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볕도, 비도, 태풍도 우리를 멈추게 할 수 없다

[국토대장정 ⑪] 9월 4일, 폭우를 뚫고 37km를 걷다

등록 2012.09.05 10:00수정 2012.09.07 08:10
0
원고료로 응원
a

국토대장정 11일차. 허태정 유성구청장과 채인석 화성시장 ⓒ 정원규


국토대장정 11일차가 밝았다. 오랜만에 푹 잤다. 어제, 평소보다 일찍 작업이 끝나 오후 10시가 조금 넘어 잠자리에 들었고, 새벽 4시 10분에 일어났다. 대략 6시간 정도는 눈을 붙인 셈이다. 이 정도만 잘 수 있다면 견딜만하다. 국토대장정을 시작한 뒤 이렇게 오래 잔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가장 많이 잤다는 날이 기껏해야 3시간 정도? 날마다 어제만큼 잘 수 있다면 괜찮은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어젯밤, 채인석 화성시장은 여산면 금곡 마을회관 앞의 정자에 텐트를 치고 잤다. 채 시장이 텐트에서 자는 건 이번이 두 번째. 지난 8월 25일, 국토대장정 2일차에 계곡면사무소 마당에 텐트를 치고 잤다. 채 시장은 텐트에서 홀로 자는 게 주변 이목을 신경 쓰지 않고 푹 잘 수 있어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텐트에서 자는 것도 여건이 맞아야 한다. 폭우가 내리거나, 텐트를 칠 공간이 없어서 지금까지 딱 두 번 텐트를 쳤다.

채 시장은 이번 국토대장정을 하기 위해 거금을 들여 텐트를 장만했다고 한다. 만일 자연사박물관 유치가 실패로 돌아갈 경우, 채 시장은 이 텐트를 정부종합청사 앞에 치겠단다. 들인 값은 뽑아야하지 않겠느냐면서. 본전을 뽑으려면 아주 오랫동안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노숙을 하셔야겠군요, 시장님. 

오늘(9월 4일)은 논산 연무대 국군훈련소 앞에서 출발, 대전시 흑석동 부근까지 37km를 걸을 예정이다. 오전에 23km, 오후에 14km. 오늘 이 거리를 다 걸으면 태풍 볼라벤 때문에 빠진 하루 일정의 대부분을 채울 수 있게 된다. 내일까지 걸으면 완전하게 벌충할 수 있고. 

김근범 화성시청 총무담당은 "내일까지 태풍 때문에 빠진 일정을 다 채울 수 있을 것 같다"며 "9월 6일부터는 원래 계획한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라면서 밝게 웃었다. 채 시장의 국토대장정은 예정대로 9월 13일에 21일차가 아닌 20일차로 마무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만큼 채 시장이 무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단한 체력과 정신력이다. 곁에서 보고 있으면 감탄이 저절로 나온다.

누구든 국토대장정 참여하고 싶은 이는 언제든 와서 함께 걸으면 된다

a

박승권 회장, 한진안씨, 고정석 회장 ⓒ 유혜준


오전 5시 30분, 채 시장 일행은 연무대 훈련소 앞을 출발했다. 오늘, 아침준비체조에 참여한 사람은 12명. 채 시장과 같이 걷는 고정 참가자는 현재 3명이다. 박승권 회장, 한진안씨, 고정석 회장. 채 시장을 포함한 4명 외에는 늘 얼굴이 바뀌고 있다. 하루나 이틀을 함께 걷고 돌아가는 이도 있고, 한 나절이나 반나절을 걷고 돌아가는 이도 있다.


사나흘 정도 같이 걷고 화성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합류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누구든 국토대장정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언제든지 와서 함께 걸으면 된다. 걷다가 힘들면 그만 걸어도 탓하거나 나무라는 이는 없다. 자발적으로 즐겁게 걷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발적인 참여라고 해도 막상 걸으면 즐겁지만은 않다. 채 시장의 걸음이 워낙 빨라 따라잡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늘, 채 시장은 시속 5km로 걷기 시작했다.

"속도 아주 좋습니다. 이 속도대로 가시면 됩니다."

이번 국토대장정 길 안내를 맡은 이종복 대장의 힘찬 목소리가 어둠을 뚫고 들려왔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내 뒤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좋긴 뭐가 좋아, 너무 빠르구만."

