있었다. 우리 수비수들은 위기 상황에서 슬라이딩 태클보다는 스탠딩 태클을 즐겨 사용하는 버릇이 있다. 페널티킥을 허용에 대한 두려움일까? 더욱이 일한 만시즈에게 허용했던 두 번째 골 상황에서 이민성의 태클 타이밍은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콜롬비아의 발데라마 같은 야전사령관이 없어서일까? 그처럼 든든한 미드필드 플레이를 하는 선수가 있으면 오죽 좋겠냐마는, 이미 현대 축구는 그 역할을 여럿이 분담하고 있다. 아직 발데라마의 명성은 남아 있지만 그가 호령하던 축구 흐름은 흘러갔다고 말할 수 있다.

한 두 명의 미드필더에게 의존하는 플레이는 상대방에게 쉽게 약점을 노출시킨다는 것을 이 경기에도 입증했다. 터키는 공격의 핵인 하산 사슈가 나오지 못했다. 그 선수가 있을 때의 터키 축구 색깔은 주로 빠르고 세련된 패싱 능력을 주무기로 하는 미드필드 플레이로 대변된다.

그러나 그 대신에 일한 만시즈가 나왔고 그들이 선택한 카드는 달랐다. 간혹 구사하기는 했지만 수비 진영으로부터, 때론 루스투 골키퍼로부터 직접 날아오는 긴 패스는 매우 효율적이었다. 대회 내내 호흡을 맞춰온 '최진철-홍명보-김태영'라인이 아닌 한국의 수비 라인은 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쓰리 백'이니 '포 백'이니 하는 용어가 일상적인 말이 될 정도로 현대 축구의 수비 대형은 대개 일자(一字) 모양을 하고 있다. '스위퍼'의 시대는 한물 갔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터키의 이런 롱패스 중심의 공격 패턴은 스위퍼로서의 역할을 어느 정도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긴 패스의 낙하 지점 이외의 위험 지역에서 움직이는 또 한 명을 처리하기 위한 적절한 대응 방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역시 문제는 마무리다, 킬러다

다른 어떤 경기보다 설기현 선수의 움직임이 좋았다고 본다. 중앙을 파고드는 안정환이나 이천수에게 매우 성실하고 예리하게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왼발, 오른발 감아올리기 능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기에 가운데에 위치한 킬러들의 움직임이 더 필요했다.

이천수가 세 개, 안정환이 한 개

두 명의 공격수들이 기록한 '골문 안으로 향한 유효 슈팅 숫자'다. 이 숫자가 이들이 진정한 킬러로 인정받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의 숫자가 아닐까? 올리버 칸과 함께 '한 손 방어'가 특기인 '루스투' 골키퍼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보내기 이전에 이들 킬러의 움직임을 다듬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꿈★'은 이루었지만 이들 앞날이 창창한 선수들의 꿈은 아직 더 먼 곳에 더 큰 모양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안정환 선수는 유럽 선수들보다 비교적 작은 키를 갖고도 머리로만 두 골을 넣은 한국 대표팀 최다골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보다 발끝에서 터지는 그의 슈팅 능력은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다고 감히 이야기하고 싶다.

가깝게는 10미터 내외에서 멀게는 30미터 내외에 이르기까지 사정권에 들어오면 뛰어난 발동작으로 수비수를 제치고 벼락같은 슈팅을 터뜨린다. 안정환이 빛나기 위해서는 설기현 같은 훌륭한 측면 공격수들도 필요하지만 하칸 수쿠르 같은 포스트 플레이어도 필요한 것이다. 킬러가 마음대로 그라운드를 누빌 수 있도록 동료의 역할은 절대적인 것이다.

독일과의 준결승전에 이어 이천수의 플레이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렇다고 싸잡아서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자신감이 넘치는 그의 움직임이, 잔뜩 힘만 들어간 슈팅 자세가, 경기 결과를 놓고 볼 때 아쉽기만한 사실이지만 그가 설 자리는 2002년 무대가 아닐 것이라고 격려해 주자. 그만큼 배워야 할 부분이 많다는 얘기다.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플레이하는 법부터 배웠으면 한다. 그것이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는 가장 적극적인 처방이라고 생각한다. 때론 뒤로 처져서 미드필더 역할을 하며 창의적인 플레이를 펼치는 모습을 프로리그에서 보고 싶다.

이제 그들은 경호원들과 경찰들로 둘러싸인 곳에서 나와서 우리에게 한 발짝쯤 더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몇 십 만원 하는 입장료도 필요없이 몇 천 원부터 몇 만 원 정도면 그들을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또다른 행복감에 젖어보자. 'Be the Reds!'가 적힌 붉은 색 옷을 벗어두고 그들이 더 많이 입고 뛸 프로팀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을 찾자. 그 곳에서 외치자. 이 좋은 시설을 그냥 썩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많은 프로팀을 만들어 달라고. 이탈리아나 스페인이 보였던 억지와 시기심이 그 초라한 'K-리그'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2002-06-30 00:25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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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대인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축구 이야기,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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