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생활 6년, 회사를 관둔 뒤 본격적으로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엔 자신감도 있었다. 회사를 관두자마자 출판계약이 이뤄졌고, 몇 곳에서 강연이며 기고 제안도 들어왔으니까. 글 솜씨에도 자신이 있었던지라 취업이 아닌 프리랜서 작가로서 쓰고 싶은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프리랜서의 삶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책은 기대만큼 팔리지 않았고, 글 값을 잘 쳐주던 잡지들도 문을 닫기 일쑤였다. 무명 작가며 평론가에게 강연 자리는 얼마 돌아오지 않았고 영화제 GV와 같은 기회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어떻게든 삶은 꾸려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때 시작한 게 일거리를 소개해주는 어플이었다.
 
논술과 국어과외, 글쓰기 지도를 비롯해 각종 자기소개서를 고쳐주겠다 소개글을 올렸다. 그리고 지금껏 수십 건의 지도를 했다. 첫 몇 달은 꽤 열심히 했다. 영재고 같은 곳은 입학할 때 논술을 보는 탓으로 중학생들부터 논술에 대한 수요가 있었다. 또 대학과 직장을 구할 때도 논술시험이 있는 곳이 많으니 지도를 바라는 학생이야 끊이지 않았다. 자기소개서는 시장이 더 큰 듯했고, 한국어 능력을 키우려는 외국인들도 끊이지 않고 요청이 들어왔다.
 
정직한 사람들 포스터
정직한 사람들포스터와이드릴리즈
 
기회는 불평등, 과정은 불공정, 결과는 부정의
 
그러나 현실은 생각만큼 평안하지 않았다. 뿌듯한 기억으로 남는 수업이 많았으나 때때로 마주하는 좋지 않은 사례가 업에 대한 인상 전체를 바꿔놓을 때가 많았다. 이를테면 이런 것.
 
입시를 위한 논술수업 뒤 만난 학부모가 학생이 쓴 독후감을 봐달라 청하는 것이다. 말이 봐달란 것이지 듣다보니 사실상 대신 써 달란 요구인데, 그것이 어느 독후감 대회의 지정도서란 사실을 알게 되니 도저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한 입상경력이 곧 학생의 경쟁력이 되고 다른 학생의 기회를 앗아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끝내 거절하자 그녀는 이제까지 다른 논술선생은 다 써주던데 너무 자존심을 부린다는 말을 뒤통수에 붙였다.
 
비슷한 사례는 끝도 없다. 백일장이며 독후감 같이 대회에 내는 글부터, 학교에 내는 과제물, 또 자기소개서 따위를 써달라고 요구하는 사례가 많았다. 어떤 이는 아예 대놓고 과제며 자기소개서 대필 따위를 원한다고 구인글을 올리기도 하였는데, 나는 대체 어떻게 이런 반칙이 공공연히 횡행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런 이들을 만나다보면 이 세상에 공정이란 가치가 아직 남아있는 것인가를 의심하게 된다. 내가 거절한대도 이들은 누군가를 구해 뜻을 이룰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직한 누군가는 손해를 볼 밖에 없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던 어느 대통령의 말은 저잣거리에서조차 우습게 짓밟히고 있다.
 
정직한 사람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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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자소서 대필하는 마트 알바생
 
김문경의 <정직한 사람들>은 이와 같은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다. 영화엔 형편없는 스펙 탓에 9급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며 마트 알바로 생계를 잇고 있는 보윤(최보윤 분)이 등장한다. 정규직인 마트 팀장의 눈치를 보며 하루하루를 버틸 뿐인 알바 신세지만, 나름대로 자부심이라고 부를 게 없지는 않다.

다름 아닌 자소서 대필가. 그녀의 손을 거쳐 내로라하는 기업에 취업한 이들이 벌써 여럿이다. 어쩌면 이걸 사업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험난한 일상 가운데서도 행복한 상상을 해보는 그녀다.
 