누군지 모르겠지만 오늘 처음 채 시장의 대장정 길에 동행한 사람이 분명하다. 고정 참가자들은 더 이상 불평하지 않고 채 시장의 속도에 맞춰 걷는다. 아니면 아예 뒤로 처지거나. 그렇지만 처음 걷는 이들은 힘들다는 불평을 쏟아내곤 한다. 예상보다 속도가 빨라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그 사람은 채 시장을 따라잡지 못하고 뒤로 처졌고, 나중에 보니 아예 사라져 버렸다. 중간에 포기한 모양이다.

a

아침식사. 자원봉사 중인 윤통일 회장의 음식솜씨가 날로 좋아지고 있다. ⓒ 유혜준


나 역시 오늘은 다리가 아파서 얼마 걷지 못하고 뒤로 빠졌다. 며칠 전 넘어져서 다친 후유증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 아마도 시속 4km로 '놀멘 놀멘' 걸으면 그럭저럭 걸었을 것이나, 오늘 소화해야 하는 거리가 34km인지라 무리하면 안 될 것 같아 중도에 포기했다. 오늘만 날은 아니니까.

그러길 잘했지, 그렇지 않았다면 연산면 삼거리 휴게소 앞에서 황산벌전적지까지 가는 고갯길을 걷다가 주저앉았을 지도 모르겠다. 그 길, 길이는 1.7km로 그리 긴 거리는 아니나, 상당히 가파른 고갯길이었던 것. 이번 국토대장정 코스 가운데 가장 걷기 힘든 길이 아니었나 싶다.

고갯길을 다 올라와 황산벌 격전지에 도착한 채 시장 일행은 얼굴이 벌겋게 변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건 채 시장도 마찬가지였다. 붉게 변한 얼굴에서는 끊임없이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려도 우리는 간다. 땡볕도, 바람도, 비도, 하다못해 태풍까지도

오전 대장정을 마친 시간은 10시 10분. 이들이 오전에 걸은 거리는 23km. 속도가 줄었다고는 하나 여전히 빠른 편이다. 채 시장은 오전 대장정을 마친 뒤, 허태정 유성구청장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대전시로 향했다.

비가 쏟아진다. 오전 9시 반 경에도 소나기가 한 차례 쏟아졌는데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빗발이 굵어지나 싶었더니 비는 엄청난 폭우로 변해 도심을 적시고 있었다.

a

비를 잠시 피하는 중 ⓒ 정원규


채 시장은 허태정 유성구청장을 만난 뒤, 대전역으로 급히 달려갔다. 대전역 앞에서 화성시 양감면과 향남읍 주민들이 자연사박물관 유치 관련 서명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은 지역현안 해결을 위한 국토대장정을 하고 지역주민들은 그에 맞춰 시장이 지나는 인근 자치단체에 내려와 시장과 보조를 맞춰 지지서명을 받고 있다.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낯선 지역에서 만난 시장과 시민들은 마주서서 지역현안을 함께 해결하자는 다짐을 한다.

오후 3시, 채 시장은 다시 논산 황산벌 전적지로 돌아왔다. 한 눈에 논산의 너른 벌판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좋은 자리였다. 백제의 슬픈 멸망의 역사가 아로새겨진 곳. 계백장군이 최후의 일전을 벌인 곳. 하지만 그런 역사를 돌이킬 틈이 별로 없었다. 굵은 빗줄기가 황산벌 전적지를 적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 비를 뚫고 걸어야 한다.

비옷을 챙겨 입은 채 시장과 일행. 오후에는 14km를 걸을 예정이었다. 국토대장정 10일차까지는 오전 11시 즈음에 하루 일정을 다 소화했지만, 오늘부터는 오전과 오후로 나누어서 걷는다는 계획을 세웠던 것. 서울로 가까워질수록 출발시간을 늦추면서 페이스 조절을 하는 것이다.

