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벨바그(La Nouvelle Vague). 프랑스어로 새로운 파도란 뜻이다. 장강의 뒷물이 앞의 물을 밀어내듯, 역사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물결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장은 아무렇게나 넘어가지 않는다. 마땅히 새 시대의 것이어야 할 것을 이 시대 가운데 불러오는 이가 있어야 한다. 정체된 흐름 가운데 다음 시대를 불러오는 이를 가리켜 사람들은 먼저 아는 자, 즉 선지자라 말한다.

영화의 역사에서도 몇몇 선지자가 있었다. 서사와 촬영, 미술과 음향 등에서 제가 속한 시대를 넘어 새 시대를 불러온 이들 말이다. 그중에서도 손꼽는 이로 장 뤽 고다르가 있다.

고다르는 누벨바그, 그 자체라 해도 좋은 인물이다. 20세기 중반부터 프랑스에서 활동한 영화평론가이자 감독인 그는 누벨바그 사조의 중심에서 영화사에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을 수두룩하게 남겼다. 기존 영화들에서 당연하다 해도 좋을 만큼 활발히 활용하던 장치를 하나하나 파괴하는 건 물론, 점프 컷과 핸드헬드 촬영, 롱테이크 사용, 저예산이기에 가능할 수 있었던 온갖 파격적 연출을 적극적으로 써먹었다.

국외자들 포스터
국외자들포스터컬럼비아 픽처스

감독들의 감독, 장 뤽 고다르의 대표작

당대 누벨바그 사조 가운데 있었다고 평가하는 여러 감독들, 이를테면 프랑수아 트뤼포, 알랭 레네, 자크 리베트, 클로드 샤브롤, 에릭 로메르 등과도 고다르는 선명한 차이를 보인다. 그가 사용한 구성과 촬영기법을 비롯한 영화적 장치들은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러 영화감독이 참조해 즐겨 활용할 정도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몽상가들>은 프랑스의 1968년을 가로지르는 청춘들의 이야기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미묘한 관계가 영화를 지탱하는 중요한 축으로 기능하는데, 이들의 캐릭터와 관계, 이들이 마주하게 되는 이야기의 상당부분을 고다르의 영화 <국외자들>로부터 빌려온 건 유명한 이야기다. 특히 세 명의 젊은이들이 정숙하기 짝이 없는 루브르 박물관을 가로질러 달리는 장면은 그때만큼이나 지금도 파격적이고 인상적인 신으로 남아 있다. 이 장면이 얼마나 강렬하고 매력적이었기에 베르톨루치는 그를 그대로 제 영화에 활용한 것일까.

제작 60주년을 맞아 한국 개봉을 앞둔 <국외자들>은 베르톨루치 외에도 여러 감독이 제 작품을 만들기에 앞서 영감을 찾아나서는 주요 참고자료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픽션> 가운데 빈센트(존 트라볼타 분)와 미아(우마 서먼 분)가 트위스트를 추는 장면이 <국외자들> 속 매디슨 댄스 신을 오마주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이밖에도 <레옹> <라라랜드> 같은 명작이 <국외자들>의 일부 장면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실이 알려져 있을 정도다.

고다르의 <국외자들>은 대체 어떤 영화이길래 수많은 작가들로부터 찬사를 받는가. 고다르는 어떤 감독이어서 그가 있기 전과 있고 난 후의 영화가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는가. 영화계의 선지자로, 그 존재 이후 비로소 영화가 한 계단 올라섰다는 평가를 얻게 한 비결이 어디에 있는 것일까.

국외자들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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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주머니, 가진 건 두 주먹 뿐... 그들의 청춘

영화는 두 사내를 비추며 시작한다. 르노 오픈카 한 대를 몰고 거리를 가로지르는 이들은 제법 죽이 잘 맞는 친구사이처럼 보인다. 번듯하게 빼 입은 프란츠(사미 프레이 분)와 한 눈에도 가난함이 엿보이는 아르튀르(클로드 브라소 분)가 그들로,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며 영어학원으로 향한다. 파리의 영어학원은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공간이다. 과거의 영광은 오간 데 없고 경제성장이 멈춘 듯한 파리의 현실 가운데서 영어를 공부해 나라 밖의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건 성공의 지름길처럼 여겨지는 탓이다.