영화는 그녀에게 대필을 의뢰한 이들의 삶으로 돌입한다. 강민(류이재 분)은 가난한 고학생이다. 방값도 몇 달이나 밀렸고 당장 살아갈 길이 막막하다. 수많은 알바를 거쳐 단련한 생존력은, 그러나 세상에선 전혀 알아봐주지 않는 것이다. 열악한 여건은 그녀와 다른 경쟁자 사이의 격차만 더욱 벌릴 뿐이다. 돈은 없고 돈 벌 길은 막막한 강민의 삶이 영화 가운데 흥미롭게 펼쳐진다.
 
대학생 하면 흔히 떠오르는 낭만적이고 풋풋한 무엇 따윈 찾아보기 어렵다. 당장 품위를 유지할 돈이 없는 그녀가 어떻게 낭만을 꿈꿀 수 있단 말인가. 어찌어찌하여 꽤나 품평이 좋은 선배의 연구실 보조 자리를 얻지만 그마저도 마음처럼 풀려나가지 않는다.
 
정직한 사람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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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 물어뜯기는 그들이 사는 세상
 
두 번째는 세민(기세민 분)이다. 학회장 선거에 출마해 당선이 유력하단 평을 듣고 있는 세민은 겉으로 보기엔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실상을 뜯어보면 엉망진창, 돈도 없고 인성도 형편없는 그다. 강민과 만나 나누는 대화에서 그는 학생회장이 되면 돈을 잔뜩 땡겨서 차부터 뽑을 계획이라고 털어놓는다. 어차피 학생회장이란 게 그렇고 그런 것 아니냐며.
 
태호(안도연 분)는 어떠한가. 착해빠진 그는 착하고 정직해서 손해만 보는 삶을 살아왔다. 영화는 그가 중고거래 사기를 당하는 모습을 그린다. 강민이 당장 버틸 돈을 얻기 위해 친구 세민에게 담보로 잡힌 시계를 세민으로부터 사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시계는 강민의 옛 애인이 아르바이트하던 곳에서 훔쳐온 짝퉁 시계이고, 품질도 형편이 없다. 애인에게 주려 이 시계를 산 태호는 시계를 고치러 간 매장에서 이게 짝퉁이란 사실을 알고 당혹한다.
 
영화는 보윤을 비롯해 강민과 세민, 태호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영화로 담아낸다. 각자의 이야기가 독특하게 연결되고 차츰 의미를 띄워내는 모습을 각자의 드라마를 통해 풀어내려 한다.
 
보윤은 의뢰인 각자가 지닌 재료를 바탕으로 그럴듯한 자기소개서를 완성하지만, 스스로는 부풀릴 무엇도 갖지 못했다고 좌절한다. 강민은 진심을 다하려 했던 상대에게 배신당했음을 알고 분노한다. 세민은 사기를 치려다 되레 뒤통수를 맞고 원하던 것을 죄다 잃어버린다. 태호 또한 마찬가지, 제가 당한 방식으로 남을 괴롭게 하려 드는 것이다.
 
정직한 사람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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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합리한 현실 들추는 이 영화의 지향
 
누가 나쁜 인간인가를 가리는 것은 이 영화의 관심이 아니다. 그저 모두가 모두를 괴롭게 하는 세상, 진실은 설 자리가 없이 온통 거짓이 판치는 시대를 수면 위로 드러낼 뿐이다. 그 끝에서 영화가 선택하는 결말은 이 시대 보통의 사람들의 것과 얼마 다르지 않은 것이다. 말하자면 내게 독후감이며 자소서 대필을 청하고, 그것이 마치 자연스런 일이라는 듯 굴던 평범한 사람들처럼 말이다.
 
나는 내가 거절한 일을 다른 누구가 하였는지 알지 못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남이 쓴 글로 상을 받고, 그를 근거로 입학을 하고, 또 남의 손을 빌려 숙제를 하고, 성적을 받는가 따위를 알아낼 수가 없다.
 
분명한 건 이 사회에 수없이 많은 부정직한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이뤄져 왔다는 것이다. 수년 전 로스쿨 입학실태 전수조사 결과 드러난 여러 부적절한 사례들과 이것이 어떠한 처벌도 없이 유야무야 넘어갔던 장면은 그 대표격이라 해도 좋겠다. 반복돼 보도되는 특권층 자녀의 입시비리, 발 빠르게 그들을 흉내 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당신만큼은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말하는 게 과연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까. <정직한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이 바로 그와 같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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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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