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의 등장이라고들 했다. 규모는 커졌지만 그에 걸맞는 신인이 좀처럼 나오지 않던 한국 영화계에 연상호의 등장은 파격적이었다. 2011년 <돼지의 왕>부터 2012년 <창>, 2013년 <사이비>에 이르기까지, 연상호가 내놓은 세 편의 애니메이션은 한국사회의 폐부를 찌르는 신예의 우렁찬 고함이었다.
 
연상호가 2016년 실사영화 대작 <부산행>의 연출을 맡았을 땐 한국 영화계 전체가 그 결과를 궁금해 했을 정도였다. 실사영화 데뷔부터 그 해 최고의 대작을 맡았을 만큼 그에게 걸린 기대가 막중하였다.
 
절반의 성공이자 절반의 실패였다. 연상호를 아끼던 이들일수록 안타까움을 드러냈단 건 흥미로운 일이다. 데뷔작임에도 규모 있는 대작을 매끄럽게 연출해냈다는 호평 이면에, 그렇고 그런 블록버스터를 넘어선 한 방이 있어야만 했던 게 아니냐는 아쉬움들이 묻어났다. 그러나 아직 첫 실사영화였고, 실내에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도전이 있었을 터였기에 누구도 그가 거기까지라고 예단하진 않았다.
 
문제는 이후였다. 류승룡, 심은경 주연의 <염력>, 다시 내놓은 좀비물 <반도>가 연달아 참담한 평가를 받아든 것이다. 흥행과는 별개로 <부산행>보다도 훨씬 못한 평가가 이어졌다. 평단만이 아닌 관객들의 평가까지 저조했으니 한국 영화계 최고의 기대주 중 하나였던 연상호의 성적표라고는 좀처럼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영화 <정이>의 포스터.
영화 <정이>의 포스터.넷플릭스
 
넷플릭스와 연상호의 불안한 동행
 
연상호의 다음 선택은 넷플릭스 드라마였다. 한 편의 장편영화로 응축하는 것보다 흥미로운 소재로 이야기를 이어가는 게 더 낫다고 판단한 것일까. <지옥>은 흥행면에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으나 가까이 들여다보면 허술한 대목이 적지 않은 어중간한 작품이 되고 말았다. 연상호는 제게 주어진 의혹의 시선을 거두지 못한 채로 2023년을 맞이했다. 그리고 1월, 넷플릭스에서 제작비 200억 원을 들인 대작 <정이>를 내보이기에 이른 것이다.
 
<정이>는 2020년 작 <승리호>에 이어 넷플릭스를 통해 다시금 소개된 대작 SF영화다. 확고한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로 수출할 수 있다는 기대며 한국의 발전한 기술력이 SF장르에도 충분히 도전할 만 하다는 자신감이 섞인 결과다. 한국형 SF를 표방했음에도 흔한 장르의 공식을 그대로 답습한 <승리호>는 그리 만족스런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가뜩이나 근래 작품이 좋지 않았던 연상호 감독에게 우려의 시선이 쏠린 것도 당연한 일이다.
 
불행히도 <정이>는 그 우려를 현실화시키고야 만다. 가장 큰 문제는 영화 전체에서 새로운 구석을 찾아보기 어렵단 점이다. <승리호>에서도 이미 지적되었던 바이지만 <정이> 역시 할리우드의 SF영화들이 걸었던 길을 십 수 년 늦게 그저 따라 걷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영화 <정이>의 한 장면.
영화 <정이>의 한 장면.넷플릭스
 
새로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영화는 황폐화된 지구와 여러 식민행성에서 살아가는 미래 인류를 배경으로 한다. 인간들은 연합군과 반란군으로 나뉘어 내전을 벌이고 있는데, 이야기는 연합군에 무기를 대는 군수업체 연구소에서 시작된다. 연구소장(류경수 분)과 박사(강수연 분)는 사망한 용병 정희(김현주 분)의 뇌를 복제해 수많은 클론을 제작해 연구한다. 클론은 하나씩 갇힌 창고에서 탈출하는 시험을 치르는데, 어느 하나 그 과정을 끝까지 통과하지 못한다.
 
소장은 본사 회장의 기대에 부응하려 연구를 독려하는데 여념이 없는데, 박사는 어딘지 마음이 쓰이는 모습이다. 실험과정에서 잔혹성을 드러내는 소장과 그런 그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박사 사이에서 기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여기까지 간략한 설정만 적어도 벌써 할리우드 유명 SF영화 수편이 떠오를 밖에 없다. 연합군과 반군의 대립이며, 군수품을 대는 업체의 비리, 인간적인 감정 때문에 갈등하는 연구소 직원 등의 설정은 워낙 흔한 편이다.
 
 영화 <정이>의 한 장면.
영화 <정이>의 한 장면.넷플릭스
 
넷플릭스가 선보인 한국형 SF의 실망스러움

죽음을 앞둔 이의 뇌를 기계에 옮기는 설정도 <공각기동대>며 <로보캅>이 등장한 뒤 끊이질 않아 왔다. 전투로봇에게 거듭 같은 과제를 풀도록 하는 설정 역시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에서 쓰였던 것이다.
 
아무리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지만 참신함을 무기로 삼아야 할 SF영화가 익숙한 설정을 엮어놓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는 건 아쉬운 대목이다. 할리우드 SF영화의 경우 다른 곳에서 흔한 설정을 가져오더라도 나름의 새로움을 한두 가지 측면에서나마 추구하는 것이 불문율로 여겨질 정도다. 그리하여 <마션>, <인터스텔라>, <아바타> 등의 명작들이 끊이지 않고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넷플릭스를 통해 한국이 내놓은 두 편의 대작 SF영화 <승리호>와 <정이>는 그 특성이 너무나 유사하다. 그저 시간을 잘 죽이는 것으로 족한 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냐는 넷플릭스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이 영화들로부터 더욱 강화되는 것만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연상호라는 이름에 주어지는 기대가 아직 완전히 사그라지진 않았기에, 또 어느 때보다 큰 관심을 받는 한국영화의 가능성을 여전히 믿고 있기에, 나는 <정이>가 너무나도 아쉬웠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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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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