14km는 3시간 이내에 너끈히 걸어낼 수 있을 만큼 채 시장 일행은 대장정에 익숙해진 상태. 비가 내려도 우리는 간다. 땡볕도, 바람도, 비도, 하다못해 태풍까지도 우리의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다. 이런 다짐을 소리 높여 외친 뒤, 그들은 출발했다.

a

황산벌 전적지로 가는 길 ⓒ 정원규


언제 이렇게 시원하게 비를 맞으면서 걸어볼 기회가 있을까

가파른 오르막길인 황룡재를 오를 때는 숨이 턱에 닫아 헉헉거렸지만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은 수월한 편이었다.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고스란히 맞으면서 걷는 발걸음은 비에 젖어 묵직했다. 한 시간쯤 걸으니 양말까지 푹 젖어 버렸다. 인근 마을 정자에서 잠시 폭우를 피하는 사이, 채 시장은 신발과 양말을 벗어 짠다. 물이 주르르 흐른다. 젖은 양말을 다시 신으려니 발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

정자에서 쉬는 사이에 비옷을 벗어던진 채 시장 일행은 아예 비를 맞으면서 걷기로 했다. 비옷을 입고 걸으면 비는 비옷을 타고 흘러내리지만 몸은 땀으로 푹 젖어 버린다. 비옷을 입으나 안 입으나 젖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느니 차라리 비를 맞으면서 시원하게 걷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국토대장정을 할 때가 아니면 언제 이렇게 시원하게 비를 맞으면서 걸어볼 기회가 있을까? 그런 심정이 되었나 보다. 다들 서슴없이 빗속으로 뛰어들어 걷는 것을 보니.

비는 그칠 듯이 빗발이 가늘어지다가 다시 굵어지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논 뒤로 멀리 보이는 산에 안개가 자욱하게 감돌고 있다. 비가 빚어내는 운치 있는 풍경이리라.

비를 맞으면서 걷는 채 시장 일행을 그 풍경과 잘 어우러지게 사진과 영상으로 담아내려고 정원규(화성시청 공보팀)씨와 박성진씨(화성시청 공보팀)가 비를 흠뻑 맞으면서 길 위에서 바쁘게 움직인다. 폭우 속을 뛰어나갔던 박성진씨는 파인더가 안 보여서 도저히 못 찍겠다면서 지원차량으로 돌아온다. 그가 입은 판초 우의에서 빗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정원규씨는 비에 흠뻑 젖은 카메라를 들고 돌아와 수건으로 연신 닦아내면서 고장이 날까봐 걱정스러운 표정이 된다. 잠시 뒤 다시 카메라를 들고 길 위로 나서는 걸 보니 괜찮은 모양이다.

a

ⓒ 유혜준


오후 5시 40분, 오늘 숙박지인 대전시 흑석2동 마을회관에 도착했다. 37km를 무사히 잘 걸어낸 것이다. 채 시장은 오후 3시, 황산벌 전적지를 출발할 때만 해도 "새벽에 출발할 때와 확실히 컨디션이 다르다. 몸이 무거운 것 같다"며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흑석동 마을회관 앞에서 그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으로 구김살 없이 활짝 웃었다.

"내일까지 걸으면 태풍 때문에 못 걸었던 구간을 완전하게 소화하게 돼서 부담을 덜게 되었다. 편안한 마음으로 걸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너무 좋다. 아무래도 비가 내려서 힘을 덜 들이고 걸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컨디션은 나쁘지 않다."

채 시장은 11일차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박승권 회장은 "대장정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날짜가 너무 안 가는 것 같더니 10일차가 넘어서니 너무 빨리 간다"며 "날짜가 가는 게 아쉬울 지경이다"고 말했다.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나 역시도 처음에는 하루가 너무 길어서 날짜가 안 가는 것 같더니 이제는 길고도 긴 하루가 휙휙 지나가는 것 같다. 한가로운 농촌마을의 마을회관 앞에서 목가적인 전원 풍경을 바라보면서 하루를 마감할 수 있으니, 더할나위 없이 좋다.

"풍경이 참 마음에 드는 동네네요."

이런 기분은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나 보다. 주변 풍경을 돌아보던 채 시장이 나를 향해 말했다. 오늘은 편안한 밤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비는 왜 안 그치는 거야?

[오늘 걸은 길] 논산 연무대 국군훈련소 - 가야곡면사무소 - 병암리 - 황산벌전적지 - 황룔재 - 흑석2동 마을회관. 총 거리 37km.
#채인석 #국토대장정 #임정엽 #황산벌 #화성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3. 3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4. 4 하이브-민희진 사태, 결국 '이게' 문제였다
  5. 5 용산에 끌려가고 이승만에게 박해받은 이순신 종손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