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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팀의 마지막 경기가 끝나자 세종로네거리에서 축포가 터지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전쟁 같은 노동, 전쟁 같은 입시, 전쟁 같은 취업, 전쟁 같은 삶…. 어쩌면 한국의 근현대사는 식민치하와 내전의 상흔 이후에도 줄곧 '전쟁'의 양식으로 이어져온 것인지도 모른다.

살기 위해 싸워야 했고, 살기 위해 누군가는 죽거나 희생당해야 했다. 그리하여 변형되고 고착된 한국인의 '민족성'으로 '폐쇄성'이 부각되고, 그것은 혈연과 지연, 학연 등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연'을 강조하는 기이한 사회적 관계를 형성했다.

전쟁 시에 가장 생존 확률을 높이는 삶의 형태는 혈연을 중심으로 한 가족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근근히 끼니를 잇고, 피난을 가고, 폐허 위에 비를 가릴 오두막이라도 세우는 데 있어 가족이 아닌 타인의 안위를 걱정하고 보살필 틈이 어디 있는가.

때로 비굴한 타협으로, 모욕의 감수로, 남의 발등을 찍어서라도 디딜 틈을 만들어야 했던 데는 이 전쟁 같은 '삶'이나마 지속해야만 한다는 당위가 지배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입은 자존심의 손상과 치명적인 내상은 오직 피를 나눈 가족들만이 위로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날로 뻔뻔스러워졌다. 몰렴해지고 무례해졌다. 타인에 대해 적대적이 되고, 가족끼리는 공범처럼 은밀해졌다.

다소 신비주의적인 발언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한국인들만큼 강한 영성(靈性)을 가진 민족은 없다고 생각한다. 삶과 죽음의 치열한 전투 속에서 성장한 그들은 누구보다 자의식으로 충만하다. 아집과 독선, 편견과 오해도 가히 수준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남의 눈치를 보고, 견주어 경쟁을 하고, 타인의 기준으로 자신을 재단한다. 이처럼 기이한 불균형, 고통스런 뒤틀림의 상태에서 또 다시 살아남기 위하여, 한국인들은 가슴 속에 차곡차곡 분노를 쌓는다.

이제 표면적으로 전쟁은 끝났지만-종전이 아니라 휴전이라는 분단 상태를 잠시 접어두더라도- 여전히 내밀한 마음 밑바닥에서는 총탄이 터지고 포화가 자욱하다. 때때로 나는,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나 자신이 대견하다 못해 놀라울 때가 있다.

▲한국-터키전을 앞두고 응원에 열중하고 있는 광화문 붉은악마들 ⓒ 오마이뉴스 김시연

그러하기에 우리에겐 축제가 필요했다. 엄격한 위계질서와 공식화된 불평등, 그에 대한 공포와 굴종에서 벗어나 한없이 단순하고 비속한 상태로 모든 사람들과 친밀하게 접촉하며 자유분방하고 광장적인 삶의 순간을 누리는, 그러한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카니발의 개최!

갇혀 있던 골방에서 뛰쳐나와 통렬한 쾌감을 함께 나누어 누릴 해방구가 절실했다. 2002 한일월드컵은 그런 의미에서 통계상의 수치로 계산될 모든 이익과 손실을 떠난 중요하고 소중한 행사였다.

누군가는 축구는 단지 축구일 뿐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누군가는 축구와 정치의 커넥션, 축구가 부추기는 쇼비니즘을 지적했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니다. 축구는 때로 마피아와 독재자들을 열광시키고 전쟁의 원인이 되고 폭동의 촉발제가 되기도 하지만, 그저 공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상대방의 그물을 흔들어 보겠다고 구십 분 동안 죽어라 뛰어다니는 아주 단순한 스포츠이기도 하다.

가끔은 통합의 도구로 갈등을 은폐하는 수단이라는 혐의도 받지만, 그것으로 축구 자체에 대한 가치 판단을 대신한다는 건 아무런 이권이나 음모와도 관계없는 순수한 축구팬의 입장에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싫어봤자 '타인의 취향'일 뿐이다. '즐거움'이나 '도락'만큼은 억지로 강제함이 완전히 불가능하다.

대저 즐기자는 것뿐이다. 잠깐쯤은 살짝 미쳐 승리에 도취하고 어린애처럼 패배에 목 놓아 울어도 좋다. 축제는, 카니발은 가장 격렬하고 혼돈스런 방식으로 가장 명쾌하고 단순한 감정의 정화를 가져온다.

걱정하지 마라. 순정한 집단성에 들떠 자발적으로, 오로지 자발적으로 모여 목이 쉬도록 외치고 노래 불렀던 군중은 축제가 끝나면 모두 제자리로 복귀한다. 그때 또 다시 정치든 경제든 문화든 그 어떤 고상하고 예의바른 가치든 들이대 옥죄어 보라. 그들은 조이는 대로 조이고, 누르는 대로 눌린다.

▲ 소설가 김별아
하지만 시치미를 뚝 떼듯 일상은 변함없어도, 보라, 사금파리처럼 반짝 빛나는 날카로운 추억이 그들의 마음 언저리에 떠나지 않고 머물 것이다. 광장의 통렬한 해방감을 경험한 자, 그 누구도 어제 같을 수 없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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