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야 할 일> 스틸컷
명필름
<해야 할 일>은 조선소 인사팀 직원들의 이야기다. 구조조정 대상자를 선정하고 그들에게 회사를 나가줄 것을 통보해야 하는 일이 어떻게 상쾌할 수가 있을까. 남의 밥줄을 끊는 일이다. 그 무게를 생각한다면 누구도 감히 내가 그 일을 하겠다고 선뜻 나설 수 없을 테다. 이런 일이란 잘 해내려 들수록 더욱 고통스러워지는 것이 아닌가.
인사팀 분위기는 그야말로 우중충하다. 다른 팀에 있다가 인사팀으로 갓 발령이 난 젊은 대리(장성범 분)에게 선배 이 차장(서석규 분)은 부서 분위기가 최악이라며 불평한다. 차석인 부장(김영웅 분)은 수시로 수석인 인사팀장(김도영 분)에게 들이받는다. 고함이 오가는 사무실에서 일거리는 죄다 이 차장 몫이다. 전문대 졸업자인 여자 대리(장리우 분)는 매번 허드렛일만 하는 신세다. 가뜩이나 손발 안 맞는 이 부서에 구조조정이란 태풍까지 닥쳐오니 무사히 계절을 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기실 한국 조선소는 구조조정에 익숙한 업계가 된 지 오래다. 구조조정이 무엇인가. 법에 따라 부실한 징후가 있는 기업으로 하여금 인력과 조직, 임금 등을 개선하도록 한 조치다. 수입은 없는데 지출만 커서 마침내 기업이 고꾸라질듯하니, 먼저 살을 깎는 심정으로 지출을 줄이도록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회사를 살리려 노동자를 쳐내는 일이다. 노동자 개인의 입장에선 결코 반가울 수 없는 일이다.
조선업계가 구조조정에 익숙해진 게 벌써 십수 년이 더 된 이야기다. 1970년대 정주영 현대 회장이 맨주먹으로 영국과 그리스를 오가며 조선기술 이식과 차관대출, 유조선 수주까지를 따내어 당시 시가의 3할가량으로 배를 지어 공급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다. 한국 조선업의 출발을 알리는 이 신화 이후 반세기 가까이가 지나는 동안 조선업은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기틀을 이뤘다.
조선강국 신화 뒤 숨겨진 이야기
그러나 생각해보자. 한국이 싼 값에 배를 지어 납품할 때 어느 나라 조선소는 손 놓고 일거리를 잃어야 했을 테다. 누군가가 계약을 따내면 누군가는 잃게 되는 것이다. 하물며 30% 가격의 덤핑계약이라면야.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흘러 조선강국이 된 한국은 정반대 처지에 놓였다. 후발주자로 싼 인건비와 거대한 부지를 갖춘 중국과 베트남, 필리핀 등이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일감을 빼앗아가는 것이다. 특수선박을 중심으로 새로운 포트폴리오를 구축하긴 했으나 변해버린 지형은 위기를 지속하게 만들었다.
업황 또한 좋지 않았다. 2000년대 중반 이후 거듭돼온 경제위기는 꾸준한 일감을 수주하는 데도 악영향을 끼쳤다. 좋을 때 불려놓은 몸집을 더는 유지할 수 없게 된 업체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어디 이것만이 이유겠는가. 삼성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 한국의 내로라하는 조선소들이 수시로 뉴스에 오르내린 일을 이 나라 깨어 있는 시민은 기억하고 있어야 마땅하다. 2007년 삼성 비자금 조성 의혹을 폭로한 전 삼성 임원 김용철 변호사는 저서 <삼성을 생각하다>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 무렵 삼성중공업은 조선부문 매출이 2조 원쯤 됐다. 이런 회사에서 2조 원 분식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 회계 감사를 맡았던 삼일회계법인 소속 회계사들에게 돈을 엄청나게 뿌렸다. 저녁마다 룸살롱에 데려갔다. 결국 텅 빈 거제 앞바다에 건조 중인 배가 여러 척 떠 있는 것으로 처리하면서 막무가내로 회계를 조작했다. 이 과정에서 부실관계사 정상화 TF팀이 꾸려졌고, 수없이 많은 회의를 했다.
분식회계로 감춰진 비용은 어떻게든 메워 넣어야 했다. 화장실 불 끄고, 화장지 없애는 식으로 10여 년에 걸쳐 해결하기로 했다. 물론, 이보다 더 강력한 수단은 구조조정이었다. 당시 6만 명이 삼성에서 쫓겨났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당시 분식된 부분을 꽤 털어냈으리라고 본다. 하지만, 이처럼 노골적인 분식회계를 알면서 용인한 회계법인에 대한 책임은 반드시 물어야 한다고 본다. -367p
국민적 기대를 받으며 출발한 조준웅 특검은 김 변호사의 고발내용을 얼마 입증하지 못했다. 특히 삼성중공업 관련 내용은 기소에도 이르지 못했다. 특검 수사결과 발표엔 '삼성중공업이 분식회계를 숨기기 위해 허위의 선박을 자산에 계상했다는 주장과 관련해 회계자료를 검토한 결과 혐의사항을 확인할 수 없었으며'라는 문구가 등장할 뿐이다. 이후 신문에 조 특검 아들이 삼성전자 과장으로 입사했다는 보도가 실렸단 걸 기억하는 이가 아직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삼성, 대우, 한진... 한국 산업의 어두운 이면