그러나 혈기왕성한 청춘들이 어디 따분한 영어공부 따위에 시간을 쏟으랴. 프란츠는 영어학원에 제가 마음에 둔 여자 오딜(안나 카리나 분)이 있다고 털어놓는다. 그 여자를 만나러 영어학원으로 간 이들은 오딜과도 금세 의기투합해 함께 시간을 보내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단박에 오딜의 마음을 빼앗는 아르튀르의 패기가 무척이나 인상적으로 그려진다. 오딜을 좋아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사지 못하는 프란츠에 비하여, 가진 것 없으나 말과 행동 모두가 적극적인 아르튀르의 존재가 단연 눈길을 끈다.

먼저 마음을 품은 사내가 아닌, 뒤에 나타난 이에게 마음을 주는 여성. 프란츠와 아르튀르, 오딜이 그려내는 불안정한 삼각관계의 긴장은 이내 범죄이야기로 화한다. 돌로레스 히친스의 소설 <바보의 황금>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는 작품은 오딜이 살고 있는 파리 교외 이모의 집에 막대한 현금이 있다는 이야기로부터 아르튀르와 프란츠가 범죄를 공모하는 과정으로 흘러가게 된다. 이들은 사랑에 빠진 오딜을 현혹하여 현금을 훔치자고 제안하고, 순진한 오딜은 어찌하지 못하고 이를 수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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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이 다다른 범죄... 그 속에서 피어난 명장면

처음엔 계획뿐이던 범죄가 차츰 제 모양을 갖추어가는 과정 가운데 오딜과 아르튀르, 또 프란츠의 관계 또한 기묘한 모양을 띠어간다. 앞서 언급한 매디슨 댄스 장면, 또 루브르 박물관을 최단시간에 가로지르는 이 영화의 상징적 장면들은 그저 범죄를 넘어 청춘과 자유, 욕구와 젊음에 대한 찬가로 이 작품을 바라보도록 한다.

한편으로 <국외자들>은 다른 고다르 작품들도 자주 그러하듯 시대와 얽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된다. 이모나 영어학원 교사로 대표되는 기성세대, 또 기존 사회의 규범을 거스르며 제 나름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려는 이들의 욕구가 끝내 좌절되는 모습을 통하여 공고해진 계급과 사회, 그 부조리함을 상징적으로 폭로하고 있기도 하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검은 돈을 개집에 숨겨두는 이모의 모습이나 기지로써 죽은 체 하여 위기를 넘기는 장면 등은 반대로 보자면 기성세대의 치졸함이나 부도덕함을 겨냥한 것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고다르는 언제나처럼 주제의식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고 흘려보낼 뿐이다. 인물들은 프랑스가 아닌 다른 나라로 떠나서야 자유를 얻고, 그마저도 온전한 자유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어두운 전망을 남긴다.

<국외자들>, 그리고 고다르의 누벨바그 작품군은 영화가 그저 시간이나 때우는 흔한 영상콘텐츠에 그치지 않는단 걸 입증한다. 사랑과 우정, 욕망이 뒤얽힌 삼각관계는 인간관계의 본질과 긴밀히 맞닿아 영화를 보는 관객의 모습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그로부터 우리가 사는 세상과 영화 속에 펼쳐진 세상 또한 닮아 있음을 알도록 한다. 희망은 보이지 않고 고난은 흩뿌려져 있는 영화 속 세상이 현실과 다르지 않다는 깨달음은 도리어 영화를 보는 관객이 그래도 삶을 바꾸고 버텨나가야 한다는 의지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쩌면 이것이 <국외자들>과 같은 작품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이유가 아닐까.

국외자들 스틸컷
국외자들스틸컷컬럼비아 픽처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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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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